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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임대

다른 표기 언어 郭林大 동의어 곽태종, 郭泰鍾

요약 독립운동가.

본명은 태종(泰鍾). 평양 숭실전문학교에서 공부한 뒤, 1909년부터 황해도 신천에 있는 신성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1911년 11월, 일제가 무단 통치의 일환으로 민족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의 암살 미수 사건을 확대·조작한 105인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1912년 9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모살미수로 징역 7년을 선고받았으나 , 1913년 10월 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그는 감옥에서 풀려난 직후인 1914년 4월 미국으로 건너간 뒤, 같은 해 10월 21일 안창호(安昌浩)가 주도하던 흥사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0년 2월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盧伯麟)이 김종린과 함께 캘리포니아 주 윌로스에 한인 비행학교를 설립할 때 참여하였다.

당시 한인 비행학교에서는 1920년 5월에 비행기 2대를 사들여 미국인 기술자 1명, 한인 비행사 6명으로 교수진을 구성하였으며, 재학생은 19명이었다. 학교를 유지하고 운영에 소요되는 재정은 교포들의 특연(特捐)과 봉사로 유지되고 있었다. 이때 그는 노백린 교장 아래에서 학생들을 통솔, 감독하는 연습생감독 직을 맡았다.

윌로스 비행학교는 1920년 7월 제1회 졸업생 27명을 배출했으며, 1923년에는 11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는 등 3회에 걸쳐서 40여 명의 비행사들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미국 서부 지역에 몰아 닥친 풍수해로 인해 동포들의 재정 후원이 어려워지면서 문을 닫자, 그는 조국 독립에 대한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켄터키에 있는 사립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 이론을 공부하였다.

1929년 1월 그는 흥사단 미주위원부 이사부장에 선임되어 등사판으로 발간되던 〈흥사단보〉 간행을 주관하였다. 1944년 10월 28일, 미주와 하와이 각지에 있던 13개의 한인 단체 대표가 회동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외교위원부 개조안 발표에 대한 대책회의를 개최하여 임시정부 개조안을 통과시켰는데, 그도 이 회합에 참석하여 김원용(金元容) 등과 함께 대표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미국으로 건너간 지 57년 만인 1971년에 귀국하여 〈못 잊어 화려한 강산〉을 집필하던 도중 사망하였다.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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