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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기 위해 모이는 추기경들의 회의와 이때 그들이 엄격히 격리되는 방식을 일컫는 말.
초대 교회에서 로마 주교는 다른 도시에서 주교를 선출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선출되었다.
즉 로마의 성직자들이 선거인단이고 이웃 관구의 주교들이 회의의 의장과 선거의 판정관 역할을 하고 일반인들이 찬성이나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교황 선출을 둘러싸고 분쟁과 분열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세속 권력자가 질서를 유지시킬 필요가 있었는데, 그결과 나중에는 새로 선출된 교황이 황제의 재가를 받기 전에는 주교 성별을 받을 수 없는 사태가 발생했다.
또한 황제는 교황 선거를 주재했으며, 때로 교황 후보를 내세우기도 했다.
이 제도가 11세기 중엽까지 계속되었는데, 1059년 교황 니콜라오 2세가 추기경들이 선거를 주관하고 그중에서도 주교 추기경들이 우위를 점하는 선거절차 개정에 관한 칙서를 공포했다. 1179년 제3차 라테란 공의회는 모든 추기경을 동등한 선거인단으로 정하고, 투표수의 2/3 이상의 득표를 얻어야 교황에 선출되도록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법을 악용하는 사례들이 발생했다.
1268년 클레멘스 4세가 죽은 뒤 2년이 지나도 17명이나 되는 추기경들이 교황을 선출하지 못하자 지역 행정관은 선거인단을 주교궁에 감금했고, 주교궁의 지붕을 떼어내고 빵과 물 외에는 아무것도 주지 않자 마침내 추기경들은 그레고리오 10세를 교황으로 선출했다. 1274년 제2차 리옹 공의회에서 그레고리오 10세는 추기경들에게 폐쇄된 선거회에서 엄격한 규율에 따라 교황을 선출하도록 하는 내용의 규약을 공포했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선거 절차가 여러 차례 개정되었고, 마침내 교황 비오 10세는 교황 선거의 모든 절차를 법령으로 성문화했으며(1904. 12. 25), 이 법령이 콘클라베에 대한 기존의 모든 법률을 대체하게 되었다.
비오 12세의 법령(1945. 12. 8)은 비오 10세의 법령을 몇 군데 수정했고, 당선 득표수를 투표수의 2/3 득표에서 1표를 더 늘렸다. 바오로 6세는 이 법령에 여러 가지 절차상의 지침을 덧붙였다.
교황이 죽으면 일반 교회행정에서 추기경단을 대표하는 수석 추기경이 바티칸 궁전의 책임자가 되고, 교황이 죽은 다음날부터 콘클라베가 시작될 때까지 매일 아침 전체 추기경들이 모여 현안에 대해서 협의하며, 교황이 죽은 뒤 18일이 되면 추기경들이 교황선거에 들어간다.
교황선거가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바티칸궁 선거장소는 외부인의 출입이 통제되며, 그곳으로 들어가는 문도 차단된다.
선거장소 안에는 추기경들과 그들의 비서, 의전(儀典) 담당자들, 특정한 임무를 지닌 일정한 수의 다른 성직자들, 의사들, 봉사단만 들어갈 수 있다. 선거장소 내부는 작은 방들로 나뉘며, 추첨에 따라 추기경 한 사람 당 방 하나가 배정된다. 추기경들은 하루에 2번 시스티나 성당에서 비밀투표를 한다.
개표가 끝나면 바로 투표용지들을 부속예배당에 마련한 난로에 넣어 태우며, 창문으로 낸 연통을 통해서 나오는 연기를 보고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군중은 투표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알게 된다. 당선 득표를 한 후보자가 없을 경우에는 투표용지를 젖은 밀짚과 함께 태워 검은 연기가 나게 하고, 교황이 선출되면 투표용지를 마른 짚과 함께 태워 흰 연기가 나게 한다.
한 후보자가 당선 득표를 하면 추기경 가운데 가장 나이 많은 사람이 공식적으로 교황 임명을 받아들일 것인지와 어떤 교황명(敎皇名)을 가질 것인지를 묻는다.
후보자가 교황직을 받아들이면 선임 부제추기경이 성 베드로 대성전 중앙 발코니로 나가 그 소식을 공포하며, 곧이어 새 교황이 교황복을 입고 그곳으로 나가 군중을 향해 첫 축복을 한다. 콘클라베는 대체로 새 교황이 추기경단 앞에서 연설을 한 뒤 해산 명령을 내림으로써 폐회한다. 새 교황 취임식은 그로부터 며칠 뒤에 있으며, 날짜는 교황 자신이 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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