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요약 사적 제132호. 몽고의 침입으로 고려가 강화도로 천도할 당시 축조되었다. 원래 내성·중성·외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234년에 규모있는 궁궐의 내성으로 축조되었다. 중성과 외성은 그 이후에 축조되었다. 고려시대의 강화 내성에는 고려 궁궐과 관청이 들어서 있었는데, 그 규모나 배치를 모두 송도와 비슷하게 하였다. 1259년 몽고의 요구로 내성이 헐리게 되었고, 외성도 허물었고 1270년)에는 궁궐도 헐렸다. 1627년 정묘호란에 인조 잠시 피난했으며, 1636년 병자호란 때 봉림대군 등이 피난했다. 이후 수차에 걸쳐 강화성을 개축하여 화강암의 석성으로 바꾸고 여장도 설치하여 4개의 성문과 4개의 암문, 남·북·서쪽의 장대와 2개의 수문 등의 시설을 갖추었다.
사적 제132호. 고려가 몽고의 침입으로 인해 강화도로 천도할 당시 궁궐과 함께 축조되었다. 원래 내성·중성(中城)·외성(外城)의 3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성이 규모있게 궁궐의 내성으로 축조된 것은 1234년(고종 28) 1월부터였고, 당시의 성은 토석혼축(土石混築)이었다.
그리고 이 내성을 방어하기 위한 중성이 축조된 것은 1250년(고종 37)으로, 둘레가 약 7㎞에 달하는 토성이었다. 또 중성을 둘러싸는 외성은 1233년부터 축조하기 시작하여 1235년에 전국 주(州)·현(縣)에서 일품군(一品軍)을 징발하여 대대적인 공사를 벌인 결과 동쪽 육지를 바라보는 선을 따라 3만 7,070척에 달하는 성이 1237년에 일차 완성되었다.
고려시대의 강화 내성에는 고려 궁궐과 관청이 들어서 있었는데, 그 규모나 배치를 모두 송도(松都 : 지금의 개성)의 것을 옮겨놓은 듯이 비슷하게 하여 왕족과 귀족들은 송도에서와 마찬가지로 화려한 생활을 영위했다. 궁궐의 정문은 정남향의 승평문(昇平門)이었다. 한편 중성에는 모두 8개의 성문이 있었는데, 송도의 것을 그대로 본떠 동에 선인문(宣仁門), 서에 선기문(宣祺門), 남에 태안문(泰安門), 북에 북창문(北昌門)을 두었고, 동남에 장패문(長覇門), 서남에 광덕문(光德門), 서북에 선의문(宣義門), 동북에 창희문(彰熙門)이 있었다.
그러나 고려와 몽고의 강화가 성립되어가던 1259년(고종 46) 몽고의 요구로 내성이 헐리게 되었고, 외성도 허물었다. 그리고 고려정부가 완전히 송도로 환도하는 1270년(원종 11)에는 궁궐도 헐리어 현재는 궁궐터마저 불완전하게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1627년(인조 5)에 정묘호란이 있자 인조가 잠시 피난했으며,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는 봉림대군을 비롯한 빈궁(嬪宮)들과 신하들이 피난했으나 청군에 의해 강화성이 함락되면서 포로가 되었다. 이렇게 외침이 잦자 조선정부는 이후 수차에 걸쳐 강화성을 개축하여 화강암의 석성으로 바꾸고 여장(女墻 : 성 위에 덧쌓은 낮은 담)도 설치했다. 이렇게 하여 강화성은 4개의 성문과 4개의 암문(暗門), 남·북·서쪽의 장대(將臺)와 2개의 수문(水門) 등의 시설을 갖추었다.
현재 북악과 남산을 연결하는 지역에 남아 있는 성벽의 일부와 성문은 거의가 조선시대에 축조되어 1970년대에 보수된 것이다. 동문은 망한루(望漢樓)인데 지금은 없어졌다. 그리고 서문은 첨화루(瞻華樓)로 1711년(숙종 37)에 건립되어 그동안 퇴락되었다가 1977년에 개축되었다.
남문은 안파루(晏波樓)로 1711년에 건립되었으나 1955년 홍수 때 무너진 것을 1975년에 복원한 것이다. 북문은 1783년에 건립하여 진송루(鎭松樓)라 했으나 무너져 없어진 것을 1977년에 복원했다. 조선시대에는 성내에 많은 관아가 들어서 있었으나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당시 많은 건물이 소실되어 현재는 고려 궁터에 동헌과 이방청(吏房廳) 등이 복원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서문 근방에 일본의 강압에 의해 강화도조약이 조인되었던 연무당(鍊武堂)터가 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