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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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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프로이센 슐레지엔 브레슬라우, 1764. 5. 2
사망 1832. 6. 9, 빈
국적 독일

요약 독일의 정치평론가·언론인.
Friedrich von Gentz라고도 함.

개요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의 이론을 반박한 유명한 글들을 썼으며 메테르니히의 고문으로서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그가 남긴 글들은 나폴레옹 시대와 그 다음 시대의 유럽 역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평민이었으나 1804년 스웨덴의 '북극성' 훈장을 받은 뒤 귀족칭호인 폰(von)을 즐겨 썼다.

초기생애와 활동

아버지는 프로이센 공무원이었고 어머니는 베를린에 정착한 프랑스 위그노교도였으며, 어린 겐츠는 이 위그노교도들과 사귀었다.

따라서 겐츠는 나이가 들 때까지 기품있는 독일어 실력만큼이나 명료하고 우아한 프랑스어 실력을 발휘해 프랑스어로 일기를 썼다. 그는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인 이마누엘 칸트 밑에서 공부했다. 곧 칸트의 공화제적 이상주의·급진주의·평화주의를 거부했으나 칸트는 그의 사상에 끊임없이 영향을 끼쳤다.

주로 독학으로 공부해 역사·법률·경제 지식을 책에서 얻었으며 특히 영국 책을 많이 읽었다.

1785년 베를린에서 프로이센 공무원으로 일하기 시작했고 1793년에 육군부(陸軍部) 비서관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지 못해 수도의 사교계로 뛰어들었다. 1790년대 베를린은 프랑스 망명귀족, 러시아·영국·오스트리아 귀족, 작가 등과 독일 전역에서 몰려든 자유분방한 예술가들이 뒤섞여 유럽 지성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이렇게 어느 정도 방종한 사회에서 그는 뛰어난 달변가, 신사, 도박꾼, 탕아로 이름을 날렸다. 결혼은 몇 년 만에 파경에 이르렀으나 가정적인 성격이 아니었으므로 재혼하지 않았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겐츠는 정치저술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칸트의 제자로서 '인류의 깨달음'이라 하며 프랑스 혁명을 환영했으나, 곧 혁명을 비판하기 시작해 끝내는 프랑스 혁명과 맞서 싸우게 되었다. 1793년 그는 에드먼드 버크의 저서 〈프랑스 혁명 고찰 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의 독일어 번역판을 출판했다.

그때부터 겐츠는 영국의 유명한 보수주의자 버크를 겐츠 자신의 사상을 가장 잘 반영한 대가(大家)로 여겨 그의 문체를 칭찬하며 모방했다.

그는 자신이 인수하여 새로 창간한 2개의 정기간행물인 〈신독일월보 Neue deutsche Monatsschrift〉·〈역사저널 Historisches Journal〉, 1800년부터 비정기적으로 출판해온 소책자를 통해 프랑스 혁명을 계속 분석했다. 그 내용은 국내사건과 외교정책 및 그 상호관계, 자코뱅 과격주의자들의 제국주의, 총재정부(總裁政府)와 나폴레옹의 문제점들에 관한 것이었다.

1795~1802년에 쓴 글들은 지금도 논란의 여지가 매우 많다. 오늘날 용어로 보수적 자유주의라 부를 수 있는 그의 사상은 독재적 평등주의에 맞서 시민의 자유를 보호하고 불합리한 제국주의로부터 유럽 전체의 법질서를 방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가 보기에 1793년 뒤부터 프랑스 정부가 추구하고 있던 하나로 통일된 '세계국가'의 출현을 막기 위해 강대국끼리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창했다.

특히 미국혁명과 프랑스 혁명의 차이점을 지적하여 미국혁명을 영국의 강탈에 대항한 역사적 권리의 방어로 보았으나 프랑스 혁명은 반역사적·침략적이며 이데올로기를 내포한 사건으로 생각했다.

이런 견해는 여러 논문에서 볼 수 있으며 특히 조지 워싱턴의 죽음에 관해 쓴, 가장 유럽인다운 논평이라 할 수 있는 그의 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의 유명한 논문 〈영국 재무 행정에 관하여 Über die britische Finanzverwaltung〉는 이런 정치적 연구를 경제적 고찰로 보완한 것으로서, 영어로 번역되어 영국 정치가 소(小) 윌리엄 피트의 찬사를 받았다.

정치가로서 겐츠는 프랑스 전제주의에 대항해 실패로 끝난 그전의 제1차 유럽 동맹보다 나은 새 '자유 유럽'의 제휴를 위해 애썼다.

그러나 프로이센이 1795~1806년에 엄격한 중립정책을 폈기 때문에 베를린에서 활동하고 있던 그의 입장은 점점 어려워졌다. 따라서 1803년 나폴레옹에게 저항하는 유럽인들의 중심지가 된 으로 옮겨갔다. 그 전 해에는 런던을 방문해서 왕족·내각·야당·언론 등으로부터 동맹자로서 따뜻한 환영을 받기도 했다.

그뒤부터 영국에서 꽤 많은 재정지원을 받았으며 나중에는 유럽 여러 왕과 정부의 지원도 받았다. 그가 지원금을 받았다는 것이 반드시 그의 타락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가 귀족처럼 호화롭게 살고 싶어한 것은 사실이지만 어느 정도 자신의 사상과 일치하는 사람들에게서만 돈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대신 자유롭게 독자적인 자신의 견해를 말이나 글로 표현함으로써 후원자들에게 득이 되도록 했다. 만약 후원자들이 그밖의 다른 것을 요구해오면 그들과의 관계를 끊었다. 그는 빈에 주재하는 외국공사의 자유고문으로서 전쟁이나 평화시에 하나로 움직일 수 있는 대(大)유럽 동맹을 만들자는 자신의 사상을 계속 선전했다.

"만약 유럽 어느 곳에서든 전쟁이 일어난다면 당신은 전쟁을 시작한 사람이 바로 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오." 그러나 결과는 실망의 연속이었다.

제3차 유럽 동맹 전쟁(1805~07)에서 아우스터리츠 전투가 동맹국의 패배로 끝나 러시아와 프랑스가 화해를 맺었으며, 제4차 동맹은 나폴레옹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공주와 결혼, 프랑스-오스트리아 동맹이 이루어짐으로써 실패로 끝났기 때문이었다. 나폴레옹의 1806년 베를린 칙령(대륙봉쇄령)으로 영국물자가 대륙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되자 겐츠와 영국의 접촉은 위태롭게 되어 아주 가끔 영국에서 기금과 소식이 왔고 그나마 불충분했다.

그는 자신의 고립된 처지를 슬프게 생각했고 1810년경 유럽의 자유를 부르짖는 그의 목소리는 약해졌다.

메테르니히와의 교제

겐츠는 새로 부임한 오스트리아 외무장관인 메테르니히와 친구가 되어 빈 관청을 드나드는 데 도움을 받았고 추밀원 의원(Hofrat)이란 정식 직함도 받았다.

그는 메테르니히를 생각이 깊고 세상물정에 밝으며 실리적인 정치가로 찬양하여 훌륭한 의논 상대로 삼았으며, 겐츠는 막강한 힘을 가진 장관의 선전원이자 허물없는 조언자가 되었다.

나폴레옹의 몰락과 함께 시작된 해방전쟁은 겐츠의 지친 정신에 별다른 열망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프랑스에 대항해서 유럽의 무장을 호소하던 그는 이제 나폴레옹이 권좌를 지키기를 원했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 프랑스에서 과격한 자코뱅주의가 새로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유럽에서 러시아가 우위를 차지하는 것이 염려됐기 때문이었다.

프랑스보다 러시아가 주도권을 잡는 것이 더욱 싫었던 것 같다.

그가 최고로 성공한 때는 이미 그의 원기가 시들기 시작할 때였다. 그는 나폴레옹 시대가 끝난 바로 뒤 빈·아헨(엑스라샤펠)·트로파우·라이바흐·베로나에서 열린 대회의 서기장을 맡으라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지위는 신분, 명예, 세력, 돈과 같은 많은 이익이 보장되었다.

일찍이 나폴레옹에 맞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선전포고문을 쓴 적이 있었으므로 지칠 줄 모르는 솜씨로 이런 유럽 회의에서 의정서(議定書)를 작성했다. 그러나 단순한 저술가로서는 찾아보기 힘든 이런 뒤늦은 성공도 그를 계속 만족시켜주지는 못했다. 오히려 이때 쓴 일기를 보면 괴로움과 환멸, 때때로 두드러진 냉소주의가 나타나 있다. 나폴레옹 시대 뒤의 '유럽 체제'는 점점 약해지다가 끝내 무너졌고, 한때 유럽 대륙에 걸쳤던 그의 활동영역은 오스트리아 안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그의 활동은 완고하며 보수주의적이고 순수한 방어적인 성격을 지녔다.

'유럽의 자유'라는 개념은 18세기의 이상이었던 구질서에 따라 개편되었으며 겐츠는 19세기에 맞서 이를 지켰다(→ 왕정복고). 그리스와 세르비아가 투르크에 반기를 들고, 스페인 자유주의자들이 부르봉 왕가의 전제주의에, 라틴아메리카가 스페인에, 독일 학생들이 독일 경찰국가에, 이탈리아가 로마 교황, 오스트리아인, 이탈리아 출신 통치자들에 대항하여 싸우는 모든 상황이 문제가 될지라도 겐츠는 메테르니히의 간섭정책을 선전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항상 위태로운 세력의 편에 서게 되었다.

확실히 그는 나폴레옹과 싸울 때는 용기가 있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도 신경이 예민한 면이 있었지만 마음 깊숙이 신경이 날카롭고 소심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프랑스 혁명 같은 사건이 되풀이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생활방식은 물론이고 자신의 문화적 배경이 유럽의 구질서와 단단히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는 친구들에게 새로운 운동, 즉 자유주의·민주주의·민족주의가 끝내는 반드시 이기겠지만 이 운동들이 몰고올 충격을 완화·지체시키는 데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 또한 필요하다고 역설함으로써 자신의 태도를 정당화했으며, 역사의 진보를 지연시키는 것 자체가 역사에 대한 봉사라고 암시하기도 했다.

겐츠는 삶의 마지막 장을 공인(公人)이 아닌 개인으로서 보냈다. 66세 때, 빈의 기념관에 '시대의 미소'라는 불후의 이름을 남긴 젊은 발레리나 파니 엘슬러와 사귀었다. 이로써 그는 마지막 승리이자 처음인 완전한 행복을 얻었으며 그들 관계가 시든 때는 바로 그가 죽음을 맞은 때(1832. 6. 9)이기도 했다. 그가 죽은 뒤 재산은 채권자들의 손에 넘어가 경매에 붙여졌고 메테르니히가 장례비를 치렀다.

그 시대에 살았던 많은 사람들은 만년의 겐츠를 파렴치한 보수주의자이며 젊은시절의 신념을 배반한 사람이고 심지어는 왕들의 고용인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의 저술들과 놀라울 정도로 많은 편지들이 출판되자 그의 재능을 높이 산 사람들이 이런 평판을 누그러뜨렸다. 가장 개인적인 그의 기록을 보면 과장과 선동적인 거짓을 싫어하는 매우 정직한 성품이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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