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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미국 매사추세츠 우스터, 1882. 10.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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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45. 8. 10, 미국 볼티모어 |
국적 | 미국 |
요약 현대 로켓 공학의 아버지라 불리며, 고전이 된 논문 <극한고도에 도달하는 방법>(1919)을 펴냈다. 어린시절부터 물리적 현상들에 대해 호기심이 많았으며 발명에도 소질을 보였다. 박사학위를 받은 우스터의 클라크대학에서 물리학을 가르쳤으며, 로켓 실험을 했다. 공기가 없는 진공 속에서도 추력과 이를 통한 추진이 발생된다는 사실을 작은 실험실 안에서 최초로 증명했다. 그는 또 최초로 액체산소와 가솔린 등 액체연료를 사용하는 로켓 모터를 개발했고, 1926년에는 매사추세츠 주에 있는 농장에서 세계 최초의 액체추진 로켓 기관의 비행 실험을 하여 잠시나마 이륙에 성공했다. 1935년 최초로 초음속 액체연료 로켓의 발사에 성공했고, 로켓의 방향조절기구와 높은 고도에 도달하기 위한 '다단식 로켓'의 사용 등으로 각 분야에서 최초의 특허를 땄다.
어린시절 및 교육
고더드는 회계원이며 판매원이자 기계공장의 주인이었던 아버지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어린시절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남북전쟁 이후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던 미국 산업혁명에 흥미를 느꼈다. 그는 물리적 현상들에 대해 호기심이 많았으며 발명에도 소질을 보였다.
1898년 당시 〈보스턴 포스트〉에 연재되었던 H.G. 웰스의 우주공상소설 〈우주전쟁 War of the Worlds〉은 어린 고더드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우주탐사). 훗날 그는 그 소설을 읽고 얼마 되지 않아 실제로 작동하는 우주비행 기계를 만들고 싶어했다고 술회했다.
1899년 10월 19일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기념일'이 되었다. 그는 그날 일기에 "집 뒤뜰의 벚나무에 올라 만약 내가 화성까지 갈 수 있는 어떤 기구를 만든다면 얼마나 멋질까라고 상상했다. …벚나무에서 내려올 때는 마침내 내 삶의 목표가 뚜렷해졌다."라고 썼다.
우주비행과 그 기구에 대한 열정은 우스터공과대학에 다닐 때도 계속되었다.
'1950년의 여행'이라는 제목의 과제에서 그는 '지구에 사는 생명체가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여행'에 관한 생각에 흥미를 가지고 실제로 강철진공관 속에 자동차를 고정시키고 전자석(電磁石)의 인력(引力)과 척력(斥力)으로 자동차를 움직이도록 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뒤 가속과 감속의 추력(推力)을 주요원리로 하는 운반기관의 진공관시스템에 대해 특허를 따냈다.
매사추세츠에서의 연구활동
1908년부터 오랜기간 우스터의 클라크대학에서 활동했다.
그곳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물리학을 가르쳤으며, 로켓 실험을 했다. 작은 실험실 안에서 그는 공기가 없는 진공 속에서도 추력과 이를 통한 추진이 발생된다는 사실을 최초로 증명했다(→ 제트 추진). 그는 또 최초로 액체산소와 액체수소를 비롯한 여러 가지 연료의 무게당 에너지와 추력의 비(比)를 수학적으로 연구했으며, 액체산소와 가솔린 등 액체연료를 사용하는 로켓 모터를 개발했는데, 이는 15년 뒤 독일의 V-2로켓 무기에 사용된 것과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
1925년 그의 실험실에 이웃한 건물에서 행해진 액체추진 로켓의 지상시험에서 그는 "로켓이 만족스럽게 작동했으며 자체 중량을 들어올렸다"고 기록했다. 1926년 3월 16일에는 매사추세츠 주(州) 어번에 있는 에피 숙모의 농장에서 세계 최초의 액체추진 로켓 기관의 비행이 있었는데 잠시 동안이나마 이륙에 성공했다.
과학적 이론이나 발명의 경우 종종 그렇듯이, 로켓기관의 발달은 세계 여러 곳에서 동시에 진행되었다.
고더드는 비록 작지만 정교한 로켓 기관을 이륙시키는 데 있어서 당시 러시아와 독일의 우주비행 분야의 개척자들보다 휠씬 앞선 실험을 했다. 그가 우주발사체의 모델 제작에 몰두하고 있을 때, 러시아의 외딴 마을에서는 치올코프스키라는 한 교사가 역시 우주비행의 가능성에 매료되어 있었다.
1903년 소련의 콘스탄틴 E. 치올코프스키는 〈로켓을 이용한 우주탐사〉를 썼으며 여러 해가 지난 뒤에 우주비행의 선구적 업적으로 평가받았다.
우주비행의 개척자 3명 중 또 한 사람인 독일의 헤르만 오베르트는 고더드의 초기 연구논문이 발표된 지 4년 뒤인 1923년 〈우주공간으로 가는 로켓 Die Rakete zu den Planetenräumen〉이라는 논문을 펴냈다.
찰스 G. 애봇이 관장으로 있던 스미스소니언 연구소는 고더드의 재정지원 요청을 받아들여 그의 실험 및 작업을 위하여 수년간 적절한 지원을 했다.
1929년 떠들썩했으나 실패로 끝난 고더드의 비행실험이 대중 앞에 나서기 싫어하는 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신문에 보도되었고, 이를 계기로 찰스 A. 린드버그의 대서양 횡단 비행과 함께 그의 실험은 더욱 많은 재정적 지원을 얻어내게 되었다. 1930년부터 1940년대 중반까지 항공학(航空學)의 진흥을 위한 구겐하임 기금의 대폭적인 지원으로 그는 미국 남서부 뉴멕시코 주 로즈웰에 자그마한 작업장과 작업인력을 갖추고 시험비행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이곳에서 그는 높은 고도(高度)에 도달하기 위한 끊임없는 시행착오를 계속하며 여생을 보냈다.
로즈웰에서의 실험
로즈웰에서 실험을 하던 1935년 그는 최초로 초음속(超音速) 액체연료 로켓의 발사에 성공했다.
로켓의 방향조절기구와 높은 고도에 도달하기 위한 '다단식(多段式) 로켓'의 사용 등으로 각 분야에서 최초의 특허를 땄다. 그는 또한 로켓 연료에 알맞은 펌프와 자냉식 로켓 모터를 비롯하여 인간을 외계로 보내기 위해 고안된 기관의 여러 부품을 개발했다. 한편 그의 작업은 언론이나 대중들에게 아주 흥미로운 뉴스거리였는데, 사람들은 '얼빠진' 고더드가 과연 지구 밖의 세계를 여행하는 것이 실제로 가능할까 하고 흥미를 가졌다.
달 여행에 쓰이는 추력기의 초기 원형인 그의 소형 로켓들은 당시 지상에서 고도 1.6㎞까지 올라갔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그의 연구를 군사적으로 이용하도록 제안했으나 로켓 개발에 대한 무관심 때문에 로즈웰 연구소는 문을 닫게 되었으며, 그대신 그는 메릴랜드의 아나폴리스에서 해군과 계약을 맺고 항공모함 이륙항공기에 쓰일 제트 추력 부스터의 개발작업에 참여했다.
경영자이며 자선사업가인 해리 A. 구겐하임과 린드버그는 이 우스터 출신의 발명가와 그가 실현시키려 하는 우주탐사의 가능성을 변함없이 옹호했다.
고더드는 제트와 로켓 시대를 눈앞에 두고 1945년 후두암으로 죽었다. 그가 죽은 지 여러 해 뒤 미국 정부는 업적을 인정하여 그의 특허에 100만 달러의 사용료를 내게 했다. 클라크대학의 고더드 기념도서관은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이름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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