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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고려가 1107년(예종 2) 동북면 새외지역에 거주하는 여진족을 쳐부수고 1108년에 그 지역에 쌓은 9개의 성(城).
9성이 어느 성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는데, 이는 설치될 때의 9성과 여진에 돌려줄 때의 9성 명칭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흔히 함주(咸州)·영주(英州)·웅주(雄州)·길주(吉州)·복주(福州)·공험진(公嶮鎭)·통태진(通泰鎭)·진양진(眞陽鎭)·숭녕진(崇寧鎭)을 가리키며, 진양진·숭녕진 대신 의주(宜州)·평융진(平戎鎭)을 꼽기도 한다.
여진족은 본래 만주의 지린 성[吉林省] 일대를 중심으로 하여 연해주 방면에 산거(散居)하던 종족이다. 이들은 발해시대 이후 점점 남쪽으로 퍼져나와 신라말·고려초에는 동북방면으로 함경도 일대와 서북방면으로 압록강 남안(南岸) 평안도 일대에까지 흩어져 살게 되었다.
고려는 국초부터 이들과 관계를 맺었는데, 동북 방면의 여진을 동여진(東女鎭) 또는 동번(東蕃)이라 하고, 서북 방면의 여진을 서여진 또는 서번(西蕃)이라 불렀다. 여진족은 그들의 사회적·경제적 필요에 따라, 또 대륙의 정세변화에 따라 고려에 조공(朝貢)하여 필요한 물자를 교역하기도 하고, 때로는 변방을 침략·약탈하기도 했다.
태조 이래 여진부락은 꾸준히 내투(來投)하여 동여진의 많은 부락은 고려의 기미주(羈糜州)로 존재하게 되었고, 문종 때에 이르러 대대적으로 내부(來附)하여 고려의 군현으로 편제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런데 11세기 중반 이후 북만주의 쑹화 강[松花江] 지류에 살던 생여진의 완옌부[完顔部]가 세력을 키워 두만강 유역까지 진출하면서 여진지역에 변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완옌부는 고려에 부속하고 있던 갈라전(曷懶甸) 일대의 여진부락을 경략하고, 계속 고려에 내투하는 여진인을 추적하여 1104년(숙종 9) 정주(定州)의 장성(長城) 부근까지 이르러 주둔했다.
이에 고려와 완옌부 여진은 2번 충돌했는데, 고려가 패하고 강화를 맺었다.
고려는 패전의 원인을 적은 기병(騎兵)인 데 비해 아군은 보병이 주축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별무반(別武班)을 편성했다. 별무반은 기병인 신기군(神騎軍)과 보병인 신보군(神步軍) 및 특별부대, 승병으로 조직된 항마군(降魔軍)으로 이루어졌다.
1107년(예종 2) 12월 윤관(尹瓘)을 원수(元帥),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로 하는 17만 대군은 정주관(定州關)을 떠나 여진족을 소탕하면서 갈라전 일대를 점령했다. 고려군은 먼저 영주·웅주·복주·길주 등 4주에 성을 쌓았다. 다음해 2월에는 함주를 대도독부(大都督府), 위의 4주와 공험진을 방어주진(防禦州鎭)으로 편제하고, 이어서 3월에 의주·통태진·평융진에도 성을 쌓아 9성으로 삼았다. 이것이 이른바 윤관의 9성이다.
이어서 이곳에 남쪽지방의 민호(民戶)를 사민(徙民)하여 채웠다.
〈고려사〉 윤관전에 기록되어 있는 영주청벽기(英州廳壁記)에 의하면 함주에 병민(兵民) 1,948정호(丁戶), 영주에 1,238정호, 웅주에 1,436정호, 길주에 680정호, 복주에 632정호, 공험진에 532정호, 합계 6,466정호가 사민되었다. 민지(閔漬)가 편찬한 〈동국편년강목 東國編年綱目〉에는 6만 9,000호로 기록되어 있는데 신빙성이 약하다. 이와 같이 고려가 여진 거주지역을 점령하여 그곳을 양계(兩界)의 행정체계인 주(州)·진(鎭)으로 편성하고 민호를 사민한 것에 대하여, 전통적인 북진정책의 실현인 동시에 농업사회의 내적 팽창에 따른 적극적인 영토확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여진족들은 완옌부를 중심으로 결속하여 강력하게 저항하면서, 한편으로는 강화를 청하면서 9성을 돌려달라고 애원했다.
고려 정부에서는 9성 환부문제를 의논하고 거주지를 빼앗긴 여진인이 먼 곳의 여진인까지 끌어들여 고려를 계속 침입하면 군사의 상실도 많을 것이며, 또 개척한 땅이 크고 넓으며 9성의 거리가 요원하고, 이로 인해 적이 복병을 두어 자주 왕래하는 사람을 초략(抄掠)하는 일이 잦다는 것, 또 국가가 다방면으로 군사를 징발하면 중외(中外)가 소란스러우며 기근과 질병으로 백성들의 원망이 일어난다는 것 등을 이유로 하여 여진에게 9성 지역을 돌려주기로 결정했다.
9성을 설치한 지 1년 5개월 정도가 지난 1109년 7월에 고려군은 9성에서 철수를 시작했다.
9성에 대해서는 그 설치된 지역이 어디였는가가 큰 쟁점이 되어왔다. 〈고려사〉 윤관전에는 그가 여진족을 제압한 뒤 여러 장수를 보내 지계(地界)를 획정했는데, 동으로는 화곶령(火串嶺)에 이르고 북으로는 궁한이령(弓漢伊嶺)에 이르며 서로는 몽라골령(蒙羅骨嶺)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그가 임언(林彦)을 시켜 전공을 기록하게 한 영주청벽기에는 "그 지방은 300리인데, 동으로는 대해(大海)에 이르고 서북으로는 개마산(蓋馬山)을 끼었으며 남으로는 장주(長州)·정주(定州)와 접했다"고 되어 있다. 또 위치설정의 한 지표가 되는 공험진에 대해서는 〈고려사〉 지리지에 "혹 공주(孔州)라고도 하고 혹 광주(匡州)라고도 하는데, 일설에는 선춘령(先春嶺) 동남 백두산 동북에 있었다고도 하며, 혹 소하강변(蘇下江邊)에 있었다고도 한다"고 되어 있다.
이러한 자료들을 해석하는 방법에 따라 의견이 갈리는데, 대개 ① 공험진의 위치를 두만강 북쪽으로 잡아 그 이남으로부터 정평(定平)까지의 함경도 일대에 걸쳐 있었다는 설, ② 길주 내지 마운령 이남부터 정평까지 주로 함경남도 일대로 비정하는 설, ③ 함관령 이남 정평 이북의 함흥평야 일대로 보는 설의 3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③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학자들이 제기한 것으로, 실지조사를 실시하여 9성의 각각을 특정지역에 비정하기도 했으나 식민사관 입장에서 9성의 범위를 좁히고자 하여 억지로 함흥평야 일대에 비정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②는 영주청벽기 등을 합리적으로 이해하려는 한백겸(韓百謙)·정약용(丁若鏞) 등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주장으로 일부에서 계속 지지하고 있다.
①은 〈고려사〉 지리지, 〈세종실록〉 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등 조선 초기에 편찬된 관찬문서에 나타나는 것으로 최근에도 이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연구가 발표되고 있다. 완옌부 여진족이 더욱 성장해 금나라를 세운 것은 고려가 9성에서 철수한 지 6년 뒤의 일이다. 고려가 9성지역을 확보하지 못한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완옌부 세력의 발흥에 있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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