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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독립운동가.
호는 해악(海岳). 이명은 현구(鉉九·玄九·玄狗). 고향에서 한학을 공부하다 1914년 가족을 이끌고 동삼성으로 이주하였다. 동삼성에서 이동녕(李東寧)·이시영·김창환(金昌煥)·이천민(李天民)·임의탁(林義鐸) 등과 독립운동 및 문화사업에 힘썼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온 뒤 문신소학교(文新小學校)를 설립하고 육영사업을 하는 한편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안악에서 3월 11일, 4월 6일, 4월 8일 등 세 차례에 걸쳐 일어난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밖에도 군내 여러 곳의 장날을 이용해 격렬한 만세시위운동을 주도적으로 일으킨 뒤 상해로 망명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연통제(聯通制) 황해도 경무사(警務司)로 임명되어 군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안악군 대행면 굴산리에 국내 연락사무소를 설치하여 만주와 상하이 지역의 연락 장소로 이용하였다.
이후 이승길(李承吉)을 단장으로 하는 군사주비단(軍事籌備團)의 산하 단체로서 한용단(韓勇團)을 조직하여 독립 공채를 매각하는 등 군자금 모금 활동에 주력하다, 1921년 1월 29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같은 해 8월 18일 고등법원에서 실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감옥에서 나온 그는 상해임시정부로 갔다가 국내로 잠입해, 황해도독판(黃海道督辦) 및 각 군의 요원들에게 임시정부의 밀령과 연락사항을 전달하고 군자금을 모집하여 다시 상해로 갔다.
1922년 7월 국민대표회의 문제로 상해임시정부에서 의견대립이 생기자,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의 회원으로 사태를 수습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황해도의원에 선출되었다. 같은 해 10월 28일 상해 프랑스 조계에서 10년 이내에 1만여 명 이상의 노병(勞兵)을 양성하고 100만 원 이상의 전비를 조성할 목적으로, 한국노병회 발기총회를 김구(金九) 등 20여 명과 같이 개최하였다. 이때 그는 비서부장과 총무부장을 역임하였다.
1923년 6월 3일, 윤해(尹海)·신숙 등 몇몇 사람이 국민대표회의 황해도 대표단이란 명칭을 도용하여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행동을 하자 국민대표회의파의 황해도 대표로서 참가하여 비난 성명에 연서(連署)하였다. 1924년 상해대한인교민단의사(上海大韓人僑民團議事) 및 총무부장을 역임하고, 이 단체에서 경영하는 인성학교 이사로 교육운동에 앞장섰다. 같은 해 4월 1일 한국노병회의 회계검사원에 선임되었다. 1925년 3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서, 임시정부의 임시 대통령 이승만탄핵심판위원에 선임되었다.
1926년에는 민족교육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최창식(崔昌植)·김규식(金奎植) 등과 함께 상해 천상리(天祥里)에 삼일공학(三一公學)을 설립하였다. 또한 문일민(文一民) 등과 같이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를 조직하였다. 1930년 1월 25일 이시영·김구·이유필·조완구·조소앙(趙素昻)·안창호·박기준(朴基俊)·엄항섭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한 후 중앙집행위원과 함께 문화부장·재무부장·감사 등을 역임하면서 민족진영의 단결을 굳게 하였다.
1935년 난징[南京]에서 오당통합운동(五黨統合運動)에 참여해 민족혁명당 조직에 진력하였다. 1937년 1월 한국독립당 감찰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다가 1940년 충칭[重慶]으로 가서 의정원 의원으로서 그 해 9월 17일 한국광복군 창립에 노력하였다. 1943년 병으로 사망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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