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99%의 롤
모델

바티스트 세이

공급은 스스로 수요를 창출한다

장 바티스트 세이

ⓒ 인물과사상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프랑스 최초의 경제학 교수, 보험사 직원이자 혁명전사, 잡지 편집장. 나폴레옹의 노여움을 샀던 학자이며 기업가. 세이(Jean-Baptiste Say)의 이력이다. '공급은 스스로 수요를 창출한다'는 세이의 법칙(판로설販路說)의 주인공.

근대 경제학의 기본으로 군림했던 판로설은 대공황 직후 케인스의 유효수요 이론에 밀렸지만 위력은 여전하다. 레이거노믹스(미국 레이건 대통령의 경제 정책)의 이론적 원천이기도 하다. '기업가(entrepreneur)'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도 세이다. 1767년 1월 5일, 프랑스 리옹에서 태어난 그의 당초 인생 항로는 상인. 사회의 비주류인 위그노(신교도) 집안 태생이어서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다. 첫 직장인 보험 회사에서 그는 인생의 전기를 맞는다. 훗날 프랑스 재무장관에 오른 클라비에 사장의 권유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읽은 후 경제학의 바다에 빠져든 것이다.

1789년 발생한 대혁명은 22세의 청년을 흥분시켰다. 시민 군대의 척후병으로 활동했던 세이는 자코뱅당과 나폴레옹의 독재에 군복을 벗고 자유주의자 클럽이 발행하는 철학 잡지의 편집장으로 변신한다. 6년간의 편집장 경험은 1803년 명저 《정치경제학요론(Traité d'éonomie politique)》을 낳기도 했다.

미국 3대 대통령 제임스 메디슨이 '사상 최고의 경제서'라고 극찬한 이 책자를 프랑스는 금서로 묶었다. 경제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는 이유에서다. 항로를 바꿔 영국의 최신 기술을 적용한 섬유 사업을 벌인 세이가 큰돈을 만질 무렵 나폴레옹이 실각하고 세이의 학문도 되살아났다.

아테네대학에서 교직을 시작한 세이는 프랑스 종합예술학교를 거쳐 파리대학 최초의 경제학 교수로 안착, 여생을 보내다 1832년 사망했다. 후손들도 학자의 길을 걸었다. 보불전쟁 패배로 막대한 배상금에 허덕이던 프랑스를 재정 위기에서 구해낸 명(名)재무장관 레온이 그의 친손자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권홍우 집필자 소개

영문학과 경제학을 공부했다. 「서울경제신문」 경제부 기자, 증권부 차장으로 일하며 한국기자협회 ‘이 달의 기자상’(2회)과 백상기자대상을 받았다.

출처

99%의 롤모델
99%의 롤모델 | 저자권홍우 | cp명인물과사상사 전체항목 도서 소개

시간과 공간적 맥락에 따라 인간의 삶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지만,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일관적으로 목격되는 경향이 존재한다. 세계사를 수놓은 365가지의 장면과 인물을..펼쳐보기

TOP으로 이동
태그 더 보기
역사 일반

역사 일반과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



[Daum백과] 장 바티스트 세이99%의 롤모델, 권홍우, 인물과사상사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