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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48. 1. 4, 일본 나가토 구니[長門國] 하기[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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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13. 10. 10, 도쿄 |
국적 | 일본 |
요약 3번에 걸쳐 총리를 지낸 일본의 정치가·육군대장·공작.
1868년 봉건적인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를 무너뜨리고 왕정을 복고한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에서 조슈 한[長州藩]의 일원으로 덴노파를 도왔다. 당시에는 프랑스식 육군 제도를 채택하고 있던 관계로 프랑스 유학을 계획했으나 프랑스- 프로이센 전쟁 때문에 예정을 변경해 독일로 유학을 가 군사학을 연구했다(1870~73). 귀국 후 육군을 독일식으로 개편할 것을 주장하여 군사 행정 위주의 군정과 작전 지휘 위주의 군령을 분리하도록 건의했다. 이것이 채택됨으로써 1878년말 군정은 육군성이, 군령은 참모본부가 분담하는 체제가 마련되었다. 이로써 참모본부는 행정부에 속한 육군성의 관할에서 벗어나 덴노 직속의 기관으로 바뀌게 되어 정부의 간섭을 배제할 수 있게 되었다.
1886년에는 육군차관에 임명되었으며 청일전쟁(1894~95)에 참전하였다. 군부 지도자로 총리를 역임했고 덴노의 특별고문이기도 했던 조슈 한 출신의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와 참모본부에서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야마가타의 후광을 입은 그는 1898년에 육군상, 1901년에는 총리가 되었고 그후 2번 더 연임하였다.
제1차 내각시기(1901~06)에 가쓰라가 직면한 외교적 과제는 의화단운동-1900 이래 만주·조선에서 영향력이 커진 러시아와 대결하는 것이었다. 그는 외상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와 협력하여 영일동맹을 체결하고(1902) 러시아에 맞섰으며, 이같은 대치상태는 결국 러일전쟁(1904~05)으로까지 치달았다. 영·미의 지원으로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영일동맹 개정을 통해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조선에서의 권익을 승인받는 한편 조선에 통감부를 설치하였다.
가쓰라 내각은 러일전쟁으로 인한 경제난을 책임지고 1905년 12월에 총사퇴했으며 그 뒤를 이어 정우회 총재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가 이끄는 내각이 등장했다. 이후 정당정치가 확립될 때까지는 가쓰라로 대표되는 관료세력도, 사이온지로 대표되는 정당세력도 독자적으로 정권을 담당하지 못하고 상호 타협·제휴를 반복했는데, 이 시기를 이른바 게이엔 시대[桂園時代]라고 한다.
제2차 내각(1908. 7~1911. 8) 시기에는 대장상을 겸임하면서 경제 위기를 긴축재정으로 막는 한편 조선 합병을 실현시켰다(1910). 또 자본주의 발전에 따라 격화된 사회주의 운동과 노동 운동을 철저히 탄압했는데, 1910년 대역사건을 계기로 전국적인 검거를 단행한 바 있다. 1911년 여름 유럽여행중 메이지 덴노가 병상에 누웠다는 전갈을 받고 서둘러 귀국하였으며, 그가 죽고 1912년 다이쇼[大正] 덴노가 즉위한 뒤에도 계속 관직에 머물러 내대신(옥새나 국새를 보관하는 일을 맡는 대신) 겸 시종장에 임명되었고 공작 작위를 받았다.
원래는 정당정치를 반대하였으나 제3차 내각(1912. 12~1913. 1) 때는 정당을 결성하여 정우회의 의회에 대한 영향력을 저지해보려 하였다. 입헌동지회가 그것인데, 설립 초기에는 미약했으나 나중에는 제2차 세계대전 전 일본의 양대 정당 중 하나가 된다. 그러나 제3차 내각은 그의 과두정치와 군비증강 계획을 반대하는 격렬한 데모로 인해 7주 만에 끝났으며 가쓰라는 그로부터 몇 달 뒤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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