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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당신의 장유형은 무엇입니까?
사무실 출입관리에 생체인식시스템을 도입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 사원증을 대면 문이 열리던 때는 사원증을 두고 나오면 다른 직원이 드나들 때까지 기다리곤 했다. 이제는 엄지손가락을 대거나(지문) 눈을 갖다 대면(홍채) 문이 열리니 그럴 일이 없다. 신기하면서도 과학기술 발전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미래에는 또 다른 생체인식 방법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이에 대해 ‘장문(腸紋, gut print)’이라는 신조어가 나오기도 했는데, 바로 장내미생물의 게놈을 분석하면 그 사람의 거주지가 어디인지, 즉 누구인지 알 수 있다는 말이다. 개인마다 장내미생물은 고유한 조성이 있어 시간이 흘러도 잘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학술지 ‘미국립과학원회보(PNAS)’ 2015년 5월 11일자에 실린 논문에 따르면 어떤 사람의 분변에서 분석한 장내미생물 게놈 데이터와, 한참 시간이 지난 뒤 채취한 분변의 장내미생물 데이터와 비교해 동일인임을 맞출 가능성이 86%라고 한다. 앞으로 데이터 처리 기술이 더 발전하면 ‘장문’이 지문(fingerprint) 만큼이나 개인의 고유한 특성이 되지 않을까.
3개의 장유형
장문까지는 아니더라도 혈액형처럼 개인에 따라 장내미생물 조성이 달라진다는 사실은 2011년 처음 밝혀졌다. 장속에 수백 종의 미생물로 이뤄진 생태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수십 년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우리 몸이 미처 소화하지 못한 영양분을 먹고살면서 가끔 인체를 위해 유익한 물질을 만들어주는 존재 정도로 여겼다. 그런데 장내미생물이 마구잡이로 뒤섞여 있는 게 아니라 어떤 패턴을 보이며 장속에 어울려 산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독일을 비롯한 다국적 연구팀은 2011년 과학학술지 ‘네이처’에 이와 같은 발견을 보고하면서 장유형(enterotype)이라는 용어까지 만들었다. 이들의 분류에 따르면 장유형은 3가지로 각각 장유형1, 장유형2, 장유형3으로 불린다. 다만 장유형은 ABO혈액형과는 관련이 없다. 장유형은 3가지인데 ABO혈액형은 4가지라는 사실만 봐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분변을 검사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나 나잇대, 성별과도 별 관계가 없었다.
연구자들은 먼저 덴마크, 프랑스 등 유럽인 22명, 일본인 9명, 미국인 2명의 분변에 들어있는 장내미생물의 게놈을 통째로 분석했다. 이 정보를 기존 데이터베이스와 비교해 어떤 종류의 미생물이 얼마나 있는지 조사했다. 최신 게놈서열분석기와 생명정보기술이 개발됐기에 가능한 방법으로 불과 수년 전만 해도 엄두를 낼 수 없었던 일이다.
장내미생물의 게놈 파편만으로 정확히 어떤 종인가 까지는 알기 어렵기 때문에 연구자들은 분류학상 속(genus)의 수준에서 장내미생물의 분포를 조사했다. 그 결과 33명의 장내미생물 분포가 크게 3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는 예상치 못한 발견을 하게 된다. 즉 33명 가운데 8명은 장내미생물 가운데 박테로이데스(Bacteroides)속 미생물이 가장 많았다. 장유형1로 분류된 이 집단을 좀 더 자세히 분석한 결과 흥미롭게도 박테로이데스속과 친한 미생물(상대적으로 많음)과 서먹서먹한 미생물(상대적으로 적음)이 있었다. 예를 들어 장유형1에서는 유산균인 락토바실러스(Lactobacillus)속의 미생물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장유형2로 분류된 6명은 프레보텔라(Prevotella)속 미생물이 가장 많았고 상대적으로 대장균류는 적었다. 나머지 19명은 장유형3으로 분류됐는데 루미노코쿠스(Ruminococcus)속 미생물이 가장 많았다. 이 종류는 뮤신이라는 점막 성분을 잘 분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장유형3에서 루미노코쿠스속의 점유도는 장유형1의 박테로이데스속이나 장유형2의 프레보텔라속에 비해 꽤 낮았고 상대적으로 박테로이데스속도 많았다. 따라서 장유형3은 장유형1에 가깝다.
실망스럽게도 장유형과 국적, 성별, 나이, 비만도 같은 특성 사이에는 별다른 상관관계를 찾지 못했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장유형에 따라 음식이나 약물을 섭취할 때 다르게 반응할 것으로 추정한다”며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식단을 보면 장유형 추측할 수 있어
‘네이처’에 장유형 논문이 나간 지 5개월 뒤인 2011년 10월 과학저널 ‘사이언스’에는 장유형과 평소 섭취하는 음식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논문이 실렸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를 비롯한 공동연구자들이 98명의 식습관과 장내미생물 분포를 조사한 결과 장유형1인 사람들은 고지방, 저식이섬유 식단을 보였다. 육식을 즐긴다는 말이다. 장유형1의 경우 유산간균(락토바실러스)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은데 이는 고지방, 저식이섬유 식단에 따른 결과로도 잘 설명된다.
반면 장유형2인 사람들은 저지방, 고식이섬유, 즉 채식 위주의 식단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한편 이번 연구에서는 장유형3을 따로 분류하지 않았는데 연구자들은 장유형3을 장유형1 가운데 상대적으로 박테로이데스속의 비율이 적은 것으로 간주했다.
이 결과는 지난 2010년 유럽의 아이들과 아프리카 아이들의 장내미생물 분포 연구결과와도 잘 맞는다. 동물성 단백질과 지방이 많은 전형적인 서구 식사를 해온 유럽 아이들과 탄수화물을 주로 섭취해온 서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 아이들의 분변을 분석하자 유럽 아이들은 박테로이데스속 미생물이 많았다(장유형1). 아프리카 아이들은 프레보텔라속 미생물이 많았다(장유형2). 이런 연구들은 개인의 장내미생물 분포가 대체로 일생동안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기존 연구결과와도 잘 맞는다. 사람의 식성은 좀처럼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식단을 바꾸면 개인의 장유형도 바뀔까. 연구자들은 고지방, 저식이섬유 식단을 즐기는 장유형1인 사람 10명을 뽑아 임의로 5명씩 나눈 뒤 한 쪽에는 기존 식단을, 다른 한 쪽에는 저지방, 고식이섬유 식단을 10일 동안 제공했다.
그 결과 식단을 바꾼 쪽은 하루 만에 장내미생물 분포에 뚜렷한 변화가 생겼다. 그러나 장유형을 바꿀 정도로 크지는 않았다. 10일 동안 식단을 바꿨음에도 이들의 장내미생물 분포는 여전히 장유형2보다는 장유형1에 가까웠다. 한 번 정해진 장유형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는 말이다. 물론 장기적으로 식단을 바꾼다면 장유형도 바뀔 가능성이 크다. 적어도 장유형은 혈액형처럼 불변의 특성은 아닌 셈이다.
장내미생물 바뀌면 성격도 바뀐다?
장내미생물이 숙주(동물)에게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무균동물, 즉 장내에 미생물이 전혀 없는 동물에게 장내미생물을 넣어준 뒤 변화를 관찰하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무균생쥐는 주변의 다른 생쥐를 식별하는 능력이 좀 떨어진다. 이 녀석들은 뇌와 면역계가 덜 발달해있고 공격적이고 다소 신경질적으로 반응한다. 또 좁은 통에 갇히는 것 같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스트레스호르몬이 보통 생쥐보다 훨씬 높게 치솟는다.
그런데 이런 무균생쥐에 비피도박테리움 인판티스 같은 장내미생물을 넣어주면 스트레스 반응이 정상 수준으로 뚝 떨어진다. 한편 무균생쥐에게 어떤 생쥐의 장내미생물을 넣어주면 그 생쥐의 성격과 비슷하게 성격이 바뀐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즉 장내미생물의 조성이 숙주의 성격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침을 시사하는 결과다. 많은 장내미생물이 신경전달물질과 그 대사산물을 생산한다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래서 아일랜드 코크대(UCC)의 신경과학자 존 크라이언 교수는 ‘사이코바이오틱스(psychobiotics)’, 즉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미생물이라는 뜻의 용어를 만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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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당신의 장유형은 무엇입니까? – 동아사이언스 칼럼, 사이언스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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