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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국사를 움
직인 100
대 사건
황제 중심의 중앙 집권 체제 형성

오초칠국의

요약 테이블
시대 BC 154

한 고조 유방은 통일된 중앙 정부를 세우면서 성씨가 다른 공신 일곱 명을 왕으로 봉하고 독립된 통치권을 위임하여 제후국을 다스리게 했다. 하지만 유방은 제후왕들이 광대한 영토와 강력한 군대를 거느리게 되자 반란을 두려워했다. 한편 경제의 제후국 영지 삭감 정책에 불만을 품은 오왕 유비는 7국의 왕과 연합하여 오초칠국의 난을 일으켰으나, 주아부의 총공세에 동월에서 살해되고 다른 왕들은 모두 자살한다. 이로써 오초칠국의 난은 3개월 만에 평정되었다.

경제(景帝, 재위 기원전 156~141)는 중앙 정부에 비해 힘이 강해진 제후국을 억누르기 위해 제후왕의 과실 정도에 따라 영지를 삭감했다. 먼저 초왕 유무(劉戊)가 효문태후(孝文太后)의 상중에 여자를 가까이했다는 죄로 동해군 38현을 몰수했고, 교서왕(膠西王) 유앙(劉卬)에게는 6현을, 조왕(趙王) 유수(劉遂)에게는 18현을 바치도록 했다. 그리고 몰수한 현들은 중앙 정부의 관리를 받도록 하여, 제후왕 영지 삭감 정책을 확대 실시하고자 했다. 이러한 과정은 제후왕들에게 혹시나 영지를 빼앗기지 않을까 하는 위기의식과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과거 한 고조 유방은 통일된 중앙 정부를 세우면서, 항우 타도에 공을 세운 성씨가 다른 공신 7명과 유씨 성의 자제들 9명을 왕으로 봉했다. 그리고 황제 자신은 제후국을 제외한 수도 장안과 서북 지역을 직할했으며, 분봉된 제후왕들에게는 사실상 독립된 통치권을 위임하여 제후국을 다스리도록 했다. 이리하여 주나라의 봉건제와 진나라의 군현제가 혼재한 군국제(郡國制)가 확립되었다. 여기서 군은 중앙의 통치를, 국은 제후의 통치를 받는 지역을 가리킨다.

그러나 고조 말년에 이르러 왕조의 지배력이 안정되자, 고조는 광대한 영토와 강력한 군대를 거느리게 된 이성 제후왕들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그들을 제거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들에게는 주로 모반죄가 적용되었으며, 연왕 장도, 초왕 한신, 양왕 팽월, 회남왕 경포 등이 숙청되었다. 그리고 숙청된 자들의 자리는 종실인 유씨 일족이 대신하였다. 고조는 종실을 우대함으로써 과거 진나라의 전철을 답습하지 않을 의도였으나, 제후왕에게 정치와 경제 전반을 위임한 상태에서 종실인 동성 제후왕이 중앙 권력에 무조건 충성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일차원적인 사고였다. 제후왕이 중앙 권력에 위협적인 존재로 성장할 가능성은 성씨와는 무관한 문제였다. 특히 몇몇 제후국은 광산 개발과 염철 생산 등으로 중앙 권력과 맞먹는 부국강병을 이룩한 데다 대가 이어질수록 혈연관계에 따른 결속력이 희석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문제 시절인 기원전 177년에는 제북왕 흥거(興居)가 반란을 일으켰으며, 기원전 174년에는 회남왕 유장(劉長)의 반란이 일어났다. 비록 당시 반란의 규모가 크지 않아 손쉽게 진압했으나, 이러한 반란들은 제후왕 통제를 위한 정책 마련의 계기로 작용하기에 충분했다.

처음으로 제후왕의 세력을 약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은 가의(賈誼)였다. 가의는 문제에 의해 최연소 박사관(博士官)에 임명된 인재였으나, 주발(周勃) 등의 수구파 대신들이 시기하여 장사왕의 태부, 양왕의 태부 등으로 좌천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국정에 관한 의견을 상소로 올리곤 했다. 그는 제후왕의 세력 약화를 위해 제후왕의 아들을 모두 계승자로 인정하여 제후국을 분할할 수 있을 만큼 분할할 것을 진언했다. 하지만 당시 문제는 가의의 정책을 시기상조라고 여겼기 때문에 실행에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문제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경제는 달랐다. 그는 가의의 제후왕 억제책을 계승한 어사대부 조조(晁錯)의 건의에 따라 제후국 영지 삭감 정책에 적극 나섰다.

오왕(吳王) 유비(劉濞)는 고조의 형인 유중(劉仲)의 아들로 황실의 원로였다. 그는 젊은 시절 고조를 따라 경포 토벌전에 종군한 공으로 장강 하류에 위치한 오나라의 왕으로 봉해졌으며, 그 후 약 40년 동안 오나라를 통치했다. 그는 구리 광산을 개발하고 소금을 쪄서 막대한 국부를 마련함과 동시에 백성의 과세액을 줄이고, 인재를 등용하는 등 안정된 정치를 펼쳤다. 그런데 경제 즉위 후 오왕 유비도 조조의 제후왕 축소 정책에 따라 영지를 바쳐야 할 처지에 처했다. 특히 중앙 정부는 회계군과 예장군의 헌납을 명했는데, 이는 오왕 유비로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조치였다. 그 이유는 이 땅들이 오나라 경제력의 근원인 소금과 구리의 생산지였기 때문이다. 오왕 유비는 이를 바탕으로 40여 년에 걸쳐 중앙 권력의 도움 없이 오나라의 부국강병을 이룩했다고 여겼다. 게다가 오왕 유비는 경제가 태자였을 시절 던진 바둑판에 맞아 자신의 아들이 절명한 사건으로 경제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영지를 바치는 대신 무력으로 대항하기로 결정했다. 기원전 154년, 그는 이미 영지 삭감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던 초왕 유무(劉戊), 교서왕 유앙, 조왕 유수, 제남왕 유벽광(劉闢光), 치천왕(菑川王) 유현(劉賢), 교동왕(膠東王) 유웅거(劉雄渠) 등 7국의 왕과 연합한 뒤, 간신 조조를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오초칠국의 난(吳楚七國-亂)을 일으켰다. 또한 이 반란에 한나라의 외번인 동월(東越)이 파병하고, 북쪽의 흉노까지 원병을 약속함에 따라 반란의 규모는 크게 확장되었다.

처음에 경제는 조조를 참수하여 반란군을 회유하고자 했다. 하지만 간신 조조를 주살한다는 명분은 단순히 표면일 뿐 속뜻은 당연히 정권 찬탈에 있었다. 그리하여 오초 연합군은 수도 장안을 함락시키고자 먼저 양나라를 공격했다. 또한 교동, 교서, 치천, 제남왕은 초기에 반란에 동참하려다가 변심한 제나라를 응징하러 나섰다. 결국 경제는 주아부(周亞夫)를 태위로 임명하고, 난포, 두영, 역기 등을 파견하여 난을 평정하도록 했다. 그리고 양왕 유무(劉武)에게는 오초 연합군의 공격을 막아 중앙 정부를 보호할 것을 명했다.

이때 양나라는 극벽(棘檗) 싸움에서 오초 연합군에게 크게 패했음에도 결사적으로 싸웠으며, 주아부는 양나라 수도 수양의 동북쪽에 위치한 창읍에 군대를 주둔시켜 오초 연합군의 보급로를 끊어 버렸다. 이에 오초 연합군은 양나라에 막혀 더 이상 서진할 수 없게 되었고, 보급로의 차단으로 굶주린 병사들은 전의를 상실했다. 여기에 주아부가 성벽을 굳게 닫고 공격에 전혀 응하지도 않은 채 시간만 끌자, 오초 연합군은 어쩔 수 없이 철수하기 시작했다. 철수하는 연합군에게 주아부가 총공세를 시작했고, 이에 오왕 유비는 동월로 도망쳤으나 후에 그곳에서 살해되었으며, 초왕 유무는 초나라로 도망가 자살했다. 한편 제나라로 진격했던 교동, 교서, 치천, 제남왕 등은 난포가 이끄는 한군의 공격을 받아 후퇴하다 모두 자살하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흉노의 원군을 기대하며 저항하던 조왕 유수도 역기의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해 버렸다. 이로써 오초칠국의 난은 불과 발발 3개월 만에 평정되었다.

오초칠국의 난이 평정되자 제후국은 큰 타격을 입었고, 제후왕의 세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제후왕의 존재는 여전했으나, 그 지위와 역할은 전에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제후국의 정치와 조세 징수의 권한은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에게 넘어갔으며, 제후왕은 중앙 관리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또한 광대했던 제후국의 영지는 삭감되거나 잘게 나뉘었다.

이러한 중앙 정부의 후처리는 한 무제(武帝) 시기에 이르러 비로소 제도화되었다. 그는 제후국을 축소시키고, 제후왕의 정치권력을 박탈하기 위해 추은령(推恩令)과 주금률(酎金律)을 시행했다. 추은령은 제후왕이 죽은 후 영지를 모든 왕자들에게 분봉하게 한 것이며, 주금률은 종묘 제사에 황금을 헌상하게 한 것으로 그 기준을 엄격히 했다. 이로써 중앙 황권은 막강해진 반면 제후왕은 귀족 지주로 전락하였고, 한의 군국제는 사실상 군현제와 다름없게 되어 황제 중심의 중앙 집권 체제가 형성되었다.

ㆍ 기원전 177년 : 문제 시절 제북왕 흥거가 반란을 일으키다.
ㆍ 기원전 174년 : 회남왕 유장이 반란을 일으키다.
ㆍ 기원전 154년 : 오왕 유비가 7국의 왕과 연합하여 '오초칠국의 난'을 일으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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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문숙 집필자 소개

순천향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한 후, 숙명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중국어 교육을 전공하였고, 서강대학교에서 한국어교사 양성과정을 수료하였다. 중국 북경인민대학교, 중국대련외국어학원 한학원에서 ..펼쳐보기

홍정숙 집필자 소개

출판기획자이자 역사 전문작가로 활동하며, 최근에는 동·서양 고전 및 역사 인물에 대한 역사서를 집필하는 데 힘쓰고 있다. 엮은 책에는 《중국사를 움직인 100인》이 있다.

출처

중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중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 저자홍문숙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중국의 역사를 시대별로 나누어 당대의 사건을 정리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경제 분야까지 한눈에 볼 수 있게 종합적으로 구성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사건부터, 타산..펼쳐보기

전체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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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오초칠국의 난중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홍문숙,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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