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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사건 명나라의 멸망
이자성의 난
시대 | 163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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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과도한 세금 징수와 대규모 기근이 겹치자 명나라 백성의 삶은 나날이 피폐해졌다. 이에 수많은 농민과 지식인까지 합세해 4만 명에 육박하는 이자군의 반란 세력이 대순을 세우고 정부를 공격했다. 낙양과 서안을 점령하고 20여 일 만에 북경을 포위하고 자금성까지 점령하여 명나라를 멸망시킨 뒤 이자성은 영창(永昌)을 세워 황제로 즉위했다.
이자성은 섬서 연안의 역졸 출신으로, 중농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생계를 위해 목동, 역졸, 병졸 따위를 전전하던 사회 최하층이었다. 그는 1631년 고영상(高迎祥)의 반란군에 들어가 대장이 되었고, 1635년 반란군의 대책 회의에서 세력을 모아 네 갈래로 정부군을 공격하자는 의견을 내며 두각을 드러냈다. 1636년, 그는 서안으로 진군하던 고영상이 섬서 순무 손전정에게 잡혀 처형당하자 고영상의 뒤를 이어 제2대 틈왕(闖王)이 되었다. 그러나 정부군에게 연이어 패하면서 이자성은 정부군을 피해 호북성 운양에 은거했다.
1639년, 중국 전역이 가뭄에 따른 기근에 시달리며 유랑민이 속출하자 이자성은 이들을 규합하여 호북성을 떠나 하남성으로 진출했다. 그는 균등한 토지 소유, 조세 경감, 엄격한 군율 등의 대민 정책을 내세워 여타 반란군을 흡수하고 농민들을 끌어들였다. 이로써 이자성의 반란군은 금세 수만 명의 군대로 성장하였고, 굶주린 농민뿐만 아니라 이암, 우금성, 송헌책 같은 지식인들도 동조했다. 이처럼 이자성의 반란군에 수많은 농민들과 지식인이 가세한 이유는 당시 명나라의 사회 모순이 극도에 달했고, 대규모 기근으로 백성들이 매우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6세기 말, 명나라는 과도한 군사비 지출로 재정을 악화시켰다. 14대 황제가 된 만력제는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생한 조선, 보바이가 반란을 일으킨 영하에 군대를 파견했고, 1594년에는 양응룡이 사천성 파주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대규모 군대를 파견했다. 이를 '만력삼정(萬曆三征)'이라 일컬으며, 이로 인해 명나라 정부는 재정 적자에 허덕이게 되었다. 또한 만력제는 내각대학사 장거정 사후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고, 20년 가까이 조신들을 알현하지 않는 등 국정을 내던지고 주색에 빠져 재산 축적에 몰두했다. 게다가 자신의 능묘인 건릉 건설에 국가 재정의 대부분을 쏟아부었다. 또한 당시 명나라 관료 사회는 과포화 상태로 녹봉조차 지급하지 못할 정도로 재정 지출이 수입을 월등히 앞서고 있었다. 이에 명나라 정부는 부족한 재정을 메우기 위해 백성들을 쥐어짤 수밖에 없었다.
명 조정이 강구한 방법은 세금을 거둘 수 있을 때 많이 걷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세금 징수를 위해 많은 관원들을 선발했으며 징수 강도 또한 높였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세금 징수를 위해 선발한 관원들에게 녹봉을 지급하기 위해서 더 많은 세금이 필요했던 것이다. 다음으로 명 조정은 세금을 늘리는 방법을 택했다. 초기에 명 조정은 경작지 1무당 은자 1냥이나 2냥을 세금으로 거둬들였다. 그러나 명 중기에는 인구가 증가하고 물가가 올라 경작지 1무당 은자 5냥에서 10냥으로 크게 올랐다. 또한 세금 징수가 가혹해짐에 따라 실제 은자 7냥에서 8냥에 지나지 않는 세금을 은자 10냥으로 내야 했다. 그리하여 가혹한 세금에 부담을 느낀 농민들은 땅을 버리고 도망치기도 했다. 이에 명 조정은 도망친 농민들의 세금을 군대까지 동원하여 남아 있는 농민들에게 거둬들이니 농민들의 경작지 이탈은 더욱 심해졌다.
이와 더불어 백성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든 것은 1627년부터 1628년에 걸쳐 발생한 대기근이었다. 가뭄으로 인한 기근은 하남성과 섬서성에서 특히 심했다. 급기야 굶주림을 참지 못한 백성들은 무리를 지어 부호를 약탈했으며, 조정 관리를 비롯해 군사와 충돌하면서 도둑떼로 바뀌었다. 이러한 농민 유구 집단은 제때 배급을 받지 못한 병사들과 실업자가 된 역졸, 마적 집단까지 합세하면서 대규모 반란 집단으로 성장했다.
1628년, 왕가윤(王嘉胤)이 농민들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고영상과 장헌충(張献忠) 등이 여기에 가담하여 장수가 되었다. 처음 명 조정은 당시 북쪽에서 세력을 넓히고 있던 만주족 때문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없어 이들을 항복시켜 식량을 주고 원적지(原籍地)로 돌려보내는 초무책(招撫策)을 썼다. 그러나 초무책은 미봉책에 지나지 않아 농민 반란군의 세력은 오히려 점차 확대되었다. 그러자 1630년, 명 조정은 홍승주(洪承疇)를 삼변총독(三邊總督)에 임명하여 대토벌 작전을 펼쳤다. 결국 농민 반란군은 왕가윤을 잃고 관군에게 크게 패했다. 하지만 왕가윤의 죽음으로 농민 반란군이 와해된 것은 아니었다. 왕가윤의 휘하 장수였던 고영상이 이들을 집결시켜 자신을 틈왕이라 칭하고, 섬서와 하남으로 진출하니 농민 반란군의 규모는 3만 내지 4만에 이르렀다.
하남성으로 진출하여 세력을 확장한 이자성은 1641년, 만력제의 아들 복왕 주상순이 살고 있던 낙양을 공격해 점령했다. 이후 이자성은 주상순을 죽이고 재산을 몰수하여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 큰 호응을 얻었다. 이로써 거점을 마련한 이자성의 농민군은 도시 공격을 개시했다.
이자성은 1642년에 개봉을 함락한 데 이어 1643년에는 호북의 양양을 점령한 뒤 이곳을 양경(襄京)이라 개칭했다. 더불어 서툴게나마 행정 기구를 조직하고 스스로 신순왕(新順王)이 되었다. 또한 이자성의 농민군은 서쪽으로 계속 진군하여 서안을 점령해 장안(長安)이라 개칭하고 서경(西京)이라 불렀다. 1644년 2월, 이자성은 드디어 왕조 성립을 선포하여 국호를 대순(大順), 연호를 영창(永昌)이라 하고 황제가 되었다.
같은 해 3월, 이자성은 북경을 점령했다. 당시 명나라 정부군은 오삼계의 지휘 아래 산해관에서 청나라 군사들과 대치 중이었으며, 또 다른 정부군은 하남성의 반란군과 대치 중이었기 때문에 북경성은 거의 무방비 상태였다. 약 20여 일 만에 이자성은 북경성을 포위하고, 환관들의 도움을 받아 자금성까지 점령했다. 이자성의 자금성 입성 소식에 명나라 황제 숭정제는 황태자와 아들 영양, 정왕을 평민 차림으로 변장시켜 피란시킨 후 황후와 후비들에게 자결을 종용했다. 그리고 자신은 소복 차림으로 경산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숭정제의 자살로 명나라는 277년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북경을 점령한 이자성은 우선 숭정제의 장례를 치른 후 과거를 실시하고 동전을 주조하는 등 새 왕조 체제를 정비하고자 했다. 그러나 권력 기반의 취약성과 지배 영역의 제한이라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군율이 엄격했던 이자성의 군대는 북경 입성 후에 부호와 신사를 감금, 고문하고 재산을 약탈함으로써 민심을 황폐화시키고 지지 세력을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한편 이자성은 산해관의 오삼계에게 투항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다. 당시 산해관에 주둔한 오삼계 군대의 규모는 이자성의 군대와 팽팽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런 오삼계가 투항을 거부하고 항쟁을 선언한 것이다. 사실 오삼계는 숭정제가 자결로 생을 마감하고, 부친과 가족들이 모두 북경에 있기 때문에 이자성에게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북경의 부친이 농민들에게 고문당하고, 자신의 애첩 진원원을 이자성의 부하 유종민이 가로챈 것을 알게 되자 마음을 바꾼 것이다.
이자성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산해관까지 진격해 오자, 오삼계는 청나라와 손을 잡고 이자성의 군대에 맞서기로 결심했다. 당시 청나라는 어린 황제 순치제를 대신하여 예친왕 도르곤이 섭정을 맡았는데, 오삼계는 예친왕에게 사신을 보내 투항 의지를 전했다. 오삼계와 예친왕은 이자성을 토벌한 후 황허 이북은 청나라, 황허 이남은 명나라가 차지하고 오삼계가 다스린다는 조건으로 연합했다. 이자성의 군대는 오삼계의 군대와 격전을 벌였으나 청나라의 기마병이 가세하면서 대패하였다. 결국 이자성은 철수 명령을 내리고 북경으로 돌아왔지만, 연합군의 진격 소식에 곧 북경을 버리고 자신의 옛 근거지인 서안으로 퇴각했다. 이후 청나라의 예친왕은 순조롭게 북경에 입성했다. 북경에 입성한 후에도 청나라는 이자성을 계속해서 추격했고, 이자성은 추격을 피해 서안마저 포기하고 퇴각을 거듭하다 1645년에 통산현에서 생을 마감했다.
명나라 말기의 농민 반란인 이자성의 난은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새 왕조를 여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대권을 잡은 이자성은 자신의 새 왕조를 유지하지 못하고 결국 이민족 왕조인 청나라에게 중원의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ㆍ 1635년 : 반란군 회의에서 이자성이 정부군을 공격하는 의견을 내며 두각을 드러내다.
ㆍ 1641년 : 이자성이 낙양을 점령하다.
ㆍ 1644년 : 이자성이 왕조 성립을 선포하고 연호를 영창이라 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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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이자성의 난 – 중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홍문숙,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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