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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러시아

모든 것은 과거에

다른 표기 언어 동의어 ‘모든 것은 과거에’와 톨스토이의 ‘인생이란 무엇인가’
요약 테이블
제작시기 1889년
작가 바실리 막시모프

봄의 나른한 풍경 안에 두 노파가 앉아 있다. 계절이 봄임을 드러내 주는 배경의 보랏빛 꽃, 초록빛으로 싱그러움을 뽐내는 풀들, 온화한 봄볕 등이 이젠 시들어 가는 노년의 두 여인과 대조를 이루면서도 조화롭다. 화가는 봄과 노파들을 한공간 안에 그려내어 낡은 것과 새것의 교체라는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섭리를 자연스럽게 드러내준다.

V. 막시모프, 〈모든 것은 과거에〉, 캔버스, 유화, 72×93, 1889

ⓒ 이담북스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따사로운 봄 햇살을 놓치기 아까워 안락의자를 앞뜰로 끌고 나와 다리받침을 하고는 폭신한 쿠션에 등을 기대앉은 귀부인의 얼굴에 평안한 미소가 깃들었다. 산책에서 돌아온 듯 지팡이를 의자에 걸쳐 놓고 가발까지 쓴 귀부인에 비해, 스카프로 머리를 감싸고 나무 계단에 앉아 뜨개질을 하는 노파는 무언가 못마땅한 듯 입술이 아래로 쳐진 것이 뾰로통한 모습이다. 주인 옆의 개도 늘어져 이미 잠이 들었다.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며 봄볕에 이불을 말리는 일상의 모습이 정겹기만 하다.

하지만 19세기 말인데도 여전히 반상의 구별이 느껴지는 풍경이다. 안락의자에 간이 식탁까지 갖추고 찻상을 차려놓고 앉아 같이 늙어가는 비슷한 연배의 시중을 받으며 봄 햇살을 즐기는 마님의 옆에는 찻잔이, 부지런한 손놀림으로 뜨개질에 열중하며 방석도 없이 계단에 걸터앉은 노파의 옆에는 사모바르(러시아식 차 끓이는 주전자)와 찻물용 큰 컵이 놓여 있다. 농노 해방(1961)이 이루어진 지 오래인데 체호프의 『벚꽃 동산』에 등장하는 하인 피르스처럼 아직도 과거만을 회상하며 몰락해가는 주인 곁을 지키고 있는 노파는 19세기 말의 허물어져가는 귀족 사회를 지탱하던 마지막 세대인 것 같다. 그렇지만 주인의 ‘벚꽃동산’과 함께 죽음을 맞이했던 피르스와는 달리 노파의 꾹 다문 입술에서 현실 인식의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여주인의 영욕의 삶이 과거이듯이 노파의 고난한 삶도 이젠 ‘과거’인 것이다. 모든 것을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은 모두에게 공평하다.

‘훌륭한 가문, 생전의 부와 명예, 작가적 명성, 만년의 내려놓는 삶’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톨스토이다. 그림 속 풍경도 레프 톨스토이의 영지 야스나야 폴랴나를 연상시킨다. 야스나야 폴랴나는 톨스토이 생전에도 작가들이나 유명인사들이 많이 방문했던 곳이다. 러시아 상징주의 작가였던 솔로구프(본명: 표도르 쿠지미치 테테르니코프, 1863∼1927)가 야스나야 폴랴나를 방문했을 때 신혼의 행복에 젖은 톨스토이를 보고 “선생님은 정말 행복하십니다. 선생님은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십니다······”라고 부러움을 내비치자, 톨스토이는 “아닐세,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사랑하고 있다네”라고 대답했다.

그랬던 톨스토이도 평생을 사랑했던 야스나야 폴랴나와 아내 소피아, 자녀들, 그리고 자신이 가졌던 모든 것을 떠나 아스타포보 역에서 객사한다. 역장의 집에서 죽어가던 톨스토이가 장녀인 타티야나에게 마지막으로 읽어달라고 한 책은 자신이 집필한 『인생이란 무엇인가』의 ‘10월 28일’이었다. 타티야나의 회상에 따르면 톨스토이에게는 28이란 숫자는 특별한 의미였다. 1828년 8월 28일에 태어났고, 군대에 들어간 날이 28일이었고, 《현대인》의 주간이 톨스토이의 처녀작인 『유년시절』을 발표하겠다고 알리는 편지도 28일에 도착했다. 맏아들 세르게이가 태어난 것도 28일이었고 그가 집을 나간 것도 1910년 10월 28일이었고 82세(28의 거꾸로)에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중 10월 28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글들이 있었다.

“행복에 길들여져서는 안 된다.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잃는다는 생각에, 그리고 행복한 사람은 괴로워진다는 생각에 길들여져야 한다.”(쉴러)

“고통의 감각이 우리 육체의 보전에 없어선 안 되는 조건인 것처럼, 마음의 고뇌는 우리 영혼의 보전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조건이다.”

“우리가 행복이라고 일컫는 것도, 또 불행이라고 일컫고 있는 것도, 우리가 그것을 시련으로 받아들인다면 똑같이 우리에게 유익하다.”

“형벌로 결코 죽지 않고 영원히 계속 살도록 운명 지어진 방랑하는 유대인의 전설이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형벌로 아무 괴로움도 모르는 일생을 보내도록 운명 지어진 사람의 전설이 있다면, 그것 역시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로 살아가며 겪는 고난에 대한 것들이다.

그 글을 듣고 “집을 떠날 때 이 페이지를 읽지 않았구나”라고 톨스토이가 말했다고 딸은 회상했다. 아쉬움과 여운이 남는 말이다. 풍요롭고 빈틈없는 삶을 살았던 그의 인생도 죽음의 문턱에서는 회한이 남았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작가는 임종을 지키던 아들 세르게이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 “나는 진리를 사랑한다”였다. 유한한 인간이기에 더욱 영원한 진리에 매달리게 되는 것일까. 톨스토이는 평생을 진리와 함께하고자 하였기에 유한한 모든 것들 속에서 아직 살아있는 존재인 것 같다.

하지만 우리 곁에 글로 남은 톨스토이의 인생도, 19세기 말 풍경으로 남은 이름 모를 여인들의 삶도 그들이 해쳐간 길은 너무 다르지만, 〈모든 것은 과거에〉란 제목처럼 부와 명예도, 사랑도, 행복도, 고통도, 고난도 모두 지나간다는 것을 보여준다. 떠나보내는 일에 익숙해져야 하는 인간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어제와 다른 봄 햇살 아래 앉아 그저 노곤한 몸을 데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톨스토이의 묘

야스나야 폴랴냐의 비석도 십자가도 없는 〈톨스토이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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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전의 방탕한 생활과 군대 생활, 살인, 폭력, 간음, 몇 번의 자살 시도까지 경험했던 대작가 톨스토이가 내린 결론은 ‘삶은 계속 된다’였다. 그러면 어떤 모습으로 계속되는 것일까? 현재 생명력의 ‘좌우/앞뒤’에는 죽음이 자리 한다. 그리하여 죽음을 과장할 필요도 없고, 죽음을 거부할 필요도 없다. 자연스럽게 삶을 죽음과 연계시키고, 그 안에서 삶의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 그러므로 역시 삶을 과장할 필요도 없고, 지나치게 집착해서서도 안 된다. 평범하고 자연스럽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면서 삶의 모습을 죽음으로 이어가는 것, 이것이 삶의 계속됨의 모습이다. 과장하지 말 것, 두려워하지 말 것, 피하려 하지 말 것, 집착하지 말 것, 이것이 ‘이성’을 거친 삶의 모습들이다.

톨스토이는 1895년 일기에서 마치 유언처럼 “가능하다면, 사제들이나 교회의 장례 절차 없이(장사지내라). 그러나 만약 장사를 치르는 사람들이 그런 점을 용인할 수 없다면 그냥 보통 장례식처럼 하게 내버려두지만, 가능한 한 검소하고 간단하게 해라”라고 적었다. 그의 바람대로 비석도, 십자가도 세우지 않은 그의 묘는 야스나야 폴랴나의 뜰에서 조용한 안식을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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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희 집필자 소개

한국외국어대학교 노어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모스크바 국립 대학교에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월간《한국산문》으로 수필가로 등단했으며, 한국문인협회·한국산문작가협회·한국..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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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읽는 러시아
그림으로 읽는 러시아 | 저자김은희 | cp명이담북스 도서 소개

러시아 현대 미술의 걸작을 통해 아름다운 예술의 나라 러시아를 소개한다. 러시아의 자연과 풍경, 역사와 문화, 음악, 신앙, 민중 생활상 등으로 작품 하나하나를 설명하..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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