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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걷는 선비

『밤을 걷는 선비』, 글 조주희, 그림 한승희, 1~11권 연재중

선비들의 주문을 받아 그들이 원하는 책을 구해주고 돈을 받았던 책쾌. 책쾌 양선은 주문받은 책을 전해주기 위해 이상한 이야기가 떠도는 음석골 선비 김성열의 집에 가게 된다. 막상 마주한 선비는 소문처럼 나빠 보이지는 않았던 터라, 양선은 책값으로 선비의 서재를 구경하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이미 흉흉한 소문에 대해 알고 있었던 선비는 양선의 당돌한 제안을 비웃으면서도 하룻밤 서재에 머물 수 있게 허락한다.

한편 선비는 남자의 행색을 하고 있는 양선이 실은 여자임을 알아챈다. 양선은 집안이 몰락한 탓에 남장을 하고 책쾌로서 살아가고 있었던 것.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것 같던 두 사람은 어느 날 기방에서 운명적으로 재회하고 이후 양선이 위험해 처할 때마다 선비가 나타나 그녀를 구하면서 둘 사이에 미묘한 감정이 싹을 틔우기 시작한다. 양선과 성열이 엮이기 시작할 때 양선의 앞에 치산이 나타난다. 집안이 몰락하기 전 양선과 정혼하기로 한 사이였던 그는 그녀의 처지가 예전 같지 않아도 약속을 지키고 싶어 한다. 그러나 양선의 마음이 점점 성열에게 향하는 걸 눈치 챈 치산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성열로부터 양선을 지키려고 한다. 이때 도성에는 호랑이 사건이라 불리는 연쇄살인이 발생하기 시작하면서 궁 안팎이 어지러워지고 성열의 앞에 숙적, ‘귀’가 나타난다.

조선에 안착한 뱀파이어 로맨스, 『밤을 걷는 선비』

밤을 걷는 선비

여장남자와 뱀파이어까지 순정만화 단골 소재는 모두 모였다.

ⓒ 서울문화사

한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서늘한 아름다움 때문인지 뱀파이어는 서양의 귀신 중에서도 가장 매력적인 존재로 여겨지며 문학과 영화, 드라마 등 많은 장르 안에서 저마다의 모습으로 살아왔다. 특히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인간의 목덜미를 깨물고 피를 마셔야 살 수 있는 뱀파이어의 특성은 금단과 금욕을 오가는 위험한 사랑이야기를 수없이 만들어왔다. 서양의 것이라 여겨지던 뱀파이어는 어느덧 한국 영화와 드라마 혹은 만화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흡혈모기에게 물려 뱀파이어가 된다는 설정의 영화 <흡혈형사 나도열>이나 뱀파이어 의사가 등장하는 KBS의 메디컬 드라마 <블러드>가 그렇다. 대개 현대극의 범주에서만 등장하던 뱀파이어는 이제 시대를 거슬러 조선시대로 흘러간다. 『키친』의 조주희 작가가 이야기를 만들고 『천일야화』 『춘앵전』의 한승희 작가가 그림을 그린 만화 『밤을 걷는 선비』 이야기다.

익숙한 소재를 색다르게 요리하다

밤을 걷는 선비

조선시대가 배경이기 때문에 복식이나 궁을 바라보는 재미가 있다.

ⓒ 서울문화사

『밤을 걷는 선비』는 하얗고 보드라운 목을 보며 피에 대한 갈망을 억누르는 금욕적인 미남자가 조선시대의 선비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구미호나 도깨비, 처녀귀신의 무대였던 토속적인 배경에 뱀파이어라는 다소 이질적인 존재를 등장시킨 것이다. 시대극에 등장한 낯선 인물은 음석골의 선비 김성열. 아주 오랜 시간 그곳에 살았지만,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어 문둥병에 걸렸다거나 요괴라는 등의 흉흉한 소문을 달고 다니는 자다. 이상한 소문 탓에 왕래하는 이도 없어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그의 집에 책쾌 양선이 당도한다. 책쾌가 선비들의 주문을 받아 책을 배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성열의 주문을 받아 큰마음을 먹고 그의 집에 들른 양선은 성열이 이상한 자이긴 하지만 소문만큼 무서운 자는 아님을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역적으로 몰려 집안이 몰락한 탓에 남장을 한 채 책쾌 일을 하고 있지만 포부와 배짱만큼은 사내 못치 않은 양선은 주문한 책에 대한 값 대신 성열에게 서재를 구경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한다. 곱게 내려진 발 뒤에 앉아서 양선의 당돌한 부탁을 듣던 성열은 코웃음을 치면서도 하룻밤만 서재에 머무를 것을 허락한다. 서재에서 책을 보다 잠든 양선을 발견한 성열은 그가 남자가 아닌 여자임을 알아챈다.

뱀파이어와 남장여자는 이미 익숙한 소재다. 이런 이야기에서 남장을 한 여인은 늘 고운 옷을 입고 나타나 실은 자신이 여자임을 어렴풋이 밝힌다. 한편 뱀파이어는 누구보다 피를 갈망하지만 사랑하는 이의 목덜미를 깨물 수 없어서 고뇌에 가득 찬다. 『밤을 걷는 선비』에도 이런 익숙한 장면이 당연히 등장한다. 다만 조금 다르게 느껴지는 지점은 그들의 이야기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밤을 걷는 선비』는 아주 익숙한 것들을 살짝만 변주해도 낯설어 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작품이다. 변주를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클리셰를 색다른 배경에 풀어놓을 때라는 걸 입증한 셈이다.

순정의 공식, 엇갈린 사랑

밤을 걷는 선비

우연같은 만남을 반복하며 주인공들은 서로에게 미묘한 감정을 느낀다.

ⓒ 서울문화사

양선과 성열은 첫 만남 이후 기방에서 다시 재회한다. 성열은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들키기 싫어 누구와도 인연을 두려하지 않으려 하지만 자꾸만 마주치게 되는 양선에게 마음이 끌린다. 양선 역시 정체를 알 수 없는 성열에게 자꾸 마음이 간다. 마음이 이어지기도 전에 이 둘에게는 사랑의 적수가 등장한다. 양선에게는 유일하게 성열의 정체를 알고 있는 화영각의 기생 수향이, 성열에게는 과거 양선의 정혼자였던 치산이 나타난 것. 수향은 누구에게도 곁을 주지 않던 성열이 양선에게 끌리는 것을 참을 수 없고 치산은 양선의 가문이 몰락했어도 그녀와 정혼의 약속을 이루고 싶다. 치산과 수향 두 사람은 각각의 방식으로 양선과 성열에게서 자신의 사람을 지키려 한다. 치산은 양선을 보호함으로써, 수향은 간계를 써 양선을 위험에 빠트림으로 써.

주인공들의 사랑을 방해하는 연적은 늘 빠지지 않는 순정만화의 공식이다. 오로지 사랑을 방해하기 위해 등장하는 기능적인 캐릭터라 미움을 사기 마련이다. 치산과 수향 역시 그렇지만, 치산은 자신의 믿음 안에서 어떻게든 사랑하는 이를 지켜내려는 순애보를 보여주고 수향은 사랑을 위해 타인을 위험에 빠트리는 매력적인 팜므파탈로 거듭난다. 자신의 사랑을 관철시키기 위해 전혀 다른 방식의 택한 이들의 사랑 또한 성열과 양선의 애틋함만큼이나 극에 재미를 주는 요소 중 하나다.

시대의 비극이 미스터리로

밤을 걷는 선비

만화를 바탕으로 한 MBC의 드라마 '밤을 걷는 선비'

ⓒ 서울문화사

조선시대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을 꼽으라 하면 영조가 자신의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일이 빠지지 않는다. 『밤을 걷는 선비』 또한 그 사건의 영향 아래 있다. 때는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지 7년째 되던 해, 도성에는 ‘호랑이 사건’이라 불리면 연쇄살인이 벌어지고 있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은 이후 치산과 어울려 다니던 이산(훗날의 정조)은 호랑이 사건이 실은 궁 안의 모든 의심스러운 사건들과 연관이 있음을 알게 된다. 거기에 죽은 아버지의 비밀도 함께 있다는 것도.

영조, 사도세자 그리고 정조까지의 이야기는 비극적이고 또 흥미로운 지점이 많은 이야기인만큼 여러 작품의 소재로 활용되어 왔다. 『밤을 걷는 선비』는 역사를 활용해 극에 미스터리한 사건을 불어 넣으면서 사극과 판타지 그리고 순정만화가 취할 수 있는 모든 장점을 고루 지닌 뱀파이어 물로 선보인다. 한편 MBC에서 동명의 드라마가 제작되어 화제를 끌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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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민영 집필자 소개

컬처매거진 BRUT 에디터, 씨네21 객원기자를 거쳐 현재는 만화없는 만화 웹진 에이코믹스 에디터

출처

영화와 드라마로 제작된 만화
영화와 드라마로 제작된 만화 | 저자김봉석 외 | cp명에이코믹스 전체항목 도서 소개

영상으로 만나볼 수 있는 만화! 만화 속 숨겨진 이야기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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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밤을 걷는 선비영화와 드라마로 제작된 만화, 김봉석 외, 에이코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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