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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왕후 김씨

다른 표기 언어 明聖王后 金氏 동의어 현렬희인정헌문덕명성왕후, 顯烈禧仁貞獻文德明聖王后

요약 조선의 제18대 국왕 현종의 정비 명성왕후 김씨는 아들 숙종이 보위에 오른 뒤 홍수의 변을 조장하여 남인과 가까운 인평대군의 세 아들을 공격하는 등 적극적으로 정사에 간여하여 물의를 일으켰다. 경신환국 이후 남인의 미인계로 입궁한 장옥정을 대궐에서 쫓아내기도 했다.

조선에는 역대 37명의 왕비가 있었는데 어린 나이에 왕세자빈으로 가례를 치르고, 남편인 왕세자가 왕위를 계승하여 왕비가 되었으며, 왕이 승하한 뒤 자신의 친아들이 즉위하여 대비까지 오른 왕비는 명성왕후 김씨가 유일하다.

그녀의 남편 현종은 조선의 국왕 가운데 후궁을 두지 않은 유일한 임금이었다. 한번은 자의대비 조씨가 현종을 위해 역관 최우의 딸을 후궁으로 간택했지만 영의정 정태화가 최우의 딸이 다른 사람과 정혼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자 간택을 취소했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면서 명성왕후는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렸을 것이다.

현종의 뒤를 이어 아들 숙종이 즉위하자 명성왕후 김씨는 사촌 김석주와 손잡고 적극적으로 국사에 간여하여 조정에 파란을 일으켰다. 한편으로는 장옥정을 쫓아냄으로써 숙종에게 미인계를 펼치려던 남인의 음모를 저지하기도 했다. 효성이 지극했지만 영민했던 숙종은 그런 어머니의 뜻에 순종하는 척하면서도 뛰어난 임기응변을 통해 조선을 안정시켰다.

조선의 왕후들이 대개 그렇듯이 명성왕후 김씨는 아들에게 모든 정성을 쏟았고, 가문의 영광을 지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던 양반가의 여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짧은 여정은 정사에 외척의 발호를 배제해야 한다는 뼈저린 교훈을 안겨주었을 뿐이다.

예송의 여파, 왕세자의 관례식까지 미치다

명성왕후 김씨는 1642년(인조 20년) 5월 17일 영돈녕부사 청풍부원군 김우명과 부인 송씨의 딸로 태어났다. 10세 때인 1651년(효종 2년) 11월, 한 살 연상인 현종과 혼인하여 세자빈이 되었고, 1659년(효종 10년) 현종이 보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다. 1661년(현종 2년) 8월 15일 경복궁 회상전에서 원자 이순을 낳았고, 이후 명선 ・ 명혜 ・ 명안 등 3명의 공주를 더 얻었다.

그녀의 남편 현종은 즉위 초기부터 남인과 서인의 예송(禮訟)에 발목이 잡혔다. 부왕 효종의 상중에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얼마 동안 입어야 하는가 하는 의례절차로 인해 두 당파가 결사적인 논쟁을 벌였던 것이다.

당시 서인은 효종이 차남이므로 1년 동안 상복을 입는 기년상을 주장했고, 남인은 효종이 차남이지만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장남이나 다름없다며 3년상을 주장했다. 이 논쟁은 서인의 승리로 귀결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질려버린 현종은 또 다시 복상문제를 거론하는 자는 엄벌에 처하겠다고 선언했다.

1667년(현종 8년) 정월, 왕자 이순이 7세의 나이로 왕세자에 책봉되었고, 10세가 되는 1670년(현종 11년) 관례가 예정되었다. 그런데 송준길의 제의에 따라 이듬해 1월로 관례가 연기되었다가 세자의 사부인 송시열과 송준길이 상경하지 않은 탓에 3월로 재차 연기되었다. 세자의 관례는 국가대사였지만 남인 중신들이 예식을 주도하자 서인들이 딴죽을 걸었던 것이다.

이에 분개한 현종은 김석주를 배후조종하여 송시열의 심복이었던 전라감사 김징에게 사소한 트집을 잡아 황해도로 귀양 보내고 그를 비호하던 서인 관리들을 조정에서 쫓아냈다. 이어서 관례식의 주재자로 남인이었던 좌의정 허적을 임명하고 1671년(현종 12년) 3월 9일 인정전에서 의례를 치렀다. 그러나 송시열은 끝내 식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거기에는 현종이 즉위 2년 만에 왕자 이순을 낳았다는 점, 곧 선왕의 상중에 예를 어기고 아기를 가졌다는 비판의식이 개재되어 있었다. 그로 인해 현종은 깊은 모멸감을 느꼈고, 명성왕후 김씨와 세자 역시 송시열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되었다.

대기근과 당쟁, 지쳐버린 현종

현종 즉위년부터 전국에 기근과 역병이 창궐하여 백성들이 고통을 겪었다. 산야에서는 유랑민들이 떼를 지어 다녔고 길가에는 굶어죽은 시신들이 즐비했다. 그런 가운데 1670년(현종 11년) 경술년부터 1671년(현종 12년) 신해년까지 사상 최악의 경신대기근이 일어났다.

1670년 1월부터 충청도에서 시작된 전염병이 전국으로 번졌고, 2월부터는 눈과 우박, 서리 등이 합세하여 전국을 초토화시켰다. 경기도에서는 교하 등 9개 읍에서 메뚜기 떼가 나타나 곡식들을 갉아먹었고, 6월에는 태풍이 불어 닥쳐 논밭을 뒤엎었다.

그처럼 한해 ・ 수해 ・ 냉해 ・ 풍해 ・ 충해라는 다섯 가지 악재가 일시에 몰려들어 조선 팔도를 쑥대밭으로 만들자 굶주린 백성들이 산야를 떠돌고 도둑과 강도가 도처에서 출몰했다. 들판에 남아있는 쭉정이는 부랑자들이 긁어갔고, 방목하던 소와 말은 한 마리도 살아남지 못했다.

한겨울 동장군이 몰려오자 죄수들이 감방에서 얼어 죽는 참사가 발생했고, 민간에서는 무덤에서 관을 파내 수의까지 훔쳐갔다. 조정에서 군사훈련을 중지하고 상평청과 진휼청을 총동원하여 백성들을 구제했지만 난국은 수습되지 않았다. 강화도와 남한산성의 비축미도 떨어지고 백관들에게 줄 녹봉도 바닥났으며 영남에서는 역졸들이 굶어죽을 지경이라며 비명을 질렀다. 바야흐로 벼슬이 낮은 신하는 태반이 굶주렸고, 각사의 하급관원들은 허기 때문에 임무를 수행하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참혹한 대기근의 여파는 1672년(현종 13년)까지 3년 동안 이어졌다. 그로 인해 당시 조선 인구 5백만 명 가운데 무려 1백여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1669년(현종 10년) 12월 29일 집계한 조선의 인구는 총 516만 4천 5백 24명이었다. 그런데 경신대기근을 겪고 난 1672년(현종 13년) 10월 30일 한성부에서 보고한 조선의 인구는 제주도를 합쳐 472만 5천 1백 89명이었다. 공식적으로만 43만 9천 3백 35명이 줄어든 것이다.

극심한 재해가 어느 정도 소강상태에 접어든 1673년(현종 14년) 5월, 현종은 여름이 되었는데도 달포 동안 비가 오지 않으니 조바심이 나서 오장이 불타는 것 같다며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자책했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도 신료들은 당파의 이익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1674년(현종 15년) 2월 효종의 후비인 인선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한동안 수면 아래 잠겨있던 예송문제가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이번에도 시어머니인 자의대비가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에 대한 무의미한 논쟁이었다. 서인 측은 효종이 차남인 점을 고려하여 9개월 동안 상복을 입는 대공설을 주장했고, 남인 측은 인선왕후가 인조의 둘째며느리이지만 중전을 지냈으므로 큰며느리나 마찬가지니 1년 동안 상복을 입는 기년설을 주장했다. 이때 현종은 장인 김우명과 조카 김석주의 의견을 받아들여 남인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현종은 참혹한 재난과 치열한 당쟁에 넌더리가 났던지 갑자기 병석에 눕더니 8월 18일 34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졸지에 과부가 된 명성왕후 김씨는 앞날이 캄캄했다. 이제 자신이 기댈 사람은 아들 숙종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집착이 된 김씨의 아들 사랑은 훗날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는 결과로 이어진다.

삼복의 변, 적극적으로 정사에 간여하다

1674년(숙종 즉위년) 8월 23일, 14세의 성종이 조선의 제19대 국왕으로 즉위했다. 당시 서인들은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명성대비 김씨를 배경으로 권력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커다란 착각이었다. 이후 숙종은 교묘한 환국정치를 통해 왕권을 획기적으로 강화했던 것이다.

숙종의 치세 초반은 외척 청풍 김씨의 시대였다. 특히 김육의 손자 김석주는 숙종을 도와 왕권 확립을 위해 남인과 서인들을 쥐락펴락하면서 위세를 과시했다. 그는 숙종의 즉위 초기에 남인을 측면 지원하여 서인의 영수 송시열을 퇴진시켰을 뿐만 아니라, 명성대비 김씨와 함께 이른바 삼복(三福)으로 불리던 인평대군의 세 아들 복창군 이정, 복선군 이남, 복평군 이연을 비롯하여 남인 정권의 실세였던 그들의 외가 동복 오씨를 집중 공략했다.

당시 명성대비 김씨는 숙종의 나이가 어린 탓에 언제라도 남인들이 동복 오씨와 손잡고 삼복 중에 한 사람을 옹립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때문에 그녀는 끼니때마다 숙종의 수라를 일일이 점검할 정도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1675년(숙종 1년) 3월 숙종의 외조부인 청풍부원군 김우명은 삼복이 임금의 총애를 믿고 궁녀와 간통했으니 엄벌에 처하라고 상주했다. 궁녀들은 15세가 되어 관례를 치를 때 형식적으로나마 왕과의 혼례도 치른다. 그처럼 왕의 여인으로 공인되어 있는 궁녀와의 간통은 사대부는 물론 종친들까지도 중죄로 다스려졌다.

그로 인해 간통 혐의를 받은 복창군과 복평군, 나인 상엽과 귀례가 신속하게 체포되어 하옥되었다. 하지만 숙종이 허목과 윤휴의 항의에 따라 전후사정을 알아보니 무고임이 분명했으므로 그들을 모두 석방했다. 이제 무고를 일삼은 김우명이 도리어 처벌받을 차례였다. 이윽고 숙종이 편전에서 허적과 권대운 등과 함께 김우명의 처벌을 논의하고 있는데 갑자기 명성대비 김씨가 나타나 울면서 말했다.

인용문
홍수(紅袖)의 변은 선왕과 내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이오. 그때 주상은 어려서 이를 알지 못했소. 내가 대궐의 기강이 해이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부친에게 고해 상소하게 했는데 어찌하여 주상은 내 말을 옳게 여기지 않고 일을 애매하게 처리하려 하시오?

그렇듯 명성대비 김씨가 개입하면서 사건은 진실 여부를 떠났다. 모후의 입장을 무시할 수 없었던 숙종은 결국 복창군과 복평군, 궁녀들을 유배형에 처했다. 그러자 부제학 홍우원이 삼종지도를 거론하며 명성대비의 내정간섭을 비난했고 윤휴 역시 대비를 단속하라고 상주했다. 조사기는 대비를 명종의 모후 문정왕후에 비견하기까지 했다. 그해 7월 조정의 분위기가 안정되자 숙종은 삼복을 석방했지만 남인 신료들의 왕실을 경시하는 발언 때문에 상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경신환국, 남인에게 철퇴를 가하다

1679년(숙종 5년), 국제정세가 심상찮게 돌아가고 있었다. 중국 남부에서 일어난 삼번의 난이 강희제의 효과적인 대응으로 가라앉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조선에서는 윤휴의 북벌정책에 따라 도체찰사부를 설치하고 수시로 군사훈련을 실시했는데, 자칫하면 그 일이 부메랑으로 돌아올 판국이었다. 삼번의 난이 종결되면 강희제는 분명히 조선의 불온한 움직임을 문제 삼을 것이다.

그 무렵 실세한 서인들은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아가면서 남인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장악한 한성부와 포도청을 총동원하여 윤휴와 함께 영의정 허적의 서자인 허견을 옭아매려 했다.

그런 가운데 1680년(숙종 6년) 4월 1일, 허적의 조부 허잠이 ‘충정(忠貞)’이란 시호를 받아 잔치를 벌이는 영시일(迎諡日)이 되었다. 그날 아침 폭우가 쏟아지자 숙종은 내관에게 궁중에서 사용하는 기름먹인 장막[油幄]을 가져다주라고 일렀다. 하지만 허적이 벌써 그 물건을 가져갔음을 알게 된 숙종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내관에게 그의 집을 정탐하게 한 다음 훈련대장 유혁연과 포도대장 신여철, 총융사 김만기를 급히 패초했다.

패초(牌招)란 나라에 급한 일이 있을 때 왕이 신하에게 패를 보내 부르는 것이다. 그것은 중대한 정국변동을 의미했다.

과연 숙종은 당일로 훈련대장에 김만기, 총융사에 신여철, 수어사에 김익훈을 임명함과 동시에 제2차 예송의 패배로 철원에서 귀양살이하던 서인 김수항을 영의정으로 임명했다. 이어서 민정중을 우의정, 정지화를 좌의정, 남구만을 도승지, 조지겸을 이조좌랑에 임명하는 등 조정을 온통 서인 일색으로 바꾸어버렸다. 이른바 경신환국이 단행되었던 것이다.

윤휴, 명성대비에 대한 불경죄를 떠안다

경신환국 닷새째인 1680년(숙종 6년) 4월 5일 김석주를 추종하는 정원로, 강만철이 남인 일파의 역모를 고변했다. 허적의 서자 허견이 인평대군의 아들 복선군 이남을 추대하려 했다는 내용이었다. 김석주는 또 허견이 경기도 이천의 둔군(屯軍)들을 매일 훈련시켰고, 도체찰사부에서 지키는 대흥산성에서도 군사훈련이 있었는데, 그 모두가 복선군을 옹립하기 위한 준비였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허견을 비롯해 정원로, 강만철, 복선군, 복창군, 민희, 오시수, 유혁연 등 수많은 관련자들이 모조리 추포되었다. 결국 허견은 4월 12일 군기시 앞에서 능지처사 당했고 복선군 이남은 당고개에서 교형에 처해졌다. 오랫동안 남인 정권을 이끌었던 허적은 서인으로 강등되었다가 5월 11일 사사되었다.

서인들의 공적 윤휴에게는 과거 정사에 관여했던 명성대비 김씨를 단속하라고 말한 불경죄와 함께 역모를 위해 도체찰사부의 설치를 제안하고 자신이 부체찰사로 선임되지 않자 얼굴에 불쾌한 빛을 띠었다는 혐의가 덧씌워졌다. 그해 5월 20일, 북벌을 통해 피폐해진 조선을 일으켜 세우려던 윤휴의 꿈은 사약과 함께 사라졌다.

기실 이 사건은 남인들을 제거한 다음 도체찰사부를 역모의 근거지로 만들고 북벌론자 윤휴 등을 죽임으로써 청나라 강희제의 의심을 피하려던 숙종의 모략이었다. 국가적인 위기 상황에서 숙종은 그렇듯 냉철하게 희생양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장옥정을 궁궐 밖으로 내치다

1680년(숙종 6년) 10월 18일부터 인경왕후 김씨가 갑자기 마마 증상을 보였다. 깜짝 놀란 숙종은 영의정 김수항의 제안에 따라 명성대비와 함께 창경궁으로 이어했다. 그로부터 7일이 지난 10월 26일 인경왕후는 환후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날 밤 숙종이 구토와 함께 가슴과 배에 통증을 호소했지만 다행히도 금세 가라앉았다.

그로부터 얼마 후 장옥정이 자의대비전의 나인이 되어 입궐했다. 천하절색 장옥정의 입궁은 천출의 너울을 벗어나 최고의 지위에 오르겠다는 그녀의 개인적인 욕심과 역관이었던 숙부 장현의 정치적 야심, 숙종을 미혹시키려는 남인들의 뜻이 고루 뒤섞인 일종의 연환계였다. 장옥정의 어머니 윤씨는 자의대비의 사촌동생 조사석과 내연관계설이 돌 정도였으므로 그녀의 입궁에 조사석이 모종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자의대비는 현종 대 두 차례의 예송논쟁 과정에서 서인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었으므로 남인 계열인 장옥정을 몹시 아껴주었다. 그 이면에는 당대의 거부였던 역관 장현의 재력도 큰 작용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대궐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대왕대비전은 왕이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드리는 장소이다. 그곳에서 매일 아름다운 나인을 보게 된다면 젊은 국왕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인지 조선 시대의 후궁은 대왕대비전이나 중궁전의 상궁 나인 출신들이 제일 많았다. 숙종 역시 대왕대비전에서 경국지색인 장옥정을 보자마자 한눈에 반해버렸다. 그때부터 장옥정은 타고난 미모와 교태로 홀아비 숙종의 심신을 사로잡았다.

1680년(숙종 6년) 11월 혜성과 같은 흰 기운이 서쪽으로부터 중천에 뻗치고, 혜성이 두 달 동안 나타나자 서인들은 장차 장옥정이 큰일을 일으킬 조짐이라며 수군거렸다. 그런 서인들의 부추김에 자극받은 명성대비 김씨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장옥정을 궁궐 밖으로 내쫓아버렸다. 승은을 입은 여인은 민간에 내보낼 수 없다는 관례마저 깬 초강경조치였다.

졸지에 숙종과 생이별을 한 장옥정은 자의대비의 배려로 인조의 다섯째 아들 숭선군 이징의 부인의 보살핌을 받았다. 종친의 아내가 쫓겨난 궁녀를 돌본다는 것 자체가 파격이었다. 임금이 장씨의 미모에 홀린 이상 언젠가는 반드시 입궁시킬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을 것이다.

며느리 인경왕후의 발인이 끝나자마자 명성대비는 국상기간임에도 불구하고 국혼을 서둘렀다. 아들 숙종의 뇌리에서 장옥정을 떼어내기 위한 조치였다. 그녀는 ‘왕비 자리는 놓치지 않는다.’라는 서인들의 국혼물실 정책에 따라 병조판서 민유중의 딸을 왕비로 간택했다. 그렇게 해서 1681년(숙종 7년) 5월 2일 인현왕후 민씨가 15세의 나이로 여섯 살 많은 숙종과 가례를 올리고 조선의 국모가 되었다.

이윽고 내명부를 관장하게 된 인현왕후는 왕이 총애하는 궁녀 장옥정의 퇴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고지식하게도 숙종에게 승은을 입은 궁인이 민가에 나가 있는 것은 옳지 않다며 장씨를 불러들이라고 청했다. 유교에서는 정부인이 첩들까지도 덕으로 포용하여 다스리는 것이 법도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면에는 숙종과 자의대비의 압력이 있었을 것이다.

그 소식을 전해들고 깜짝 놀란 명성대비가 인현왕후를 불러 재고를 요구했다. 장옥정이 입궐하여 왕을 미혹시키면 중전조차 감당하기 힘들 것이라는 경고까지 곁들였다. 그로 인해 숙종과 남인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장옥정의 입궐은 무산되고 말았다. 장옥정에게 있어 명성대비는 그야말로 철옹성과 같았다.

대비의 죽음, 장옥정 기지개를 켜다

경신환국으로 청나라의 의심에서 벗어난 숙종은 1682년(숙종 8년) 10월 우의정 김석주가 심복 김익훈, 김환을 이용하여 일으킨 임술 고변을 통해 남인이었던 허새와 허영, 서종제 등을 축출했다. 그 일로 조정이 재차 분란에 휩싸이자 숙종은 송시열과 윤증, 박세채 등 명망 높은 유현들을 출사시켜 분위기 반전을 노렸다. 한데 이 사건이 김익훈의 정치공작이라는 점이 드러나자 서인들 내부에 분란이 생겼다. 그로 인해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었고 당쟁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듬해인 1683년(숙종 9년) 겨울, 23세의 숙종이 갑자기 마마에 걸렸다. 일찍이 며느리 인경왕후도 마마를 앓다가 목숨을 잃었다. 그 때문에 밤낮으로 노심초사하던 명성대비 김씨는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목욕재계한 다음 천지신명께 아들의 완쾌를 빌었다. 하지만 그 도가 지나쳤는지 갑자기 병석에 눕더니 12월 5일, 42세의 나이로 창경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렇듯 궁중에서 숙종을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사라지자 임금과 남인들이 오매불망하던 한 여인이 몸을 일으켰다. 1686년(숙종 12년) 12월 10일, 명성대비의 국상기간이 끝나고 나서 불과 닷새 만에 숙종은 장옥정을 궁궐로 불러들였다. 바로 그 순간부터 인현왕후와 장희빈을 주인공으로 하는 파란만장한 궁중비사의 막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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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 《조선왕조실록》 이상각. 들녘. 2007.
  • ・ 《화경숙빈 최씨》 이상각. k&j. 2009.
  • ・ 《숙종대왕과 친인척》 지두환. 역사문화. 2009.

이상각 집필자 소개

1963년 충남 태안 출신. 시인, 작가. 대한민국항공회 자문위원, 복잡하고 난해한 고전과 역사기록을 알기 쉽게 해석함으로써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역사 교양서를 쓰고 있다. 아울러 조선시대 역..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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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인물 열전 저자이상각 | 출판사Daum 전체항목 도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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