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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한국의 구세군은 구세군 창설자인 W. 부스가 1908년 일본을 방문했을 때 R. 호가트를 한국 개척사령관으로 임명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호가트는 서울에 부임해 서대문구 평동에 본부를 정하고 선교를 시작했으며, 1909년에 〈구세신문〉을 창간하고, 1910년에는 사관양성을 위한 성경대학(지금의 구세군사관학교)을 설립했다. 또 1915년 종로구 신문로에 본영을 세웠으며, 1916년에는 일종의 통신교육제도인 영학생제도를 도입했다. 이후 걸인구제사업 전개, 〈금주호〉 발행을 통한 금주운동, 자선냄비 개설, 가정단사업의 실시, 구세군기념병원 설립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한국의 구세군은 영국 런던에 있는 만국본영을 비롯해 대한기독교서회·기독교방송국·대한성서공회·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등의 연합기관과 협력하고 있다.
한국의 구세군은 구세군 창설자인 W. 부스가 1908년 일본을 방문했을 때 R. 호가트(한국 이름 허가두[許嘉斗])를 한국 개척사령관으로 임명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호가트는 서울에 부임한 다음 서대문구 평동에 본부를 정하고 선교를 시작했으며, 1909년에는 〈구세신문 救世新聞〉을 창간하고, 1910년에는 사관양성을 위한 성경대학(지금의 구세군사관학교)을 설립했다.
또 1915년에는 종로구 신문로에 본영을 세웠으며, 1916년에는 일종의 통신교육제도인 영학생(營學生)제도를 도입했고, 1917년에는 사관부인과 전도부인 양성제도를 마련했다.
이후 걸인구제사업 전개, 〈금주호〉 발행을 통한 금주운동, 자선냄비 개설, 가정단사업의 실시, 구세군기념병원 설립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1939년 선교사들이 추방되고 1940년 구세군이 일본처럼 구세단으로 개편되는 등 수난을 겪기도 했다. 8·15해방 후 구세군은 바로 복원되지 못하다가 1947년 만국본영(萬國本營)에서 사령관이 파견되어 창설 당시의 노선으로 재발족했다.
1961년에는 사관학교가 2년제로 정착되었으며, 1972년에는 신문로에 구세군회관을 건립했다. 1989년에는 전국 구세군 정교연합회를 발족했다.
한국의 구세군은 국외에서는 영국 런던에 있는 만국본영과, 국내에서는 대한기독교서회·기독교방송국·대한성서공회·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등의 연합기관과 협력하고 있다. 현재 구세군은 인사국·기획국·업무국 3개국 아래 서울·남서울·충남·충북·충서·서산·경남·경북·전라 지방의 9개 지역 지방본영을 두고 모두 230여 개의 군영을 운영하고 있으며, 군국자문위원회를 비롯한 5개 위원회와 정보통신실 등 5개실, 구세군연수원, 백화수련원 등의 기관을 두고 있다. 그밖에 여성사업부와 사관학교가 있으며, 57개의 사회복지 전문시설이 있다.
기관지로는 월간 〈구세공보(救世公報)〉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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