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1882년 10월 7일 조선이 대동은전(大東銀錢)을 선보였다.
대동은전은 모양이 옛날 돈과 크게 달랐다. 우선 가운데 구멍이 없고 뒷면 중심부에는 칠보를 입혔다. 은화였다는 점도 특징. 고려 시대에 국토의 모양을 본떠 '은병화(銀甁貨)'라는 은화를 주조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실물이 전해지지 않아 대동은전을 최초의 은화로 분류하는 시각도 있다.
조선은 왜 넉넉하지 않은 재정 여건에서, 그것도 은본위 제도 도입을 시도(1891)하기 한참 전에 은화를 만들었을까. 통화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돈을 원했기 때문이다. 개항 이후 교역이 늘어나는 가운데 외국 상인들이 악화인 당오전 등 구전을 거부하자 대안으로 내놓은 게 대동은전이다.
원료는 청나라에서 수입한 마제은(馬蹄銀). 무역의 대금 결제용으로 통용되던 마제은 3만 냥(약 1,125㎏)을 녹이고 뒷면 중앙의 칠보에 제작을 담당한 호조의 '호(戶)'자를 새겨 넣었다. 대동 1전, 대동 2전, 대동 3전 등 세 종류를 찍어 기존의 엽전과 다른 가치를 매겼다.
하지만 대동은전은 곧 사라졌다. 수입 대금으로 외국에 넘어간데다 마제은의 국제 가격이 올라 원료 부족으로 9개월 만에 주조가 중단된 탓이다. 부유층도 청색과 초록색, 흑색의 다양한 칠보가 들어간 대동은전을 돈보다는 화려한 귀금속으로 인식해 장롱 속에 모셨다. 오늘날 상태가 잘 보존된 대동은전이라도 상대적으로 낮은 200만 원 선에서 거래되는 것은 퇴장 수량이 많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최초의 근대식 화폐가 사라진 뒤 조선은 신식 주조기를 수입하고 은본위 제도와 금본위 제도를 잇달아 도입하며 건실한 화폐 경제 구축에 나섰으나 피폐해진 재정을 메워줄 초단기 수단인 악화 주조를 반복하다 끝내 망하고 말았다. 요즘에도 비슷한 소리가 들린다. 국채 급증과 재정 악화.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역사 일반과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