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모델
강남 부동산 신화 시작의 신호탄
사대문과 신촌, 돈암동, 장충동. 1960년대 중반까지 서울의 실질적인 생활권이다. 1963년 강남권 일대가 대거 서울에 편입되었으나 일제가 건설한 한강 철교와 인도교가 연결해주는 노량진과 영등포 부근만 수도권일 뿐 대부분 논밭에 머물렀다. 해마다 여름이면 장마가 자연 제방을 넘어 연례적으로 물난리도 겪었다.
한국의 맨해튼으로 불리는 여의도의 사정도 마찬가지. 파월 국군 장병의 면회소가 설치된 여의도 비행장(지금의 여의도 광장)에 가려면 나룻배로 건너야 했다. 살 만한 땅과 집은 많지 않고 인구는 계속 늘어나 변두리 산꼭대기까지 판자촌으로 덮여가던 1967년 9월 22일, 서울시가 한강 개발 3개년 계획을 내놓았다. 골자는 고층 신도시로서 여의도 개발과 총연장 74㎞의 강변 도로 건설.
국가 예산의 23%에 해당되는 462억 6,400만 원의 공사비를 투입한다는 서울시의 청사진은 거창한 것이었으나 당초 여의도 개발을 의뢰받았던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20년 계획, 공사비 1,000억 원 투입 방안보다는 규모가 작아졌다. 강남·북 강변 도로망의 완공도 5공 정권에서야 이루어졌다.
한강 개발은 서울의 본격적인 팽창과 강남 부동산 신화를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여의도 시범아파트의 청약 열풍으로 시작된 재산 증식 수단으로서 아파트에 대한 관심은 강변 도로 건설 과정에서 생긴 공유수면 매립지에 건설된 동부이촌동과 반포, 잠실로 번져나갔다. 동일계 진학 허용으로 명문대 합격률이 높았던 여의도의 교육 열기도 고스란히 강남으로 옮겨졌다. 매립지를 불하받은 재벌들은 막대한 부를 쌓았다.
'한강 르네상스'라는 이름의 새로운 개발에서는 누가 돈을 벌까. 초기 한강 개발을 기획했던 건축가들이 아쉽게 생각하는 자연친화적 개발이 이루어지고 시민들의 강변 접근이 보다 용이해졌으면 좋겠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역사 일반과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
백과사전 본문 인쇄하기 레이어
[Daum백과] 강남 부동산 신화 시작의 신호탄 – 99%의 롤모델, 권홍우, 인물과사상사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