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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8. 10, 경북 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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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50. 9. 8 |
국적 | 북한 |
요약 1933년 영안유격대에 입대하여 항일무장투쟁에 가담했다. 이 유격대는 닝안 일대에 유격구를 확보하고 반일회·청년단·아동단·자위대 등을 조직했으며, 1934년 길동유격대로, 1935년 동북반일연합군 제5군으로 발전했다. 10세 때 중국 동북지방 닝안 현으로 이주했으며, 1933년 영안유격대에 입대했다. 1935년 동북항일연군에서 제3사 제9단의 정치위원을 맡았다. 해방 직후 옌볜에서 짧게 활동하다 1946년 북한으로 귀국했다. 1948년 2월 8일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에 취임했다. 1947년 민족보위국장, 이듬해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등을 맡았다. 6·25전쟁에서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으로 북한군을 지휘하다가 9월 8일 전사했다. 다음날 강건은 공화국 영웅칭호를 받았다.
10세 때 중국 동북지방 닝안 현[寧安縣]으로 이주했으며, 1933년 '영안유격대'에 입대하여 항일무장투쟁에 가담했다. 영안유격대는 닝안일대에 유격구를 확보하고 반일회·청년단·아동단·자위대 등을 조직했다. 1934년 가을에는 '길동유격대'로, 1935년 1월 '동북반일연합군 제5군'으로 발전했다. 그후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제기된 '광범한 반제통일전선' 노선에 입각하여 중국 공산당이 8·1선언을 하게 되자, 만주일대에서 활동하던 항일유격대들은 '동북항일연군'이라는 단일편제를 구성했다. 강건은 동북항일연군에서 제3사 제9단의 정치위원을 맡았다. 1942년 7월 '동북항일연군교도려'로 재편되었으며 그는 제2교도영(矯導營) 정치위원으로 활동했다.
해방직후 그는 조선으로 귀국한 김일성(金日成), 최용건(崔庸健), 김책(金策) 등의 지도자급과는 달리 당시 조선인이 절대 다수였던 옌볜[延邊] 지방 해방사업을 명목으로 김창봉(金昌奉), 임철수 등을 이끌고 옌볜으로 나왔다. 옌볜에서의 짧은 활동을 끝내고 1946년 여름 북한으로 귀국한 것으로 알려졌다. 귀국 후 항일무장투쟁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북한군을 창설하는 과정에 깊숙이 관여했으며 1948년 2월 8일 공식적으로 창설된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에 취임했다. 1947년 4월 민족보위국장, 이듬해 3월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같은 해 8월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등을 맡았다. 6·25전쟁에서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으로 북한군을 지휘하다가 9월 8일 전사했다.
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1950년 9월 9일 강건에게 공화국 영웅칭호를 수여했다. 북한은 조선노동당 창건 20주년인 1968년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사리원 시에 동상을 세우고 강건거리를 조성했으며, 그의 이름을 딴 강건군관학교를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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