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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56년 05월 0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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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39년 09월 23일 |
감상하기보다 분석해야 한다
러시아에서 자라난 트로츠키와 옘마는 생활이 힘들 정도로 차별과 박해를 당하는 유대인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렇기에 기존 사회 자체를 부수어버리는 혁명을 일찍부터 꿈꾸게 되었으리라. 반면 세기말의 오스트리아에서는 유대인의 사정이 한결 나았다. 노력하면 부자가 되거나 시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사소한 신상 차이가 괴롭힘의 빌미가 되기 쉬운 획일적 집단, 가령 학교나 군대, 관공서 같은 곳에서는 역시 유대인의 피를 받았다는 사실이 뼈에 사무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프로이트도 그런 경우여서, 김나지움의 학우들에게 당한 설움은 평생 ‘나는 유대인이다’라는 자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했다. 어느 정도는 이 때문에 어릴 적 꿈인 정치인-공무원을 포기하고 한때 사회주의에 물들었다가, 결국 전문직업인(의사)이자 지식 권력의 소유자(학자)를 지향한 프로이트였다. 또한 프로이트는 자신이 정신분석의 길을 걷게 된 특별한 경험으로 3세 때 어머니의 나체를 우연히 본 일을 내세우지만, 그보다는 11세 때 아버지에게서 “예전에는 이 나라에서도 반유대주의가 심각했단다. 내가 젊었을 때 길을 가는데, 웬 기독교인 남자가 다짜고짜 나를 유대 놈이라고 욕하더니 모자를 빼앗아 진흙구덩이에 던져버렸단다”라는 이야기를 들은 경험이 더 중요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어린 프로이트는 그런 모욕을 당하고도 한마디 항의도 못한 채 진흙탕에서 모자를 집어올리고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는 아버지의 말에 정신을 잃을 듯한 분노와 굴욕감을 느꼈다. 프로이트는 나중에 이런 설명을 한다. “아들은 어릴 때 아버지에게서 완벽한 남자, 뛰어넘을 수 없는 존경과 경외의 대상을 본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아버지의 약한 모습과 평범함을 깨닫게 되고, 아버지와 자신을 분리해 독립된 인격체로 성숙해간다.” 하지만 프로이트에게 아버지의 ‘약한 모습’은 민족적인 곤경과 결부되어 있었다. 그는 성인이 된 다음 유대교의 율법을 버리고 아예 무신론자가 되었으며, 독실한 유대인 가정 출신이던 아내 마르타에게 “내 집에서 유대교 의식은 절대로 안 돼”라고 강요할 만큼 조상 대대로 내려온 전통에 적대감을 표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유대민족은 지겹도록 편견과 박해에 시달리는 민족이었고, 그런 민족의 구원과 해방을 위해 싸우고 싶다는 염원을 마음 한편에 늘 간직하고 있었다.
프로이트가 26세 때 마르타와 열렬한 연애를 시작하면서 그녀의 사진을 방에 걸어두었을 때, 이미 방에는 알렉산드로스(Alexandros), 한니발(Hannibal), 소포클레스(Sophocles),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의 사진이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부왕 필리포스 2세를 시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었고, 한편으로 소국의 젊은 지도자로서 노대국(老大國) 페르시아를 정복했다. 프로이트가 어릴 때부터 가장 좋아했다는 한니발은 조국 카르타고를 압박하는 로마의 심장부로 당당히 쳐들어가 로마인의 혼을 빼놓았다. 크롬웰은 청교도혁명으로 찰스 1세의 목을 베어버린 사람이다(프로이트는 자신의 둘째 아들에게 올리버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오이디푸스 왕』의 작가 소포클레스. 당시는 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이론적으로 정립하기 훨씬 전이었지만, 아버지를 살해한 영웅 이야기를 그려낸 이 고전 작가는 그가 가장 중시하는 옛 인물이었다. 프로이트에게 아버지를 없애는 일과 압제자에게 저항하고 강자를 거꾸러뜨리는 일은 뚜렷이 구분되지 않았다(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하지만 강대국을 정복하고 민족을 해방하는 일은 영웅의 위업인 반면, 부친 살해는 가장 흉악한 범죄다. 프로이트는 왜 영웅의 길보다 개인의 범죄에, 문명의 가장 음습한 면에 힘을 기울였는가? 스스로 정치가나 군인이 되기에는 기질이 맞지 않는다고 판단해서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김나지움을 최우등으로 졸업하기 직전까지 가져왔던 법관의 꿈을 갑자기 버리고 의대에 진학하는데, 왜 그랬는지는 별로 설명이 없다. 그러면서도 적어도 20대 후반까지 영웅들의 사진을 늘 곁에 두고 지냈다. 그리고 일생동안 권력 지향적이었다. 부인에게 유대교 신앙을 버리도록 강요했을 뿐 아니라, 한때 자신을 추종하다가 다른 입장을 세운 아들러나 융, 랑크 등을 결코 용서하지 않는 냉혹한 면모가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온화한 현인의 풍모 속에 감추어져 있었다(확실하지는 않지만, 딸 안나를 떠나보내지 않기 위해 그녀의 혼삿길도 막았던 것 같다). 그는 전화를 싫어했는데, 안나의 설명에 따르면 누구에게나 위압감을 주는 자신의 날카로운 눈빛을 전화상으로는 전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가 학자의 좁은 서재와 진료실의 낡은 소파를 택한 까닭은? 그곳에서 더 강력한 권력을 발견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타인은 지극히 내밀한 존재다. 권력자라고 해도, 역사에 흠집을 남길 만한 폭군이 아니라면 가족도 노예도 아닌 자의 몸을 마음대로 볼 수 없다. 그러나 의사는 어떤가? 숱한 타인의 몸을 안팎으로 속속들이 헤집어볼 수 있다. 예술가는 피상적인 이미지에 몰입해서 미의 영감을 얻을 뿐이지만, 애인의 몸을 더듬으면서도 “여기는 견갑골”, “이 부분은 3번 요골”이라고 되뇐다는 의사는 냉정한 분석자의 시선으로 타인의 아름다움과 추함을 관찰할 수 있다(프로이트는 ‘나는 예술을 사랑하지만 단순히 감상하기보다는 분석해야 한다. 분석하지 않는 감상은 내게 의미가 없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타인의 육체가 아닌 정신은? 과학이 최고조로 발전했다고 여겨지던 당시에도 마음은 여전히 ‘테라 인코그니타(terra incognita)(미지의 세계)’였다. 아무도 발걸음을 디딘 적 없는 땅을 밟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로알 아문센(Roald Amundsen)의 희열을 프로이트는 진료실의 의자에 편안히 앉아서 누릴 수 있었다. 프로이트는 “심리학 서적보다 고고학 서적을 많이 읽었다”라고 말할 만큼 고고학에 심취했고, 여가를 보내는 취미는 추리소설 읽기였다고 한다. 반쯤 부서지고 닳아 없어진 고대의 비석에 달라붙어 해독하는 고고학자, 용의자의 진술을 듣다가 범죄의 단서를 알아채고 회심의 미소와 함께 “모든 수수께끼는 풀렸다!”라고 외치는 명탐정처럼, 프로이트는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늘어놓는 낯선 사람들의 마음을 괴롭히는 원인을 분석하고 치료에 성공할 때마다 한 사람의 독립된 인격을 파헤치고 들어가, 그가 남들 앞에 내세우는 꾸며진 모습을 걷어내고는 ‘이 사람은 ……이다!’라고 진료 기록에 휘갈겨 쓰며 더없는 만족감과 영광을 맛보았다.
마음속의 신대륙을 찾아
수많은 사람이 은밀한 사연을 자기 앞에서 털어놓을 뿐 아니라, 마음 문제의 핵심에 성(性)이 있음을 발견하면서 정복자 프로이트의 영광은 더욱 빛날 수 있었다. 당당한 권력자나 부자, 천재, 미인이 우울증에 빠지고 자살을 고민할 정도로 괴로워하는 원인이 성 문제에 있었다니?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에서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의 꿈 이야기를 읽고 분석한다. 꿈에 알프스 산맥을 말을 타고 건너는데 거대한 바위가 앞을 가로막았다. 비스마르크가 채찍으로 갈기자 바위가 거짓말처럼 둘로 쪼개지고, 반대편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놓고 프로이트는 ‘채찍은 남근을 상징한다. 채찍에 맞아 쪼개지는 바위는 성교의 성공이다. 비스마르크는 무의식중에 성욕을 충족하고자, 외형적으로 이렇게 장엄한 꿈을 꾼 것이다’라고 풀이했다. 독일을 통일하고 근대 독일 자체를 혼자 힘으로 만들어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닌 대정치가, 철혈(鐵血)의 수상도 그에게는 노년의 발기부전을 고민하는 평범한 남자에 지나지 않는다. 프로이트는 인간은 교황이든 성녀든, 심지어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조차도 리비도(libido)의 노예이며 모든 인간 행동의 근본에는 성욕이 있다고 함으로써 숱한 위인을 ‘정복’했을 뿐 아니라 인류 문명까지 정복했다.
′범성욕설’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런 이론을 프로이트는 1893년, 37세 때 처음 정립하기 시작했지만 그의 전적인 창안이라기보다 장 샤르코(Jean Charcot)를 비롯한 여러 사람의 영향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프로이트처럼 대담하고 체계적으로 이론화하지는 못했다. 계속해서 그는 1896년에 ‘정신분석’이라는 용어를 처음 썼으며, 1897년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정립, 1899년에 『꿈의 해석』을 출간했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이름이 처음부터 세계를 놀라게 하지는 않았다. 『꿈의 해석』 초판은 1년 동안 겨우 100여 부가 팔렸을 뿐이다(오늘날 이 책과 대등한 무게를 가진 혁신적 저작으로 평가받는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의 『종의 기원』은 출간 하루 만에 1,250부가 판매되었다). 동료 연구자들은 그의 이론을 근거가 희박한 문학 같다고 여겼고(그런 비판은 오늘날에도 꾸준하다), 그가 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질겁해서 오래 묵은 교류를 끊어버리는 사람마저 있었다. 프로이트는 40대 중반의 나이에 겨우 그에게 공감하는 사람들을 찾아내 ‘수요심리학회’를 결성, 아들러나 빌헬름 슈테켈(Wilhelm Stekel) 등 몇몇 학자와 학문적 동아리를 만들지만 대부분 유대인이자 학계의 비주류였다. 천재의 일반적 특징이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내는 것이라지만, 그는 1902년 46세가 되어서야 겨우 객원교수직을, 그것도 그의 ‘열성 팬’인 페르스텔 남작부인의 로비 덕분에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막 시작된 20세기가 한 해씩 지나갈수록, 프로이트의 명성과 영향력은 착실히 커져갔다. 1908년에는 수요심리학회를 ‘빈 정신분석협회’로 발전시킬 수 있었고, 잘츠부르크에서 제1회 국제 정신분석가 대회가 열렸다. 1909년에는 그에게 명예 법학박사를 준 미국의 클라크 대학을 방문해 처음으로 해외에서 정신분석을 강의했다. 이듬해에는 국제정신분석협회가 수립되었고(프로이트는 후계자로 점찍고 있던 융에게 협회장을 맡겼다), 1911년에는 미국에 정신분석협회가 세워졌다. 1912년에는 정신분석 잡지 『이마고』를 창간했고, 같은 해에 니체와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의 연인이던 ‘세기말의 여신’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Lou Andreas-Salomé)와 친분을 맺기 시작했다.
어째서 프로이트와 정신분석학이 이름을 떨칠 수 있었는가? ‘모든 인간행동의 근본에는 성욕이 있다’는 그의 주장이 ‘신은 죽었다‘, ‘인간은 원숭이의 후손이다’처럼 기존의 권위와 관념 질서를 쇠망치로 후려치듯 파괴하는 것이었기에, 격렬한 반발과 함께 센세이션도 폭발적으로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한편으로 열렬한 지지자들과 멋도 모르고 유행처럼 추종하는 무리(프로이트는 “이른바 정신분석학자라는 이름을 내세우는 사기꾼들이 ‘마음의 병을 치료하려면 마음껏 섹스를 하면 된다’고들 한다”라며 분개했다)도 양산했다. 또한 프로이트가 학문 연구에 힘쓰는 한편 임상 치료에서 손을 떼지 않았기에, 그의 치료를 받고 묵은 응어리가 풀렸다는 유명 인사들이 정신분석의 전도사가 된 점도 있었다.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 프로이트 이론은 인류의 정신사에 지워질 수 없는 새로운 발자국을 남겼다. 무의식이라고 하는 신대륙의 발견과, 그에 따라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다’라는 깨달음이다. 광기에 대한 철학이나 정치 이론은 옛날에도 많았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은 우리가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무의식에 따라 움직이며, 따라서 어떤 점에서는 모두 미친 것과 같다는 판결을 내렸다. 나중에 프로이트 이론을 계승·발전시켜 철학 체계를 구축한 자크 라캉(Jaques Lacan)은 이를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라고 풀이했다. 왜 인간은 누구나 부러워할 재산과 지위를 가지고도 자살하는가? 왜 애써 쌓아올린 문명을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드는 전쟁을 벌이는가? 이미 신을 믿을 수 없게 되었으면서 왜 새로운 미신에 빠져드는가? 프로이트는 모든 것이 우연한 경험에 따라, 무의식에 새겨진 도표에 따라 움직인 결과라고 밝혀주었다. 그래서 오늘날 리비도 이론이나 욕망충족 이론 등이 의심받거나 부정되는 경향이 있음에도, 인간의 심층에 무의식이 존재하며 인간은 그 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는 명제를 대부분의 심리학자, 인류학자, 철학자, 사회학자 등이 프로이트에게 빚지고 있는 것이다.
문명 속의 불만
프로이트의 50대는 인생에서 가장 활기차고 성공적인 때였다. 하지만 그가 밝혀낸 모든 영광 뒤의 그림자처럼, 프로이트의 영광에도 그림자가 따랐다. 1911년에는 아들러가, 1914년에는 융이 프로이트와 결별했다. 특히 융은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비유대인 정신분석가로서 프로이트가 일찌감치 후계자로 낙점했으며 ‘정신적인 아들’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상처가 컸다. 아들러도 융도 프로이트의 그런 ‘개인적인 집착’과 가부장적 태도에 환멸을 느끼기도 했지만, 프로이트가 지나치게 개인 심리의 영역에만 머무르려 한다는 점을 끝내 납득하지 못했기에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아들러는 사회주의적인 정치변혁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고, 융은 개인의 심리를 넘어선 ‘집단무의식’에 이끌렸다. 그들은 프로이트와는 달리 성욕만이 인간 행동의 원동력이라고 보지 않고, 권력욕이나 명예욕, 인생을 완성해 더 높은 자아로 승화하고 싶은 욕망 등이 인간을 이끌어간다고 보기도 했다.
프로이트는 분명 개인사를 파헤치고, 두개골 속에 숨겨진 비밀을 캐내는 데만 전력을 다했다. 그는 사회주의를 불신했으며 민주주의를 혐오했다. 그렇다고 왕정복고를 꿈꾸는 보수주의자는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그에게 가장 잘 맞는 정치 이념은 세기말 빈에서 꽃핀 자유주의였지만, 그는 자유주의의 그림자 속에서 차별받는 유대인을 직접 보고 느낀 사람이었다. 결국 어떤 정치 이념도 흥미롭지 않았으며, 사회를 변혁하기보다는 해석하는 것이 그의 관심사였다.
그래도 20세기 초의 유럽인을 정신없이 취하게 만든 민족주의에는 그도 초연하지 못했던 것 같다. 적어도 한때는 말이다. 1914년에 사라예보에서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가 암살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프로이트는 “어느 때보다도 내가 게르만인임을 느낀다”라면서 적국이 된 프랑스, 영국의 친구들과 거리를 두려고 했다. 하지만 전쟁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참담한 몰락을 가져왔고, 프로이트는 다른 ‘게르만인’과 마찬가지로 상상을 초월하는 경제난에 부딪혀 고된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런 와중에 당시 전쟁보다도 더 많이 유럽인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있던 스페인 독감에 걸린 둘째 딸 조피가 죽고, 그도 구강암에 걸리고 말았다. 이런 개인적, 사회적인 암울함 속에서 그의 이론도 변화를 겪었다. 리비도만 내세웠던 그는 이제 사람을 움직이는 원동력에는 삶과 일과 사랑을 부추기는 ‘에로스’만이 아니라 죽음과 파괴와 고립을 바라는 ‘타나토스’도 있다고 생각했다. 고대 그리스의 죽음의 신, 타나토스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저 찬란했던 문명을 몇 년 만에 황무지로 만들어버린 전쟁을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또 한 인간의 심리는 의식과 무의식만으로 구성되지 않고, 동물적 충동인 ‘이드’와 신적인 절제 의식인 ‘초자아’가 ‘자아’를 치받고 누르는 세력 구도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초자아가 이드의 충동을 누르지 못하면, 세상은 사람 탈을 쓴 짐승들이 날뛰게 된다. 반대로 초자아가 너무 강력하게 통제하면, 인간성이 질식해버리는 무자비한 압제 체제가 출현한다. ‘좋았던 옛 시절’을 백일몽으로 돌려버린 전쟁과 대공황은 정치에 무관심했던 프로이트에게 정치적·사회적 변동을 심리학적으로 설명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한 것이다. 프로이트는 1930년에 『문명 속의 불만』을 펴내, 초자아가 강화됨으로써 인간의 욕망을 억제하는 문명이 이룩되지만 이는 이드에 대한 과도한 억압을 초래, 결국 불만에 찬 이드에 의해 문명 파괴가 일어난다고 정신분석학적 사회심리학을 정리했다.
지친 발걸음을 멈추다
급격한 정치 변동은 프로이트의 목을 죄는 데까지 치닫고 있었다. 1933년 집권한 히틀러는 반유대주의를 공공연히 외칠 뿐 아니라 국가의 가장 중요한 정책으로 내세웠다. 그해 5월에는 베를린 광장에서 여러 유대인 작가의 저서와, 나치가 싫어하는 작가의 저서가 불태워지는 행사가 열렸다. 마르크스, 트로츠키, 토마스 만(Thomas Mann), 에리히 레마르크(Erich Remarque), 헬렌 켈러(Helen Keller) 등이 쓴 책들과 더불어 프로이트의 책들, 그리고 『이마고』 잡지가 “인간의 동물적 본능을 수치스럽게 확대하는 행위를 반대하자! 인간 영혼의 고귀함을 위해!”라는 구호와 함께 불더미 속에 던져졌다. 그리고 우레와 같은 “하일 히틀러(Heil Hitler)!” 소리 속에 지지직거리며 재가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프로이트는 “그래도 다행이야. 옛날에는 사람을 태웠는데 이제는 책만 태우고 있으니”라고 농담을 했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불과 몇 년 뒤에 사람도 태우게 되리라는 것을.
5년 뒤에 마침내 오스트리아가 나치 독일에 합병되자, 82세가 되어 노쇠와 병마 때문에 지친 프로이트는 완전한 절망에 빠졌다. 이미 정신분석협회 회원을 포함한 유대인들이 오스트리아를 잇달아 빠져나가고 있었지만 프로이트는 끝까지 남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야만스러운 적에게 굴복할 수 없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다고 나치에 반대하는 성명을 내거나 시위에 나서지는 않았다. 그리고 프로이트 쪽의 기록에 따른 ‘나치의 박해’ 이야기에서는, 훗날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법정에서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을 보며 맡았던, 영혼이 사라진 꼭두각시가 풍기는 악의 냄새는 잘 느껴지지 않는다. 나치당원들은 프로이트의 집을 급습해 얼마 안 되는 돈을 갈취했고, 늙은 프로이트가 모습을 보이자 ‘그 눈빛에 기가 꺾여’ 달아났으며, 프로이트를 대신해 안나가 게슈타포에 연행되었지만 몇 시간만에 아무 일 없이 풀려났다. 나치는 결국 프로이트가 빈을 떠날 때 ‘우리가 당신을 푸대접해서 떠나는 게 아니라고 증언해달라’는 부탁을 남겼다. 프로이트 같은 유명 인사를 함부로 대하기 어렵다는 상부의 판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프로이트가 자신의 기록에 일부 ‘억압’을 가한 것일까?
마침내 1938년 6월, 프로이트는 3세 때 출생지인 모라비아에서 이사한 뒤로 무려 80년이나 살아온 빈을 떠나 영국으로 향했다. “나도 결국 ‘방랑하는 유대인’이었네. 이제 새로 머물 곳을 찾아가야지.” 그의 오랜 동료이자 측근이던 영국인 어니스트 존스(Ernest Jones)에게 보낸 편지였다. 영국에서 프로이트는 기대 이상의 환영을 받았다. 가장 감격스러웠던 일은 영국왕립학회가 『명예의 책』에 그의 이름을 써넣게 해준 일이었다.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다윈과 같은 반열에 들게 된 그는 인생 최고의 영예라고 기꺼워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1년도 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도 느꼈던지, 자신의 늙은 육체를 좀먹어가는 병에 신음하면서도 오랫동안 다듬어왔던 『인간 모세와 유일신교』를 손질해 펴냈다. 이 책에서 프로이트는 자신을 모세와 동일시하는데, 그가 젊은 시절 부오나로티 미켈란젤로(Buonarroti Michelangelo)의 위풍당당한 모세상을 보았을 때 느낀 것처럼 모세는 신앙의 사도라기보다 ‘낡은 신앙의 파괴자’였다. 프로이트도 위선적인 기독교 질서의 기반을 파괴했으며, 모세가 파라오에게(그리고 우상숭배를 버리지 못한 히브리인들에게) 쫓겼듯 새로운 신에 목말라 있던 나치에게 쫓긴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미켈란젤로의 모세상에서 또 다른 특징을 찾아냈다. 『성서』의 묘사와는 달리 모세는 우상숭배로 날뛰는 히브리인들을 노한 얼굴로 바라보기만 할 뿐, 십계명 돌판을 들어 깨부수지는 않는 모습이다. 프로이트는 나치에 반대했지만 정면으로 투쟁하지는 않았다. 그의 초자아와 자아는 바람직한 안정 상태여서, 이드의 투쟁 욕구에 사로잡혀 격한 행동으로 치닫지는 않았던 것이다. 단지 광란자들을 경멸하고, 냉정히 분석하며, 잘못을 공표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여기서 프로이트는 자신도 모르게 어린 시절의 아버지와 화해한다. 반유대주의자의 모욕에 거칠게 저항하지 않았던 아버지. 어린 프로이트는 그런 아버지가 불만스러웠으며 한니발이나 알렉산드로스를 꿈꾸었다. 그러나 이제 인생의 막바지에 이른 그는 비굴하지도 경솔하지도 않은 선지자 모세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아버지와도 동일시함으로써 마침내 정복자의 몽상을 승화했던 것이다.
그랬다. 아직 미완의 저작이 남아 있었지만, 프로이트는 삶의 목표를 다 이루었다. 1939년 9월 23일, 히틀러가 세계대전을 일으켜 다시 한 번 문명을 철저히 파괴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은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그는 지긋지긋한 암을 견디는 일이 더 이상 무의미하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전에 정했던 대로, 오랜 친구이자 의사인 막스 슈어(Max Schur)에게 최후의 부탁을 했다. 안락사를.
프로이트는 이집트인이던 모세가 히브리인을 이집트에서 탈출시켰지만, 히브리인들에게 배반당해 살해당했다고 상상했다. 모세와 마찬가지로 프로이트도 ‘약속의 땅’으로 사람들을 인도하지만 그곳에서 살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과학자라고 생각했지만, 오늘날에는 그런 평가를 거의 받지 못한다. 그의 인기는 자연과학 쪽보다는 인문학과 예술 쪽에 많다. 꿈은 욕망이나 상징보다는 생리적 물질대사와 정보처리 차원에서 이해되는 것이 대세다. 그러나 프로이트가 아니었다면, 누가 자기 마음속에 도사린 괴물을 꿰뚫어볼 수 있었을 것인가. 프로이트가 아니었다면, 누가 오랜 세월 켜켜이 쌓인 관행과 인습의 먼지를 씻어내고 문명의 속살을 드러냈을 것인가. 오늘날 누가 프로이트를 무시하고, 이성과 계획만으로 이상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큰소리칠 수 있는가. 우리는 아직도 그가 찾아낸 세상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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