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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꽃과 노동

리베라 ‘꽃 운반 노동자’와 마르크스 ‘자본론’

꽃과 노동자가 자연스럽게 연결이 될까?

‘꽃’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일단 시각적으로는 풀과 나무가 함께 연상될 것이다. 좀 더 넓게는 산이나 들, 강과 같은 자연의 풍광이 떠오를 것이다. 혹은 봄이나 여름이 연상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느낌이나 감상의 측면에서는 아름다움, 한가로움, 즐거움, 관조 등의 단어가 생각날 수도 있다. 적어도 꽃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는 사람이 극히 드물 것이라는 예상은 할 수 있다.

꽃과 사람은 어떻게 연결이 될까? 아마 꽃은 몇 가지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여성이 연결될 것이다. 서양화에서든 동양화에서든 여성이 꽃과 함께 등장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남성이 떠오르는 경우는 물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운 얼굴에 반해서 샘물에 빠져 죽은 뒤 그 자리에 수선화로 피었다는 나르키소스 정도이다. 설사 남성이 떠오른다 하더라도 신화 속의 아름다운 신, 인간의 경우는 귀족 신분의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 사랑에 빠진 남자가 여성에게 구애를 하는 장면 정도이다.

그러면 꽃과 노동, 혹은 꽃과 노동자는 자연스럽게 연결이 될까? 꽃과 노동자는 무언가 부자연스럽고 같이 비교되는 것 자체가 거북해 보인다. 남성이라 하더라도 하얗고 가느다란 손에나 어울리고 아무래도 노동으로 다져진 노동자의 투박한 손과 꽃은 쉽게 연결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둘을 연결하여 많은 작품을 쏟아 낸 화가가 있다. 주요 활동 무대였던 멕시코만이 아니라 중남미, 나아가 세계적인 민중 화가가 된 디에고 리베라이다. 그 가운데 유난히 눈을 잡아 끄는 그림이 〈꽃 운반 노동자〉이다.

꽃 운반 노동자

디에고 리베라, 1947년

ⓒ 서해문집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림을 보면 거의 사람 키만 한 거대한 꽃바구니 안에 화사한 분홍색 꽃이 가득하다. 무슨 꽃인지는 모르겠지만 제 계절에 피어난 듯 풍성하면서도 곱다. 짚을 엮어 만든 것으로 보이는 바구니도 꽃과 잘 어울린다. 만약 사람이 등에 짊어지는 장면이 아니라 꽃과 바구니만 있었다면 싱그러움을 느끼는 장식적 효과를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그림에서는 그런 것을 느낄 겨를이 없다. 거대한 꽃바구니를 폭이 넓은 끈으로 둘러 상체에 지고 있는 남성이 보인다. 제목으로 봐서 이 사람이 꽃을 운반하는 노동자일 것이다. 꽃을 나르는 일에 지쳤는지, 아니면 보기와는 다르게 무거운지 버거운 듯한 동작을 취하고 있다. 두 팔과 다리에 의지한 채 힘을 모아 막 일어나려고 하는 중이다. 같이 일하는 여성이 일어나는 걸 돕기 위해 뒤에서 바구니를 받쳐 주고 있다. 남성은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있어서 표정이 직접 보이지는 않지만 노동에 찌든 모습 그대로일 것 같다. 지금 그에게 꽃은 아름답고 귀한 무엇이 아니라 단지 버거운 ‘짐’일 뿐이다.

디에고의 그림에는 꽃과 관련해 노동을 하는 여성들도 자주 등장한다. 앞의 그림과 비슷한 느낌을 전달하는 것으로는 〈꽃 노점상〉이 있다. 마찬가지로 거대한 꽃바구니를 힘겹게 들어 올리는 여성이 등장한다. 바구니 밑으로 투박한 발의 모습이 보인다. 꽃 위쪽에서 살짝 드러나는 대머리는 도와주는 남성의 것이다. 여인의 머리 위로 백합 비슷한 모양의 거대한 꽃송이들이 만개해 있다. 어깨에 둘러맨 끈이 여성을 졸라매는 듯이 팽팽하다. 있는 힘을 다해서 들어 올리려 애쓰는 흔적이 역력하다. 그래서인지 꽃이 그다지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여인을 괴롭히는 괴물처럼 느껴지기조차 한다. 여자는 이 꽃을 지고 어느 길가에 앉아 꽃을 사줄 손님을 하염없이 기다릴 것이다.

꽃 노점상

디에고 리베라, 1935년

ⓒ 서해문집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노동자에 대한 디에고의 사랑

디에고는 멕시코의 상징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스페인과 유럽에 피카소가 있다면 멕시코와 중남미에는 디에고가 있다고 할 정도로 멕시코인들의 애정을 듬뿍 받고 있다. 그는 수많은 벽화를 통해 독재자와 지배층을 고발했는데, 그 저변에는 저항 정신이 깔려 있다. 그림에 등장하는 이른바 ‘가진 사람들’은 탐욕스러운 표정이 뚝뚝 묻어나게 묘사되어 있다. 당연히 멕시코에서 부와 권력을 쥐고 있거나 이에 가까이 가려고 하는 사람들은 디에고에 대해 경멸적인 태도를 숨기지 않는다. 또한 그는 식민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줄곧 유지했다.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의 전통적인 문명과 삶에 대한 애정을 강하게 표현했다. 대표작 중 하나인 멕시코 독립궁의 거대한 벽화에는 마야 문명의 전성기, 아스텍 문명의 멸망과 스페인 세력인 코르테스의 침공, 가톨릭의 상륙, 판초빌라와 자파타의 농민혁명, 미국의 멕시코 침공, 멕시코의 독립 과정 등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특히 작품에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은 박해받는 노동자, 농민의 삶이었다. 앞의 꽃 노동자나 노점상 그림들은 그중에 잘 알려진 것들이고 비슷한 주제의 수많은 작품들이 있다. 힘겨운 노동과 고된 삶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하지만 어려운 생활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 속에서 멕시코 민중은 순박한 표정으로 등장한다. 디에고는 순박한 원주민과 노동자의 표정을 통해 그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다.

하지만 민중에 대한 그의 애정과 순박한 얼굴에도 불구하고 그림 속의 노동이 전혀 아름답게 다가오지 않는다. 노동과 연관되어 있는 화려한 꽃은 우리 마음을 더 고통스럽게 한다. 차라리 철근이나 벽돌을 나르거나 용접을 하고 있는 모습이면 덜 참혹해 보였을 것 같다. 노동의 대상이, 노동자의 어깨를 짓누르는 ‘짐’이 꽃이기에 더 잔인하게 다가온다. 꽃이 아름답듯이 노동도 아름다울 수는 정말 없을까?

마르크스의 《자본론》

마르크스는 《자본론》의 시초 축적에 대한 내용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이 어떻게 강제적인 성격을 갖고 출발했는가를 상세하게 분석하고 있다. 시초 축적이란 자본주의 사회 태동기에 대규모의 자본이 처음에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상품 생산자들의 수중에 상당한 양의 자본과 노동력이 존재하고 있는 것을 전제로 한다. 우리는 자본주의적 축적에 선행하는 ‘시초’ 축적, 즉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결과가 아니라 그 출발점인 축적을 상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시초 축적은 자본 관계를 창조하는 과정은 노동자를 자기 노동조건의 소유로부터 분리하는 과정, 즉 한편으로는 사회적 생활수단과 생산수단을 자본으로 전환시키며, 다른 한편으로는 직접적 생산자를 임금노동자로 전환시키는 과정 이외의 어떤 다른 것일 수가 없다. 따라서 이른바 시초 축적은 생산자와 생산수단 사이의 역사적 분리 과정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 역사적으로 보아 시초 축적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 - 이미 스스로 형성되어 가고 있던 자본가계급에게 지렛대로서 이바지한 모든 변혁들이 해당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획기적인 사건 - 은 많은 인간이 갑자기 폭력적으로 그 생존 수단으로부터 분리되어 보호받을 길 없는 ‘프롤레타리아’로서 노동시장에 내던져진 그 사건이다. 농촌의 생산자, 곧 농민으로부터의 토지 수탈은 이 모든 과정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인 자본이 처음에 축적되는 과정은 생산자를 생산수단과 분리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우리가 흔히 인클로저 운동(enclosure movement)이라 부르는 것이 바로 이에 해당한다. 농민을 대상으로 일종의 토지 수탈이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우리의 지금 상식으로는 원래 농노들에게는 토지에 대한 어떤 종류의 소유권도 없었을 것 같지만 역사적 사실은 전혀 다르다. 자본주의 이전의 토지 소유권은 이중적이다. 농노들에게도 토지에 대한 점유권, 일종의 사용권이 있어서 지주 마음대로 경작을 금지시킬 수 없었다. 또한 공유지에 대해서는 공동의 소유권이 있었다. 하지만 자본주의적인 사적 소유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교회 재산의 약탈, 국유지의 사기적 양도, 공유지의 횡령, 봉건적 및 공동체적 소유의 약탈’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그 과정도 지극히 무자비하고 폭력적이었다. 생산자와 생산수단의 분리는 바로 이를 두고 말한다. 원래 농민들은 토지에 대한 일정한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강제로 박탈당하면서 어떠한 생산수단도 소유하지 못한 존재로 전락해 버렸다. 이를 통해 자신의 노동력 말고는 판매할 것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노동자가 탄생한 것이다. 또한 거지와 부랑자가 대량으로 발생했는데, 이는 당연한 것이었다. 토지에서 쫓겨난 농노들이 갑자기 어디에서 어떻게 살길을 마련했겠는가. 대대로 삶을 이어 가는 터전이었던 농촌에서 쫓겨난 이들로서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도시로 흘러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도시에서 부랑자가 되어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하며 사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자 영국에서는 ‘부랑자법’으로 알려진, 부랑에 대한 피의 입법이 실시되었다. 공장에서 일을 하지 않고 부랑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폭행과 감금을 제도화하는 법이 만들어졌다. 공장주가 아무리 터무니없는 임금이나 노동조건을 제시하더라도 무조건 인정하고 일을 하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도둑질이나 강도질과 같은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단지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처벌을 당하니 어쩔 수 없었다. 처음에는 폭력적으로 토지를 수탈당하고 추방되어 부랑자로 된 농촌 주민들은 그다음에는 무시무시한 법령들에 의하여 채찍과 낙인과 고문을 받으면서 임금노동 제도에 필요한 규율을 얻게 된 것이다. 결국 자본주의 발생과 더불어 탄생한 노동자에게 있어서 노동의 성격은 본질적으로 강제였던 것이다.

물론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법적으로 강제노동은 사라졌다. 적어도 일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처벌을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대량 실업이 만성화된 현대사회에서 임금과 노동조건의 칼자루는 일방적으로 기업이 쥐고 있다. 최저임금제라는 제도가 있기는 하지만 그 정도의 액수로는 가족이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없다. 아무리 부당한 조건이라도 채용만으로 감지덕지하며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대규모 정리해고나 비정규직화가 제한 없이 보장된 조건에서 노동력 제공만이 아니라 인격적인 모욕도 감내해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로 나타난다.

진정으로 자발적이고 창조적인 노동은 불가능한가? 노동이 즐거움이자 자기 성취일 수는 없는 것일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탐욕만이 아니라 인간의 얼굴을 찾는 것은 공상에 불과할까? 나중의 문제는 나중으로 돌린다 하더라도 일단 지금 조금이라도 노동이 아름다울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면 좋겠다. 꽃이 아름다운 것처럼 꽃을 나르는 노동도 아름다워 보일 수 있는 그날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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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1886~1957년)
멕시코의 화가로 유럽 회화의 전통과 기법을 멕시코의 전통에 결합시키려 노력했다. 파리에서 활동을 할 때 피카소, 브라크 등 입체파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의 벽화에 감명을 받아 이후 멕시코에서 활발한 벽화 운동을 벌였다. 주요 작품으로 〈아라메다 공원의 일요일의 꿈〉 〈헬렌 윌스 무디의 초상〉 〈농민 지도자 자파타〉 등이 있다.

박홍순 집필자 소개

인문학이 생생한 현실에서 벗어나는 순간 화석으로 굳어진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인문학적 사유를 일상의 사건과 삶에 밀착시키는 방향으로 글을 써왔다. 동서양 미술작품을 매개로 철학적·사회적 영역으로 ..펼쳐보기

출처

미술관 옆 인문학
미술관 옆 인문학 | 저자박홍순 | cp명서해문집 도서 소개

미술작품을 통한 인문학적 성찰을 시도했다. 다양한 시대와 작가의 미술작품을 함께 감상하면서 그 작품 혹은 작가에게서 발견되는 문제의식을 우리의 시대, 우리의 생활과 연..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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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꽃과 노동미술관 옆 인문학, 박홍순,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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