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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사건 민주주의 전통이 시작되다
잉글랜드의 명예혁명
시대 | 168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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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2년 크롬웰을 중심으로 한 의회파가 왕당파를 물리친 잉글랜드 내란이 발발했다.
1649년 찰스 1세가 처형되고 크롬웰의 공화정이 시작되었다.
1660년 크롬웰이 죽고 나서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가 잉글랜드의 왕위에 올랐다.
1658년 왕의 목을 자르고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잉글랜드의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이 사망했다. 그리고 2년 후 찰스 1세의 장남 찰스 2세가 망명생활을 마치고 런던에 입성해 왕위에 올랐다.
찰스 2세는 1649년 아버지가 처형당하자 새로운 왕을 자칭했으나 크롬웰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쫓겨난 인물이다. 왕관을 빼앗긴 왕세자는 프랑스와 네덜란드를 전전하며 오랫동안 망명 생활을 했다. 그는 크롬웰이 죽고 왕정복고의 움직임이 무르익자 망명지인 네덜란드 브레다에서 혁명 가담자를 모두 용서하고 그들의 재산권을 그대로 인정하겠다고 선언했다. 그가 아버지의 복수를 할까 두려워하던 세력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왕정복고에 협조하기로 했다. 1660년 그가 런던에 입성하자 수많은 런던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왕의 귀환을 환영했다. 민심은 청교도 혁명 때와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그러나 찰스 2세의 약속은 말뿐이었다. 왕위를 회복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던 찰스 2세는 일단 지키지도 않을 약속을 하고 본 것이었다. 그는 혁명에 가담했던 청교도 인사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오늘날에도 사용되는 ‘블랙리스트’라는 단어가 이때 처음 사용되었는데, 이는 찰스 2세가 청교도 혁명 당시 자신의 아버지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의원들의 명단을 가리키던 말이다. 찰스 2세는 블랙리스트에 따라 무자비한 복수를 벌였으며 죽은 크롬웰의 시체는 무덤에서 파내어져 목이 잘리고 토막이 났다.
국민들이 찰스 2세에게 바란 것은 입헌 군주제를 따르는 절도 있는 군왕이었다. 그러나 찰스 2세는 그런 기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가톨릭을 옹호했고, 국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프랑스와 화친했다. 런던 시민의 20퍼센트가 페스트로 죽고 역사상 유명한 ‘런던 대화재’로 런던 시가 불바다가 된 상황에서 그는 네덜란드와 전쟁을 벌였다. 전쟁에서 이겨 아메리카 신대륙의 네덜란드 식민지 뉴암스테르담(오늘날의 뉴욕)을 빼앗았지만, 국민들의 고통은 적지 않았다.
청교도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의회는 왕의 전횡을 막을 방안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먼저 성공회 신도가 아닌 사람을 모든 공직에서 추방한다는 심사율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왕이라 하더라도 아무 이유 없이 국민을 잡아 가두지 못하도록 규정한 인신보호율도 가결되었다.
문제는 찰스 2세의 동생으로 그의 뒤를 이어 왕위 계승권을 가진 제임스 2세였다. 그는 찰스 2세보다 더 독실한 가톨릭 교도였고, 더 고집불통의 전제주의자였다. 많은 의원들이 더 큰 혼란을 막기 위해 그의 왕위 계승권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제임스 2세를 옹호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결국 의회는 둘로 쪼개졌다. 제임스 2세가 왕이 되는 데 반대하는 이들은 시민 계급과 청교도를 중심으로 ‘휘그 당’을, 찬성하는 이들은 귀족과 지주 계급을 중심으로 ‘토리 당’을 이루었다. 이것이 영국 정당정치의 시작이다. 토리 당은 훗날 보수당으로 이름을 바꿔 오늘날까지 존속하고 있고, 휘그 당은 노동당이 등장하기 전까지 자유당이라는 이름으로 영국의 양대 정당으로 활약했다.
찰스 2세는 의회를 해산하고 휘그 당원들을 탄압했다. 많은 휘그 당원들이 해외 망명길에 올랐다. 1685년 찰스 2세가 죽고 제임스 2세가 왕위에 올랐다. 휘그 당원들의 예측은 사실로 드러났다. 제임스 2세는 심사율을 무시하고 가톨릭 교도들을 대거 고위 공직에 등용했다. 또한 인신보호율에 아랑곳하지 않고 국교회 소속 캔터베리 대주교 등 일곱 명의 주교들을 체포해 투옥했다. 제임스 2세의 폭정이 도를 넘어서자 당초 그의 편을 들었던 토리 당조차 등을 돌렸다. 왕과 국회가 완전히 견원지간이 된 것이다.
1688년 의회는 왕을 폐위하기로 결정했다. 의회가 왕관을 이어받을 사람으로 정한 사람은 제임스 2세의 큰딸 메리와 그녀의 남편인 네덜란드 총독 윌리엄이었다. 오라녜 공 윌리엄은 의회와 비밀리에 교섭하여 네덜란드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에 상륙하도록 했다. 대군이 런던에 입성하자 제임스 2세는 딸과 사위에게 쫓겨 무력하게 프랑스로 도망쳤다. 부부는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로 공동 즉위했다. 역사가들은 이 혁명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국왕의 교체가 이루어졌다 하여 ‘명예혁명’이라 부른다.
의회는 즉위식에 앞서 〈권리선언〉을 제출했다. 이듬해 새 왕의 서명을 받아 1689년에 공포된 이 문서가 바로 역사적으로 의미가 깊은 〈권리장전〉이다. 〈권리장전〉은 모든 법률의 제정과 폐지는 의회를 거쳐야 하고, 의회의 승인 없는 과세를 금지하며, 자유 선거와 의회 안에서의 표현의 자유 보장 등을 처음으로 공식화했다. 국민의 대표인 의회의 자유와 권리 보장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가 신장된 것을 의미했다.
이로써 〈마그나 카르타〉 이후 영국 역사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왕과 의회 사이의 싸움은 의회의 승리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주권은 국민과 그 대표인 의회에게 돌아가고, 국왕은 명목상의 국가 원수로만 자리하는 입헌 군주정의 기초가 다져진 것이다. 이후 의회의 다수당이 내각을 조직하고 다수당의 대표가 수상으로서 국가 운영을 도맡아 하는 의회 책임제 시스템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정치 체제는 오늘날의 영국 정치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명예혁명은 서구 민주주의 확립의 첫 단추를 끼운 사건이었다.
이와 같은 거대한 변화가 사상적인 배경 없이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것은 아니다. 명예혁명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이는 당대의 철학자 존 로크였다. 로크는 개인의 이익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국가는 개인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개인들의 계약에 따라 만들어졌다고 보았다. 즉 왕권신수설에서 말하듯 정치 권력이 본래 왕이나 정부에 있는 것이 아니며, 왕과 정부는 시민으로부터 권력을 ‘위탁’받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시민은 권력을 ‘위탁’했을 뿐 ‘양도’하지 않았다. 생명, 자유, 재산에 대한 권리 등 인간의 기본적 권리는 결코 양도할 수 없다. 따라서 정부가 이러한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 되며, 만약 침해했을 경우 개인들에게는 정부를 해체할 권리가 생긴다. 이 대목에서 시민혁명은 정당성을 획득한다.
로크의 사상은 훗날 천부인권 사상과 사회계약론으로 이어졌다. 천부인권 사상은 모든 사람이 생명을 유지하고 행복을 추구할 자유, 신체의 자유, 신념에 근거한 의사 결정의 자유 등의 권리를 타고났으며, 이는 어떤 권력에 의해서도 침해받아서는 안 될 기본적 권리라는 것이다. 사회계약론은 이러한 천부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정부가 조직되었고, 따라서 국가 권력의 정당성은 피통치자의 동의에서 비롯됨을 분명히 했다. 이런 두 가지 사상 속에서 미국의 독립 운동과 프랑스 대혁명이 잉태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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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발자취를 통해 정치, 사회, 문화, 상식을 종합적으로 이해한다지구상에 인류라고 불릴 만한 존재가 처음 등장한 이후 인류가 겪어온..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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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잉글랜드의 명예혁명 – 세계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박영흠,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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