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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947년 5월 24일 여운형 계열의 사회노동당이 해체되면서 생긴 중간좌파 정당.
사회노동당은 1946년 11월 여운형 등이 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조선신민당 등 3당합당에 의해 창당한 박헌영 계열의 남조선노동당의 창당에 반대하여 조직되었다. 그러나 당의 진로를 결정하지 못하고 분열되어 결국 1947년 2월 해체되었다. 이후 여운형 계와 조선신민당·근로대중당·해방동맹 등이 참여하여 근로인민당이 창당되었다. 창당과정에서 기존의 사회노동당 노선을 이어받아 남조선노동당과 정면대결하자는 사회노동당 해체파와, 계급정당을 지양하고 국민대중정당의 길을 주장하는 조선인민당 재건파 사이에 노선투쟁이 있었다.
강령을 보면 정치면에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의한 남북통일정부를 수립하되 민주적 정당 및 사회단체는 자율적으로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미·소공동위원회는 이에 협찬 원조할 것, 경제면에서 중요 산업의 국유화, 금융기관의 국유화, 주요교통기관 및 농업의 국유화, 교육면에서 국고부담의 의무교육제 실시, 노동면에서 민주적 노동법의 제정·실시 등 조선인민당의 것과 비슷했다. 위원장은 여운형, 부위원장은 백남운·이영(李英)·장건상, 사무국장은 문갑송, 조직국장은 이만규, 선전국장은 장건상 등이 맡았다.
천도교 강당에서 열린 결당식에서 여운형은, "노동자·농민·인텔리·소시민의 네 계층은 결속을 공고히 하여 조선의 민주과업 완수에 진력하자"는 요지의 개회사를 했다. 또한 당 강령 끝에 초안에는 없던 "인민위원회 체제의 인민공화국 수립"이라는 구절 첨가와 "미군정과의 관계에는 시시비비를 가려 투쟁하고, 민주주의 민족전선에는 원칙적으로 참여하며, 노동운동에서는 정치적 요소를 일소할 것" 등을 결의했다.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이 갑자기 암살된 후 혼란에 빠져 와해되고 말았다. 사회노동당계열의 간부는 일선에서 물러나고 인민당계가 새로 주도권을 잡았으나 구심점은 여전히 여운형 노선이었다. 이때 근로인민당은 성명을 통해, "인민당은 여운형의 정치이념을 실현하는 대정당을 만들려고 출발한 것이다. 진보적 민주주의 투쟁과 혁명정신을 버리지 않고 과열과 편벽을 피하면서 완전한 중간당으로 나선 것이다"라고 재천명했다.
근로인민당은 여운형의 진보적 민주주의 정치노선에 따라 중도대중정당을 목적으로 했으나, 당시 좌우대립의 세력구도와 치열한 정치투쟁 공간 속에서 광범위한 대중적 기반을 구축할 뚜렷한 전략을 갖지 못한 채 해체되었다. 이의 와해는 당시 중도 정치세력의 붕괴를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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