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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3년 11월 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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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67년 7월 8일 |
본명 | 비비안 메리 하틀리(Vivian Mary Hartley) |
수상 | 1940년 아카데미 최우수여우주연상(<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1952년 아카데미 최우수여우주연상(<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
데뷔 | <마을의 지주>(The Village Squire, 영국, 1935) |
요약 탁월한 미모의 소유자인 비비안 리는 편견을 깨고 출중한 연기력을 보여주면서 할리우드의 톱스타가 됐다. 그녀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와 <애수>(Waterloo Bridge)로 전 세계 영화팬들을 사로잡았다. 또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A Streetcar Named Desire)에서 블랑쉬 역으로 극찬을 받았다.
생애와 이력
영국의 여배우. 비비안 리(Vivien Leigh)는 1913년 11월 5일 영국령 인도의 벵갈 다질링에서 비비안 메리 하틀리(Vivian Mary Hartley)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에른스트 하틀리(Ernest Hartley)는 인도 주둔 기갑부대 장교였고, 어머니 거트루드 로빈슨(Gertrude Robinson)은 아마추어 배우였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연극에 출연했던 리는 1920년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윌딩햄스쿨(Woldingham School)에서 공부했다. 여기서 선배 모린 오 설리번(Maureen O'Sullivan)을 만나 배우를 꿈꾸게 된다. 처음에 반대했던 아버지는 리가 적극성을 보이자 그녀를 왕립극예술아카데미(Royal Academy of Dramatic Art)에 입학시켰다.
리(Leigh)라는 예명은 1931년 변호사 허버트 리 홀만(Herbert Leigh Holman)과 결혼한데서 유래하였는데, ‘비비안 홀만’이라는 이름이 여배우에게 어울리지 않아 ‘비비안 리’라는 이름을 썼다고 한다. 리는 배우 입문 당시 유명 제작자인 알렉산더 코다(Alexander Korda)로부터 잠재력이 부족하다며 딱지를 맞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1935년 <미덕의 가면>(The Mask of Virtue)이라는 연극에 출연하여 호평을 받으면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데일리 익스프레스』(The Daily Express) 지(紙)는 당시의 리에 대해 “얼굴에서 광채(光彩)가 난다”고 썼고, 시인 존 베츠먼(John Betjeman)은 그녀를 ‘영국 여성의 정수(精髓)’로 묘사했다.
명배우이자 감독인 로렌스 올리비에(Laurence Olivier)는 <미덕의 가면>을 보고 매료되어 비비안 리와 친분을 맺었다. 당시 두 사람은 모두 기혼자였으나 영화 <무적함대>(Fire Over England, 1937)에 연인으로 출연하면서 실제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1938년 리가 로버트 테일러(Robert Taylor)와 함께 출연했던 <옥스퍼드의 양키>(Yank at Oxford)는 미국에서 주목을 받은 첫 작품이었다. 후속작은 대배우 찰스 로튼(Charles Laughton)과 공연한 <성 마틴의 길>(St. Martin's Lane, 1938)이었다.
1940년 로렌스 올리비에의 아내 질 에스먼드와 비비안 리의 남편인 홀만이 각각 이혼에 동의하면서 올리비에와 리는 캘리포니아 산타바브라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때부터 리는 올리비에와 함께 20여 년 동안 연극무대를 누볐다. 올리비에와 리는 1955년 셰익스피어의 연극인 <12야>(Twelfth Night), <맥베스>(Macbeth), 그리고 <타이투스 앤드로니커스>(Titus Andronicus)를 함께 공연했다. 공연은 성공적이었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결국 1960년에 리와 올리비에는 이혼을 했다. 마지막 출연작은 <바보들의 배>(Ship of Fools, 1965)로 그 영화에서 리는 작은 역할을 맡았다. 1967년 7월 8일 리는 폐결핵이 원인이 되어 쉰 넷의 나이로 사망했다.
작품세계
1930년대 후반 비비안 리는 마가렛 미첼(Margaret Mitchell)의 유명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를 읽었다. 소설 속 여주인공 스칼렛 오하라에 매료된 그녀는 에이전트를 통해서 이 작품을 영화화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할리우드 거물 제작자 데이비드 셀즈닉(David O. Selznick)에게 자신이 스칼렛 역에 적역(適役)임을 알렸다. 셀즈닉은 리가 “탁월한 여배우지만, 너무 영국적이라 스칼렛 역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리는 올리비에와 함께 LA로 날아가 셀즈닉을 설득했고, 오디션에서 리의 “믿을 수없는 야생성”에 탄복한 감독 조지 쿠커(George Cukor)에 의해 스칼렛 역으로 낙점되었다. 하지만 조지 쿠커는 곧 해고되었다. 대타는 빅터 플레밍(Victor Fleming)이 맡게 됐다. 새 감독 빅터 플레밍과 리는 세트장에서 사소한 일로 다투는 일이 많았는데, 두 사람의 기싸움의 결과는 플레밍의 분노와 리의 눈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개봉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당시까지 최고 흥행작이 되었고, 1940년에 아카데미상도 무려 10개나 받았다. 리는 스칼렛 역으로 최우수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뉴욕영화비평가협회(New York Film Critics Circle)가 수여하는 여우주연상도 받았다. 1939년 『뉴욕타임즈』(New York Times)는 “비비안 리가 다른 여배우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자연스럽게 스칼렛 역을 완벽하게 소화해냈다”라고 평가했다. 리의 명성은 치솟았고, 그녀는 유력 시사지 『타임』(Time)의 표지를 장식했다. 후일 영화평론가 앤드루 새리스(Andrew Sarris)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비비안 리의 캐스팅 덕분이었다”라고 회고했다.
이후 리는 올리비에와 함께 <레베카>(Rebecca)에 출연하기 위해서 스크린테스트까지 받았지만 셀즈닉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940년에는 <애수>(Waterloo Bridge)에서 올리비에와 공연하기로 했지만 이번에는 셀즈닉이 올리비에를 로버트 테일러로 교체했다. 전쟁을 배경으로 무용수 마이라와 로이 대위의 가슴 아픈 러브스토리를 그린 <애수>는 큰 인기를 얻었다. 잇따른 성공으로 비비안 리는 언론의 초미의 관심사가 됐다. 리와 올리비에는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을 올렸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1941년 리와 올리비에는 <해밀턴 부인>(That Hamilton Woman, 1941)에 엠마 해밀턴과 넬슨 제독으로 동반 출연했다. 아직 참전(參戰)을 하지 않고 있던 미국의 관객들에게 영국에 대한 지지와 지원을 호소하려는 목적으로 제작된 이 영화는 국제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46년 리는 손튼 와일더(Thornton Wilder)의 연극 <벼랑 끝 삶>(The Skin of Our Teeth)에 출연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영화 <시저와 클레오파트라>(Caesar and Cleopatra, 1945)와 러시아의 문호(文豪) 톨스토이 원작의 <안나 카레니나>(Anna Karenina, 1948)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1949년 리는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A Streetcar Named Desire)에 출연하면서 326회라는 장기 공연을 했다. 이 작품은 1951년에 영화화되었고 리의 상대역으로 당시 신예(新銳)였던 말론 브랜도(Marlon Brando)가 출연했다. 연출을 맡은 엘리아 카잔(Elia Kazan)은 처음에 리를 과소평가했지만 촬영이 진행되면서 “자신이 만난 여배우들 중 단연 최고”라고 극찬했다. 여주인공 블랑쉬(Blanche DuBois) 역으로 리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이어 두 번째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영국아카데미상(BAFTA)과 뉴욕영화비평가협회의 여우주연상도 받았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비비안 리의 진가를 드러낸 영화였다. 그녀는 “한동안 블랑쉬의 화신(化身)으로 광기에 빠져 살았다”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저명한 평론가 폴린 카엘(Pauline Kael)은 “비비안 리와 말론 브랜도 두 사람은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었으며, 특히 리는 참으로 연민과 공포를 자아낼 만큼의 보기 드문 연기력을 펼쳤다”라고 극찬했다. 원작자 테네시 윌리엄스도 “리는 자기가 의도했던 것을 모두 역할에 쏟아 부었으며, 자기가 전혀 꿈꾸지 못했던 것까지 그 역에 실었다”라고 논평했다.
영화사적 평가
비비안 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배우 중 한명이었다. 그녀의 출연작들을 연출한 감독들은 한 결 같이 그 점을 강조했다. 하지만 그녀의 출중한 미모(美貌)는 종종 연기력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가로막았다. 평론가들은 미모에 현혹되어 여배우로서 리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지만,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가려진 리의 가치를 드러내었다. 리는 한 인터뷰에서 “나는 스타가 아니다, 나는 여배우이다(I'm not a film star, I am an actress.)”라고 말할 만큼 인기보다는 연기에 집중했다. 영화평론가 김시무는 "비비안 리가 자신의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일생일대의 연기를 보여주었다"고 평가한다.
1985년 ‘영국영화의 해(British Film Year)’를 맞이하여 발행된, 위대한 영화인들을 기리는 우표 시리즈에 비비안 리는 앨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 찰리 채플린(Charlie Chaplin), 그리고 데이비드 니븐(David Niven)과 함께 포함되었다. 1999년 미국영화연구소(American Film Institute)에서 실시한 ‘영화 100년 100명의 스타’에도 선정되었다.
작품목록
<마을의 지주>(The Village Squire, 영국, 1935) Reginald Denham 연출
<얼굴을 들고 웃자!>(Look Up and Laugh, 영국, 1935) Basil Dean 연출
<잘되고 있습니다!>(Things Are Looking Up, 영국, 1935) Albert de Courville 연출
<신사협정>(Gentlemen’s Agreement, 영국, 1935) George Pearson 연출
<무적함대>(Fire Over England, 영국, 1937) William K. Howard 연출
<어두운 여로>(Dark Journey, 영국, 1937) Victor Saville 연출
<찻잔 속의 폭풍>(Storm in a Teacup, 영국, 1937) Ian Dalrymple, Victor Saville 공동연출
<옥스퍼드의 양키>(A Yank at Oxford, 영국, 1938) Jack Conway 연출
<성 마틴의 길>(St. Martin's Lane, 또는 Sidewalks of London, 영국, 1938) Tim Whelan 연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 미국, 1939) Victor Fleming, George Cukor 공동연출
<21일>(21 Days, 영국, 1940) Basil Dean 연출
<애수>(Waterloo Bridge, 미국, 1940) Mervyn LeRoy 연출
<해밀턴 부인>(That Hamilton Woman, 영국, 1941) Alexander Korda 연출
<시저와 클레오파트라>(Caesar and Cleopatra, 영국, 1945) Gabriel Pascal 연출
<안나 카레니나>(Anna Karenina, 영국, 1948) Julien Duvivier 연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A Streetcar Named Desire, 미국, 1951) Elia Kazan 연출
<딥 블루 씨>(The Deep Blue Sea, 영국, 1955) Anatole Litvak 연출
<이주의 연극: 벼랑 끝 삶>(ITV Play of the Week: The Skin of Our Teeth, 영국, 1959, TV 시리즈) Henry Kaplan 연출
<스톤 부인의 로마의 봄>(The Roman Spring of Mrs. Stone 미국, 1961) José Quintero 연출
<바보들의 배>(Ship of Fools, 미국, 1965) Stanley Kramer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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