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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닌텐도
Nintendo, 任天堂설립 | 189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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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일본 |
설립자 | 야마우치 후사지로(山內房治郞) |
대표자 | 슌타로 후루카와(2018년~) |
분야 | 엔터테인먼트 |
취급품목 | 게임기 및 게임 |
사이트 | https://www.nintendo.co.jp/ |
본사 주소 | 교토(京都) |
화투 제작 회사로 출발한 닌텐도
닌텐도는 하드웨어(게임기)와 소프트웨어(게임)를 동시에 생산 판매하는 일본의 대표적 게임 업체다. 게임에 특화된 기업이긴 하지만 닌텐도는 스스로를 게임 업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엔터테인먼트 기업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라이벌은 게임 회사가 아니라 영화, TV프로그램, 음악, 소설, 디즈니랜드 등 사람들이 즐기는 엔터테인먼트라는 게 그 이유다. 닌텐도는 “가장 중요한 것은 게임 그 자체다(The name of the game is the game)”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있는데, 아주 당연하게도 닌텐도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재미다. 게임이라는 게 원래 즐겁자고 하는 것인 바 모든 사람들이 게임을 함께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게 그 이유다. 닌텐도가 자신들의 고객은 5세부터 95세까지라면서 가족영화처럼 즐길 수 있는 게임을 만드는 게 최우선 과제라고 말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닌텐도는 화가 겸 장인 야마우치 후사지로(山內房治郞)가 ‘닌텐도 곳파이’이라는 이름으로 1889년 창업했다. 후사지로는 애초 가내 공업 형태로 일본의 전통 오락용 카드인 ‘하나후다(花札)’를 손으로 제작해 만들어 팔았는데, 이게 인기를 끌자 1889년 회사를 차린 것이다. 하나후다는 오늘날로 말하자면 화투다. 닌텐도(任天堂)는 ‘사람이 할 일을 다하고 천명을 기다린다’, 그러니까 ‘최선을 다하되 결과는 하늘의 뜻에 맡긴다’는 뜻이다.
화투 제작 사업은 일본의 대표적인 폭력 조직인 야쿠자가 화투를 도박에 사용하면서 일대 전기를 맞게 된다. 야쿠자가 전국 각지에 도박판을 만들자 화투 수요가 크게 증가한 것이다. 도박꾼들의 심리도 화투 수요를 부추겼다. 엄청난 판돈이 걸린 도박판에서 도박꾼들은 혹시라도 상대방이 속임수를 통해 자신을 속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갖게 되는데, 이런 이유 때문에 새로운 판이 시작할 때마다 화투를 교체했으니 말이다. 닌텐도는 1907년에 이르러 서양식 카드를 대량 생산하는 회사로 입지를 굳혔으며, 일본의 담배소금공사와 협상을 통해 담배 상점에서도 서양식 카드를 판매하는 방식으로 판매망을 넓혀나가는 방식으로 일본 최대의 카드 회사가 되었다.
닌텐도가 오늘날의 엔터테인먼트 회사로 발돋움한 것은 3대 사장인 야마우치 히로시(山内 溥)가 취임한 1949년 이후다. 히로시는 화투 만드는 중소기업에 불과했던 닌텐도를 글로벌 기업으로 키운 주인공으로, 사실상 닌텐도를 창업한 사람이라고 표현해도 과하지 않는 인물이다. 일본의 게임 산업을 세계 정상으로 이끈 대부로 통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렇게 닌텐도와 일본 게임업계에 큰 족적을 남겼지만 애초 히로시는 닌텐도를 물려받는 것에 큰 관심이 없었다. 화투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투를 생산하는 가문’의 후손으로 불리는 게 너무 싫었던 그는 21세 때인 1949년 당시 사장이었던 외조부가 병으로 갑자기 쓰러지자 어쩔 수 없이 와세다대학을 중퇴하고 사장에 취임했다. 이때 그는 단 하나의 조건을 내걸었는데, 그건 자신이 닌텐도에서 일하는 야마우치 가문의 유일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자신이 비교적 젊은 나이에 회사의 경영을 맡게 되었지만 누구도 자신의 권위에 도전해서는 안 된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 에피소드가 시사하듯, 히로시는 이후 카리스마적 리더십으로 닌텐도를 이끌었다.
오락 산업 한 우물만 파다
이렇게 해서 닌텐도의 모든 경영권을 장악하게 된 히로시는 1951년 회사 이름을 ‘닌텐도 카루타’로 바꾸었으며, 히로시는 서양에서 수입되던 카드들과 경쟁하기 위해 1953년 일본 최초로 플라스틱으로 코팅한 카드를 대량 생산하기 시작했다. 카루타(かるた)는 딱지, 트럼프, 화투 등 놀이용 카드를 이르는 일본 말이다.
닌텐도는 1959년 미국의 월트 디즈니와 기술 협정을 맺고 미키마우스를 포함한 디즈니의 여러 캐릭터들을 뒷면에 인쇄한 오락용 카드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 카드는 백화점과 대형 완구점에서도 팔리는 등 닌텐도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하지만 히로시에겐 한 가지 고민거리가 있었으니 그건 카드 산업의 ‘불투명한 미래’였다. 이런 고민은 1950년대 초 일본 기업의 미국 방문 프로그램 일환으로 미국으로 건너갔을 때 생겼다. 당시 히로시는 세계 최고의 카드 제조회사로 불리던 US플레잉을 방문했다가 아연 실색하고 말았는데, 그건 세계 최고의 카드 제조회사가 고작 2층짜리 허름한 건물 창고에서 제품을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카드 산업에 대한 히로시의 우려는 기우가 아니었다. 향후, 오락의 대명사가 될 TV가 닌텐도가 제작 판매하던 카드의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카드 사업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걸 예감한 히로시는 디즈니 캐릭터 카드의 성공을 발판 삼아 사업 다각화에 나서기 시작했다. 회사 이름도 ‘카루타’를 빼고 닌텐도 주식회사로 바꾸었다. 히로시는 1962년 닌텐도를 오사카 증권거래소에 상장했는데, 이후 히로시는 한 끼용 즉석쌀밥, 러브호텔, 택시운수업 등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손 대는 사업마다 실패의 쓴맛을 봐야 했다. 이렇게 계속된 실패는 그에게 한 가지 깨달음을 안겨주었다. 바로 ‘본업’, 그러니까 오락 산업에만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그는 “한 우물만 파는 기업이 더 성공할 수 있다”며 다른 분야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는데, 2002년 사장직을 이와타 사토시에게 물려줄 때도 “오락 산업 한 우물만 파라”며 “다른 업종에는 절대로 손을 대지 마라”는 당부를 남겼다.
오락 산업에만 집중하기로 한 이후 히로시는 완구 회사로 변신을 시도했는데, 이 과정에서 닌텐도의 성장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이 등장했다. 바로 요코이 군페이(横井軍平)였다. 요코이 군페이는 먼 곳의 물건을 잡을 수 있는 닌텐도의 첫 완구제품인 ‘울트라 핸드(1966)’, 실제 야구공보다 가벼운 야구공을 발사하는 ‘울트라 머신(1968)’, 렌즈가 달린 잠망경처럼 생긴 ‘울트라 스코프(1971)’ 등 이른바 ‘울트라 시리즈’를 연이어 내놓으며 닌텐도를 완구업계의 강자로 키우는 데 일등공신이 되었다. 울트라 시리즈로 승승장구하던 1969년 히로시는 회사 이름을 닌텐도 게임즈로 바꾸었다.
특히 이 시절 요코이 군페이가 만든 광선총은 닌텐도의 고객층이 어른들까지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광선총 개발을 계기로 레이저 클레이 사격장을 만들었는데, 이게 폭발적인 호응을 얻은 것이다. 1973년 교토에서 세계 최초로 문을 연 레이저 클레이 사격장은 일본의 많은 도시에서 저녁 시간을 즐겁게 보낼 수 있는 오락 시설로 각광받았다. 하지만 1973년 발생한 제1차 오일쇼크로 인해 경기가 하강하자 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소비 심리가 위축되면서 사람들이 사치품의 소비를 줄이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오락 산업이 된서리를 맞았기 때문이다. 레이저 클레이 사격장을 찾는 사람들은 없었기 때문에 사격장을 건설하기 위해 과감하게 투자를 했던 닌텐도는 파산 직전까지 몰렸다.
패미컴과 슈퍼마리오의 탄생
이때 히로시는 가정용 TV 수상기를 이용한 전 게임에 주목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반도체’와 ‘마이크로프로세서’를 기반으로 전자산업이 급속하게 발전하면서 아타리(Atari)와 마그나복스(Magnavox) 등의 게임업체가 가정용 TV 수상기를 활용한 전자 게임을 제공하고 있었는데, 특히 탁구 형식의 전자게임 ‘퐁(1972)’이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 전자산업이 거둔 성과가 가정용 상품에도 혁명적인 변화를 불러올 것을 직감한 히로시는 1975년 전자게임 산업에 뛰어들었다. 미국의 게임 업체 마그나복스의 비디오 게임기를 일본에서 제조, 판매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해 ‘퐁’ 게임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소형 게임기에 관심을 갖게 된 닌텐도는 미쓰비시와 제휴해 비디오 게임기 생산 체계를 구축하는 등 비디오 게임을 닌텐도의 성장 동력으로 삼기로 했다. 이 과정에서 게임기를 제작할 수 있는 자체적인 기술력을 갖춰 비로소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동시에 생산하는 회사가 되었다. 닌텐도는 1977년 최초의 가정용 게임기 ‘컬러TV게임 15’를 출시했으며, 막대기 두 개로 공을 주고받는 테니스, 블록 깨기 등을 잇달아 출시하면서 전자오락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 시작했다.
닌텐도는 1980년 최초의 휴대용 게임기 게임&와치(Game&Watch)를 개발하고 미국 뉴욕에 닌텐도 아메리카를 설립하면서 해외 시장 공략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게임&와치는 전자계산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만든 게임기로, 게임을 위한 디스플레이를 크게 만들고 간단한 게임 소프트웨어를 장착한 게임기였다. 그리고 이듬해 닌텐도 역사상 최초의 성공 작품이라 할 수 있는 비디오게임을 내놓았으니 이게 바로 ‘동키 콩(Donky Kong)’이다. 동키 콩은 킹콩과 당나귀의 합성어로, 게임에 등장하는 콩이 당나귀처럼 고집이 세면서도 교활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하지만 출시 초기만 하더라도 미국 지사 직원들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이름뿐만 아니라 게임 자체가 너무 유치하다는 게 이유였다. 그럴 만도 했다. 당시 미국에서 한창 유행하고 있던 게임엔 절단, 파괴, 암살, 절멸 등과 같은 다소 살벌한 단어가 제목에 들어가 있었는데, 그런 트렌드와 한참 떨어져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게임은 닌텐도 역사상 최초의 ‘성공 작품’이 되었다. 미국 지사의 판매팀에게서 정신이 나간 것 아니냐는 혹평을 받았던 <동키 콩> 개발자 미야모토 시게루(宮本茂)는 이후 슈퍼마리오 등 대박 히트작을 연이어 만들면서 ‘게임의 신’이라는 칭호까지 얻었다.
1983년 이른바 ‘아타리 쇼크(Atari Shock)’가 발생해 가정용 비디오게임기 사업 전체가 큰 위기에 직면했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닌텐도에겐 호재로 작용했다. 히로시는 ‘재미없는 소프트웨어가 출시되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다면서 1983년 7월 게임&워치에서 번 돈을 모두 투자해 첫 가정용 비디오 게임기 제조 판매에 뛰어들어 비디오 게임기 패미컴(famicom)을 출시했는데, 이게 대박을 쳤기 때문이다. 패밀리 컴퓨터의 준말인 패미컴은 북미에서는 닌텐도 엔터테인먼트 시스템(NES: Nintendo Entertainment System)이라는 이름으로 출시되었다.
게임 카트리지를 교환해가며 하나의 게임기로 다양한 게임을 즐길 수 있게 한 패미컴은 출시 1년 만에 200만 대 이상을 팔아치우는 게임기 시장을 평정하면서 닌텐도를 돈방석에 올려놓았다. 물론 애초부터 반응이 좋았던 것은 아니다. 당시 미국 언론들은 닌텐도의 등장에 세상물정 모르는 어느 무식한 일본인 사업가가 시대에 뒤쳐진 비디오 게임을 들고 나왔다며 비아냥거렸다. 이런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 닌텐도는 당시로서는 큰돈인 500만 달러를 투자해서 파격적인 마케팅을 실행했다. 패미컴을 전시해주는 상점에는 닌텐도 직원이 직접 가서 게임기 판매를 도와주고 재고 처리는 물론이거니와 가게의 인테리어까지 해준 것이다. 이런 파격적인 마케팅과 함께 게임에 대한 편견을 바꾸면서 닌텐도는 미국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패미컴을 통해서 ‘동키 콩’, ‘메트로이드(Metroid)’ ‘젤다의 전설(The Legend of Zelda)’ 등의 게임을 실행할 수 있었는데, 이 가운데 가장 히트작은 1985년 선보인 게임 타이틀 ‘슈퍼마리오 브라더스(Super Mario Bros.)’였다. 애초 마리오는 1982년 출시한 게임 ‘동키 콩’에 등장한 땅딸이 목수였는데, ‘슈퍼마리오 브라더스’에서 마리오라는 이름의 배관공으로 설정되었다. 어쨌든, 1985년에서 1991년까지 8개의 버전으로 제작되어 판매된 ‘슈퍼마리오’ 시리즈는 전 세계적으로 총 7,000만 개가 판매되면서 비디오 게임의 대명사로 불릴 정도로 높은 인기를 누렸다.
미국을 강타한 닌텐도와 ‘닌텐도 세대’의 등장
당시 미국 사회를 강타한 패미컴 열풍은 상상 이상이었다. 이를 잘 보여준 게 바로 닌텐도에 푹 빠진 아이들을 일컫는 이른바 ‘닌텐도 세대’의 등장이었다. 당시 미국 아이들은 닌텐도에 어느 정도 빠져들었던가? 1989년 일리노이주 샌드위치에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용돈이나 다른 돈이 생기면 무엇을 하겠느냐는 설문조사를 실시했는데, 거의 모든 어린아이들이 닌텐도 게임을 사겠다고 말했다.
아이들 사이에서는 닌텐도가 자체적으로 제작한 게임 잡지 [닌텐도 파워]까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닌텐도 파워]는 1990년에만 매달 600만 부가 팔렸는데, 이 때문에 “자녀들이 독서를 하지 않는다는 불만을 가진 부모들은 자녀들을 다시 봐야 했다"는 이야기마저 나왔다. 아이들이 [닌텐도 파워]에 실린 모든 글을 숙독하고 있다는 게 이유였다. 1991년 미국에서 이루어진 한 조사에서는 닌텐도의 마스코트인 슈퍼마리오의 인지도가 미국을 대표하는 문화상품 미키마우스보다 높게 나타났다. 이에 대해 한 잡지는 이렇게 말했다. “닌텐도는 디즈니나 맥도날드와 같은 이름이 됐다.” 1990년대 초반 미국에서 컴퓨터를 보유한 가정은 약 2,400만 가구 정도였는데, 패미컴을 보유한 가구는 무려 3,400만 가구에 달했다.
이렇듯 닌텐도 신드롬이 일자 미국의 문화 상품들 역시 닌텐도 따라하기에 적극 나섰다. 이와 관련해 데이비드 셰프는 [닌텐도의 비밀: 닌텐도는 어떻게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나](2009)에서 미국 아이들의 상당수가 매일 두 시간 넘게 ‘패미컴’을 가지고 놀았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어린이들은 비디오게임을 하지 않는 시간에도 닌텐도 문화에 흠뻑 젖어 있었다. 닌텐도 게임과 캐릭터들을 기초로 제작된 TV 만화영화는 다른 어떤 프로그램보다 시청률이 높았다. 이에 따라 ‘심슨 가족(The Simpsons), ’닌자 거북이(Teenage Mutant Ninja Turtles), ‘다람쥐 구조대(Chip’n Dale Rescue Rangers), 덕 테일즈(Duck Tales) 등도 속속 닌텐도 게임을 닮아갔다. 닌텐도 송의 레코드와 장편 특선영화도 제작됐다. 닌텐도와 관련하여 잡지, 책, 비디오, 시리얼, 공책, 음료수, 티셔츠, 보드 게임, 퍼즐, 인형, 벽지, 이불 같은 수많은 상품들이 계속해서 시장에 등장했다. 이제 닌텐도의 침공이 성공할 것인가 아닌가가 문제가 아니었다. 이 거대한 침략자가 그 뒤에 무엇을 남길 것인지가 문제가 됐다.”
이런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1990년대 초반 닌텐도가 미국에서 기록한 매출액은 미국의 모든 영화사가 거두어들인 매출액을 합한 것과 비슷했다. 패미컴의 인기를 발판 삼아 닌텐도는 1990년 ‘슈퍼패미컴’을 발표했는데, 미국에선 슈퍼패미컴 구매를 두고 부모와 자식 간에 갈등이 심심치 않게 발생하기도 했다. 당연히 미국 언론들은 이를 부정적으로 바라봤는데, 다음과 같은 제목의 기사들이 이를 잘 보여준다 할 것이다. <닌텐도가 새로운 게임기로 부모들의 분노를 사다>, <닌텐도, 슈퍼 게임기 판매를 위해 아이들의 조르기를 부추기다>, <새로운 닌텐도가 부모들의 가계부담을 가중시키다> 등. 하지만 이런 비판 속에서도 슈퍼패미컴 역시 불티나듯 팔려나갔다. 닌텐도에 따르면, 슈퍼패미컴은 당시 전 세계에서 1분에 12대씩 팔리고 있었다.
패미컴과 슈퍼 패미컴을 통해 닌텐도는 1990년대 초중반 전 세계 게임 업계의 절대 강자가 되었지만 1994년 등장한 소니의 ‘PS(플레이스테이션)’ 시리즈와 2002년 마이크로소프트(MS)가 내놓은 ‘X박스’에 밀려 업계 3위까지 추락하는 등 10년 가까이 암흑기를 맞이하게 된다. 2002년엔 야마우치 히로시가 사장에서 물러났고 2000년대 중반까지 언론과 소프트웨어 메이커들에게서 닌텐도는 기기메이커가 아니라 완구메이커라는 조롱까지 들어야 했다.
나이키는 왜 닌텐도를 경쟁 상대로 선언했는가?
소니의 PS 시리즈와 MS의 X박스에 밀려 업계 3위까지 추락한 닌텐도가 다시 게임 시장의 강자로 부상한 것은 2004년 12월 출시한 휴대용 게임기 닌텐도DS를 통해서였다. 닌텐도DS는 무려 1억 5,000여만 개가 팔렸는데, 한국에서도 10대들 사이에서 ‘닌텐도 없으면 왕따’라는 말이 유행할 만큼 대박을 쳤다. 닌텐도는 닌텐도DS를 통해 게임업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는 평가까지 들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
그건 닌텐도의 게임 철학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닌텐도는 게임은 ‘쉽고 재미있어야’ 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는데, 닌텐도DS는 철저하게 이 철학에 기반해서 탄생한 제품들이니 말이다. 이런 이야기다. 소니와 MS는 복잡한 최첨단 기술을 통해 10대 청소년과 젊은 층 등 이른바 게임 마니아들을 집중 공략했다. 물론 이런 전략은 헤비 유저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평소 게임에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은 게임에서 더 멀어지게 만드는 결과를 낳고 있었다. 게임에 진입할 수 있는 장벽이 갈수록 더 높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닌텐도는 바로 그 점에 주목해 이런 질문을 던졌다. “왜 10대와 젊은 층 등 극소수만 게임을 즐기는 것일까?” 그리고 “사용하기 쉽고 재미있는 비디오게임이라면 10대와 젊은 층뿐만 아니라 나이 많은 소비자들”에게도 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닌텐도는 10대부터 노년층까지 모두 포괄할 수 있는 비디오게임 시장을 다시 구상해 잠재된 시장을 창조하기로 했는데, 이렇게 해서 나온 게 바로 닌텐도DS였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데이비드 셰프는 [닌텐도의 비밀: 닌텐도는 어떻게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나](2009)에서 “가장 큰 요소는 닌텐도가 게임기와 게임 시장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봤다는 것이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전까지의 게임기는 기술의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점점 고도화됨으로써 게임 조작이 갈수록 복잡해져 갔다. 때문에 실제 게임을 하기 전에 설명서를 몇 번이나 읽어봐야만 했다. 하지만 ‘닌텐도DS’ 유저들은 설명서 없이도 곧바로 게임을 시작할 수 있다. 개발 경쟁의 흐름에 역행하여 쉽고 간편한 방향을 선택했던 것이다. 이러한 발상의 전환은 헤비 유저들에게는 다소 부족하다는 느낌을 주었을지 모르나 게임 초보자들을 광범위하게 끌어들였다. 십대들뿐 아니라 엄마, 아빠 세대, 심지어 할머니, 할아버지 연령층의 세대들까지도 저항 없이 게임 대열에 합류하게 만들었다.”
닌텐도가 2006년 출시한 가정용 게임기 닌텐도 위(Wii) 역시 마찬가지였다. TV에 연결해 화면을 보면서 따라하게 만든 동작인식 게임기인 닌텐도 위는 발매 4년 3개월 만에 1억 대의 글로벌 판매량을 기록할 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닌텐도 위는 사실상 이름에 모든 의미가 담겨 있는 게임기였다. 위는 우리를 뜻하는 영어 단어 we를 이미지화한 것이다. 그러니까 닌텐도 위를 이용하면 ‘온 가족이 함께 게임’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닌텐도 위에서 즐길 수 있도록 한, 사용자의 체중과 균형점을 측정해 게임도 즐기고 운동의 효과도 얻을 수 있도록 한 건강관리 장치 소프트웨어 위 피트(Wii Fit)는 물리치료실, 헬스클럽, 요양시설 등에서도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닌텐도DS와 닌텐도 위가 전 세계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하자 세계적인 신발 브랜드 나이키가 “나이키의 경쟁 상대는 닌텐도”라고 선언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대체 나이키는 왜 이런 선언을 했던 것일까? 두말할 나위 없이 나이키 핵심 고객은 청소년과 스포츠를 즐기는 젊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닌텐도 DS와 닌텐도 위에만 빠져 밖으로 나오지 않으니 어떤 일이 발생했겠는가? 운동화 판매량이 큰 폭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니까 닌텐도가 여가 시간을 장악해 나이키 매출이 떨어지자 닌텐도를 ‘경쟁 상대’로 규정한 것이다.
전 세계를 강타한 ‘포켓몬 고 신드롬’
닌텐도 DS와 닌텐도 위를 통해 게임 시장을 장악했지만 스마트폰 혁명이 시작하면서 닌텐도는 2009년경부터 다시 큰 시련에 직면하게 된다. 예컨대 닌텐도는 2008 회계연도(2008년 4월~2009년 3월)에 1조 8,386억 엔(약 21조 원)의 매출과 2,790억 엔의 순이익으로 사상 최대 기록을 세웠지만 이로부터 불과 3년 후인 2011년에는 1962년 상장 이후 첫 적자(432억 엔)를 기록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닌텐도는 “우리는 세상에 없는 것을 내놓았고 지금도 스마트폰에 없는 것을 개발하고 있다”며 자신감을 내비쳤지만 게임만 할 수 있는 닌텐도 게임기는 ‘손 안의 마법사’ 스마트폰의 경쟁 상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은 갈수록 확연해졌다.
결국 닌텐도는 2015년 3월 모바일 게임업체 DeNA와 업무 및 자본 제휴를 발표하며 스마트폰용 게임 진출을 선언했다. 당시 닌텐도 CEO 이와타는 “닌텐도의 20년 후를 생각”해 모바일 시장에 진출했다고 말했다. 닌텐도는 2016년 3월 역사상 최초로 자사 모바일 게임 ‘Miitomo(미토모)’를 내놓았지만 기대만큼의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닌텐도는 2016년 7월 6일 두 번째 스마트폰용 게임 ‘포켓몬 고(Go)’를 출시했는데, 이 게임은 다운로드 첫날부터 그야말로 세계적인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구글·닌텐도·포켓몬컴퍼니가 함께 투자한 게임 개발사 나이언틱을 통해 탄생한 포켓몬 고는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과 증강현실(AR) 기술을 결합한 게임이다. 구글 지도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구글 지도가 제공되지 않는 국가에서는 실행이 되지 않는다. 포켓몬 고 게임의 실행 방식은 이렇다. 스마트폰에서 포켓몬 고 게임 앱을 실행한 뒤 특정 장소를 비추면 스마트폰 화면에 포켓몬 캐릭터가 나오는데, 이 포켓몬 캐릭터를 사냥하거나 특정 몬스터를 키워 다른 사용자의 몬스터와도 싸울 수 있다.
‘포켓몬 고 신드롬’ 배경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1990년대 포켓몬스터와 함께 성장한 ‘포켓몬 세대’가 가지고 있는 아련한 향수를 제대로 건드렸다는 점을 꼽을 수 있겠다. 이와 관련해 남은주는 이렇게 말했다.
“그 옛날 포켓몬스터 카드를 수집하며 151가지 기본 캐릭터의 특징과 이름을 외웠던 포켓몬 세대는 이젠 정말 몬스터들을 길들이는 포켓몬 트레이너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언젠가는 그중 가장 뛰어난 포켓몬 마스터까지 될 수 있다는 꿈에 사로잡힌다. 세계적으로 매일 1천 만 명 넘는 사람들이 포켓몬 고 앱을 내려 받아 길을 떠나는 현상은 포켓몬스터의 매력을 빼놓곤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임]은 포켓몬 고 신드롬이 이른바 ‘포켓몬 세대’의 연대감에 기반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1990년대 포켓몬스터와 함께 성장했던 ‘90년대의 아동’들이 “지금 빨리 몬스터들을 얻어서 체육관에 가 다른 사용자들과 대결하기를 꿈꾼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증강현실보다는 동시대의 경험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게임이라는 게 이들에겐 더 중요하다는 게 [타임]의 해석이다.
어쨌든, 포켓몬 고로 한물 간 기업으로 인식되었던 닌텐도는 다시 한 번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기업으로 부상했다. 예컨대 포켓몬 고가 출시된 지 5일째 되던 7월 11일, 닌텐도의 주가는 전주 금요일보다 24.5%가 오른 2,260엔을 기록했는데, 이는 1983년 이후 최대의 상승치였다. 닌텐도 주가는 포켓몬 고가 출시된 지 10일 만에 120% 급등했으며, 7월 20일 기준으로 4조 5,000억 엔을 기록해 일본을 대표하는 전자 기업 소니의 시가총액 4조 860억 엔을 뛰어넘었다. 닌텐도는 현재 슈퍼마리오 등 닌텐도를 대표하는 캐릭터를 적극 활용할 수 있는 콘텐츠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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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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