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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근

다른 표기 언어 金宇根 동의어 동욱, 東郁, 화산, 華山

요약 독립운동가.

고향에서 한학을 공부하다 1917년 만주 류허현[柳河縣]으로 건너갔다. 이후 이탁(李習)·김동삼(金東三) 등과 사귀면서 부민단에 입단하고, 재만동포들의 자활과 교육에 힘썼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 안주로 돌아와 목사 김찬성(金讚星) 등과 함께 만세운동을 지휘한 후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류허현 삼원보(三源堡)로 망명하였다.

이후 대한독립단에 입단하고,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였다. 또한 청년단연합회 총재 안병찬(安秉讚), 별동대원 장덕진(張德震)과 함께 친일분자 숙청 및 적의 기관 파괴에 힘썼다. 1920년 광복군 제1영(營) 3대장으로 임명된 뒤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국내로 들어와 평북 벽동·창성·삭주 등지에서 적의 기관을 파괴하는 한편 다수의 일본 경찰을 사살하였다.

1921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연통제(聯通制) 평북 독판부 비밀 경감(警監)에 임명되었다. 1922년 통의부 독립소대장으로서 11명의 대원을 거느리고 류허현 내의 일본 민회와 하이룽현[海龍縣] 산성진(山城鎭)의 보민회를 숙청하기 위해 활동하다 일본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1924년 참의부 참의장 백광운이 통의부계 문학빈(文學彬)·백세우(白世雨)·백병준(白炳俊)에게 피살되어 참의부 조직을 재정비할 때 독립소대장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6월 독립운동단체의 통일운동이 추진되자 남만(南滿) 군인 대표 독립소대장으로 참여하여 독립운동 노선을 강화하는 데 공헌하였다.

같은 해 강계 사서면에서 일본 경찰과 교전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25년 정의부의 류허현 지방의회의장 등을 지냈으며, 1928년 이진탁(李辰鐸)·현익철(玄益哲) 등이 조선혁명당을 조직했을 때 지방책임위원으로 뽑혔다. 다음해 11월 지방 순회 차 하이룽현에 도착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신의주감옥에서 6년간 옥고를 치렀다.

8·15해방 후 국내로 돌아와 각 지방을 돌며 사상 계몽에 힘쓰다가 대구에서 사망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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