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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왕의 순서 태, 정, 태, 세, 문, 단, 세·········를 초등학교에서 외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끝에는 '조(祖)'나 '종(宗)'이 따라온다. 유교 이념이 지배한 시대였거나 유교를 기조로 해서 창건된 국가일 경우 어김없이 따라오는 묘호다.
조선 왕조에서 '조'가 붙은 왕은 태조, 세조를 비롯해 7명이고 '종'이 붙은 왕은 18명이다. 연산군과 광해군은 묘호 자체가 없이 '군'으로 불린다.
묘호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이 편파적이며 정도에서 벗어났다고 지적하는 학자들이 있다. 왕을 지칭하는 칭호는 시호와 묘호로 구분되는데 이는 왕의 사후에 부여되는 것이며, 장례를 지내면 장지에는 능호가 붙는다. 고구려 광개토왕의 '광개토', 백제 무령왕의 '무령', 신라 문무왕의 '문무'는 사후에 추증된 시호이며 세종을 장헌대왕이라고 부를 때의 '장헌'도 시호다.
나라를 창건한 사람은 '조'이고 계승자는 '종'이다. 창건자 '조'가 '종'으로 이어지다가 다시 '조'라는 묘호가 등장하면 또 다른 개국과 창건이 있었음을 뜻한다. 시조가 아닌데도 '조'를 갖고 있는 왕은 국도 자체를 옮기고 왕조를 재창건해 시조가 된 사람을 의미하므로, 한 왕조에서 '조'가 둘인 경우는 극히 드물다.
당의 경우 고조 이후 19대 281년 동안 계속 '종'으로 이어졌고 후대에 '조'를 붙인 왕은 없다. 송에서도 태조 조광윤 이후 모두 '종'이라는 묘호를 사용했다. 고려는 태조 왕건이 개국한 후(918) 원종(1274)까지 '종'으로 이어지다가 고려가 원의 사위국이 된 충렬왕부터는 격이 낮은 제후로 강등되어 묘호 없이 시호만 썼다.
그러나 원, 명, 청의 경우 '조'라는 묘호가 두 사람 이상이다. 원의 경우 태조 칭기즈 칸이 몽골을 세웠으나 그의 손자 쿠빌라이가 원이라는 나라를 다시 창건해 개국자로 등장하면서 '세조'라는 묘호가 붙었다. 명의 경우 태조 주원장이 '홍무'라는 연호를 쓰면서 지금의 난징에 국도를 정하고 명을 창건했으나 제3대 영락대제가 수도를 지금의 베이징으로 옮기고 나라를 재창건해 '성조'라는 묘호를 받았다.
이어 누르하치가 싱징에 도읍을 정하고 후금을 세워 태조가 되었으며 그 후 제3대 순치제가 수도를 쯔진청으로 옮기고 나라를 재창건해 세조라는 묘호를 받았다. 제4대 강희제도 성조가 되었는데 대만, 윈난, 쓰촨, 미얀마, 티베트 등을 평정해 청조의 대륙 통일을 실질적으로 완성했다.
그런데 조선은 무려 7명이 '조'라는 묘호를 갖고 있다. 1대 태조(1392~1398), 7대 세조(1455~1468), 14대 선조(1567~1608), 16대 인조(1624~1649), 21대 영조(1724~1776), 22대 정조(1776~1800), 23대 순조(1800~1834) 등이다.
태조 이성계는 고려 왕조를 상대로 쿠데타에 성공해 왕조를 창건했으므로 '조'라는 묘호가 설득력 있지만 나머지 6명의 왕에게는 설득력이 없다는 지적이 예로부터 있었다. '대륙조선사연구회'에서 지적하는 문제점을 토대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을 세운 이성계를 제외하고 '조'라는 묘호를 받은 6명의 왕은 도읍을 옮겼거나, 국토를 확장해 새로운 나라를 세웠거나, 재창건을 이룬 왕이 아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들이 '조'라는 묘호를 받은 이유는 전혀 다른 기준에 의해서였다. 유교적 명분을 제일로 삼아 장렬왕후가 상복을 얼마 동안 입느냐는 것으로 예송 논쟁을 벌였던 조선 왕조가 '조'라는 묘호 부여에는 관대했다는 것 자체가 편파적으로 묘호를 추증했다는 대표적인 증거다.
문제는 '조'를 묘호로 갖고 있는 왕들의 행적이 자랑스럽지 못하다는 데 있다. 세조는 왕위를 찬탈한 후 조카인 단종을 죽이는 등 무단 정치를 실행했으며, 선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로 도망간 후 신하들의 배반이 두려워 많은 사람을 죽였다. 인조는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후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청 태종에게 항복 의식을 행해 조선을 웃음거리로 만든 장본인이다. 영조는 당파에 휘말려 세자인 사도세자를 죽였으며, 정조는 할아버지의 탕평책을 유지해 문치 위주의 개혁 정치를 했으나 그 여파로 세도 정치를 초래했다.
가장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순조다. 순조에 대해 이론이 많은 것은 당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수많은 봉기와 반란이 일어났지만 '조'라는 묘호를 받았기 때문이다. 원래 순조의 묘호는 순종이었다. 그런데 철종 8년(1857) 8월, 이학수가 상소해 순종의 묘호는 마땅히 순조로 해야 한다고 청했다. 덕보다 공이 앞선다는 것이다. 이에 철종은 "성덕과 지선에 대해 경의 말이 나왔으니 미처 하지 못한 슬픔이 더욱 간절하다"라며 '종'을 '조'로 고쳤다.
반면 연산과 광해는 조정 내부의 권력 투쟁을 진압하는 데 힘을 기울이고 외세에서 벗어나려 노력했지만 수구 세력과의 권력 다툼에서 패배해 묘호조차 받지 못하고 '군'으로 강등 당했다. 반정을 일으키게 만든 당사자인 데다가 폭정과 패륜으로 종묘사직의 명분과 절의를 잃었기 때문에 폐출되었다는 설명이지만, 실제로는 '조'를 받은 왕보다 더욱 조선 왕조를 위해 힘썼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가장 신랄한 비난을 받은 왕은 일제 강점기에 사망한 마지막 왕 순종이다. 유교 이념을 정치 기조로 하는 왕실을 망하게 했거나 강압에 의해 종묘사직을 빼앗긴 왕은 묘호를 받지 못하거나 받아도 쓰지 못한다. 설사 쓸 수 있다 하더라도 망국 군주를 뜻하는 '애통하다'의 애(哀), '강제로'라는 뜻의 폐(廢), '쫓겨나다'의 출(出), '끝이다'의 말(末)을 붙여 묘호를 짓는다. 그런데 순종은 나라가 사라진 지 16년 후에 사망했는 데도 순종이라는 묘호를 받았다. 조선 왕실이 아닌 일본 정부가 정해준 묘호를 버젓이 쓰는 것은 묘호 부여에 문제가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는 지적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순조의 정식 시호가 '순조연덕현도경인순희체성응명흠광석경계천배극융원돈휴의행소륜희화준렬대중지정홍훈철모건시태형창운홍기고명박후강건수정계통수력건공유범문안무정영경성효숙황제(純祖淵德顯道景仁純禧體聖凝命欽光錫慶繼天配極隆元敦休懿行昭倫熙化峻烈大中至正洪勳哲謨乾始泰亨昌運弘基高明博厚剛健粹精啓統垂曆建功裕範文安武靖英敬成孝肅皇帝)'라는 점이다.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가 된 후 추존한 것으로 황제의 격에 맞게 만들었을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너무 길다. 순조의 시호가 몇 자인지 세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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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김경수 외, 『테마로 읽는 우리 역사』(동방미디어, 2004).
글
출처
500년 이상 이어진 한 왕조의 왕릉이 거의 훼손 없이 남아있는 예는 세계적으로 조선 왕릉이 유일하다. 역사가 남긴 신비로운 공간, 과학이 담긴 지혜로운 문화유산인 조..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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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조선 왕조 묘호의 비밀 – 과학문화유산답사기1, 이종호, 북카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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