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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창

다른 표기 언어 江倉

요약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지방에서 거둔 국가의 세곡·진휼미·군량미 등을 서울로 운반하기 위해 임시로 모아두던 곳.

개요

조창이라고도 했는데, 연해안의 창고를 해창, 하천 연변에 만들어진 창고를 강창이라 했다.

강창의 설치

도로 사정이 좋지 못하고 수레가 발달하지 못했던 전근대사회에서는 육로보다는 하천과 연해안 항로를 통한 수운이 중요시되었다.

고려시대부터 충주에는 덕흥창을, 원주에는 흥원창을 설치하여 남한강 유역 일대의 세곡을 수납·운송하고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전국 토지에서 징수하는 세곡을 원활히 운송하기 위해 부역 동원에 기초한 관선조운제를 운영했다. 중앙정부는 이의 실시를 위해 조창의 정비와 복구에 힘썼고, 조선과 조군의 확보를 위해 노력했다. 이에 따라 연해안에 공진창 등 4개 조창, 수로 연변에 가흥창 등 5개 조창을 설치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주로 한강과 예성강에 강창을 설치하고 있다. 덕흥창의 옛터에 경원창을 설치하고, 이어 세조 때 가흥창으로 확장하여 경상도 지방, 충청북도 일대의 세곡을 수납하여, 한강의 수로를 이용하여 경창으로 운송했고, 흥원창을 복구하여 강원도 남부지방의 세곡을 거두도록 했다. 한편, 춘천에는 새로 소양강창을 설치하여 춘천 등지의 세곡을 거두어들였다. 예성강에는 강음에 조읍포창, 배천에 금곡포창(金谷浦倉)을 설치하여 황해도 지방의 세곡을 수납·운송했다. 한편 1714년(숙종 40) 공주에 분포창, 은진에 시진창을 설치함으로써 각기 금강 이북과 이남 지역의 세곡 운송에 편의를 제공했다.

강창제의 변천

16세기까지 세곡운송의 중심을 이루고 있던 관선조운제는 조역의 포납화 현상과 조군의 대립·피역 현상의 심화, 관장제의 붕괴, 선재난 등으로 조군·조선의 확보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와 달리 한강 연변에서 어채·진도·선상 등에 종사하던 뱃사람들은 당시 널리 보급되고 있던 외방농장의 소작료 운반을 통해 운송 역량을 높였고, 항로개발·운항기술·조선기술을 점차 향상시켜 선운업의 기반을 조성하면서 관선조운제를 와해시켜갔다. 관선조운제가 붕괴되면서 조선 후기 운송계에는 자율적이고 영리적인 민간선운업의 성장이 뚜렷했다. 이같은 움직임은 자본주의적 관계의 발달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한 운송체계가 부역제에서 계약제로 전환(예를 들어 작대법의 실시)되면서 합리성을 띠게 되었다.

운송체계의 발달이 상업자본 형성의 기초적 여건을 제공한다고 했을 때, 선운업의 발달은 조선 후기 상업자본 형성에 있어서 하나의 토대로 작용했다. 이와 같이 조선 후기 운송체계는 16세기까지 운용되어오던 관선조운제가 17세기를 거치면서 붕괴하고, 경강상인을 중심으로 하는 사선임운제로 전환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관선조운제와 결부되어 운용되던 강창도 그 기능이 크게 약화되었다가 17세기 이후에는 철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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