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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시기 | 1851년∼185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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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파벨 페도토프 |
흥미로운 상태
러시아에선 임신한 상태를 ‘흥미로운 상태에 있다’ 또는 ‘상태에 있다’라고 말하는데, ‘재밌는, 흥미로운’이란 뜻의 ‘interesnyj’라는 단어가 사람을 수식할 때는 ‘매력적인’이란 뜻도 되니 ‘매력적인 상태에 있다’라는 말도 된다. 임산부는 자신의 상태를 흔히 ‘아기를 기다리고 있다’라고 말한다. ‘흥미로운 상태에 있는’ 여인의 운명을 가장 아름답고 애처롭게 표현한 그림이 페도토프의 〈어린 과부〉이고 임신한 여인에 대한 영화가 1999년에 개봉된 타지기스탄 영화 〈달아빠〉이다.
임신을 했음에도 가냘프고 마른 앳된 여인이 눈물이 마르지 않은 얼굴을 기울인 채 손수건을 든 손을 배 위에 올려놓고 서랍장에 기대어 서 있다. 서랍장 위에는 남편의 초상이 놓여 있고 그 곁에 성상화가 자리하고 있다. 여인의 모습은 자신의 운명을 힘없이 받아들이고 조용히 감내하는 청순함과 순수함으로 보는 사람의 마음에 애처로움을 더한다.
페도토프가 이 그림을 그린 것은 여동생 류빈카의 운명 때문이었다. 류빈카의 남편은 파산해서 빚만 남긴 채 임신한 아내를 두고 죽어버린다. 그런 여동생의 운명은 페도토프로 하여금 붓을 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페도토프는 여동생과 제부의 초상을 그림에 옮기지는 않았다. 서랍장 위의 남편 초상에는 제복 입은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었고, 어린 과부의 얼굴 부분을 제외하고 그림을 마친 페도토프는 과부의 얼굴을 찾으려고 스몰렌스키 수도원 묘지 등에서 슬퍼하고 있는 젊은 여인들을 살피기도 했다. 그런데 이 초상의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페도토프가 친구와 함께 한 콘서트에 갔다가 거기서 젊은 여인을 우연히 보게 되는데 그 여인의 눈매와 모습을 그려 넣게 된 것이었다. 그렇지만 페도토르는 이 그림에 만족하지 못했다고 한다. 어린 과부의 모습이 고통에 순응하고 너무 고통에 녹아버린 느낌이어서 잔혹한 운명에 맞서는 고양된 정신성과 나약한 육체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이 그림이 잔혹한 운명에 녹아든 여인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면 영화 〈달아빠〉는 잔혹한 운명에 맞서는 여인을 코믹하면서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다.
영화는 태아인 ‘하비불라’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까지 자신의 엄마에게 일어났던 일을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1999년 러시아 · 독일 · 스위스 · 오스트리아가 참여하여 바흐티요르 후도이나자로프 감독이 중앙아시아의 타지기스탄에서 제작하였다. 저예산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 ‘각본상’, ‘감독상’ 등을 수상하였다.
여주인공 ‘마믈라카트’ 역을 맡은 1975년생 ‘출판 하마토바’는 카잔 태생으로 젊은 나이에 이미 ‘러시아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고, 2005년 러시아에서 TV 시리즈물로 제작된 〈닥터 지바고〉에서 ‘라라’ 역할을 맡는 등 다수의 영화와 연극에 출연한 러시아의 대표적 여배우다.
중앙아시아의 바닷가 어느 마을 파르호르에 사는 마믈라카트는 ‘추수’라는 시골 공연팀에서 ‘수박’ 역할을 맡아 연기와 춤을 하며 연극배우로서의 꿈을 키우는 18세 소녀다. 세상에서 무엇보다도 ‘연극’을 좋아하는 마믈라카트는 전쟁에 참여한 후 정신이상이 된 오빠와, 마믈라카트를 낳다 아내가 죽은 후 혼자서 두 아이를 키워낸 홀아버지와 함께 살며, 카페에서 일한다. 마을에 유랑극단이 도착하는 날 연극을 보고 싶어 하는 딸과 아들을 데리고 집에서 기른 토끼를 팔러 갔던 아버지는 미안한 마음에 토끼 판 돈으로 흰 원피스를 딸에게 선물하고 연극을 볼 것을 허락한다. 그러나 마믈라카트가 도착한 야외극장에서는 순회공연이 끝나버렸고 돌아오는 밤길에 여러 연극 대사들을 읊조리는 목소리에 이끌려, 자신을 ‘27세의 연극배우’라고 소개한 한 남자에게 겁탈을 당한다. 어두운 달밤에 그의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목소리와 배우라는 말만을 기억한 채 집으로 돌아온 마믈라카트는 그 일로 임신을 하게 된다.
그날 보려고 했던 연극이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오셀로〉였고, ‘오셀로’가 간악한 신하의 이간질하는 목소리에 속아 아내 데스데모나의 정절을 의심하여 결국 아내를 죽이고 자신도 자결하는 비극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 그의 목소리에 현혹되어 인생이 뒤바뀌게 된 상황이 우연은 아니다.
마믈라카트는 임신 사실을 알고 여자친구와 함께 마을의 유일한 의사를 찾아가서는 상황을 말하고 중절수술을 부탁한다. 다리를 올려놓게 되어 있는 산부인과 침대 의자에 손을 올려놓고 거꾸로 엎드려 눕는다. 순진하고 어린 소녀를 수술한다는 것이 안쓰러웠던지 잠시 머뭇거리던 나이든 의사는 병원 앞 아이스크림 행상 아주머니에게 두 처녀에게 줄 아이스크림을 사러 나간다. 아직 내전이 멈추지 않는 복잡한 중앙아시아의 국내 상황을 반영해주듯이, 거기서 의사는 우연한 총격전에 휘말려 목숨을 잃게 되고, 마믈라카트는 배 속 아이를 중절할 기회를 잃게 된다.
“애 아빠만 찾으면 떳떳하게 결혼하고 아이를 낳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아버지를 따라 정신병자 오빠와 함께 마믈라카트는 낡은 왜건을 타고 애 아빠를 찾아서 셰익스피어의 〈오셀로〉 연극을 하는 순회 공연단을 따라 전국을 떠돌게 된다. 그 달밤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 ‘애 아빠 찾아 삼만리’가 시작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노잣돈이라도 보태려고 마믈라카트는 헌혈하면 5달러를 준다는 광고를 보고는 구급차로 위장한 불법 매혈을 하는 곳을 찾아가게 되고 흰 가운을 입은 ‘알리크’를 만나게 된다. 단속을 나온 경찰에 쫓겨 마믈라카트는 매혈을 못하게 되었지만, 임신한 여자가 매혈하려는 딱한 처지를 가늠한 알리크가 쥐여 준 5달러를 들고는 그를 좋은 의사라고 착각하게 된다.
‘27세 연극배우 아빠’를 찾는 각고의 노력은 모두 실패로 끝나고 더 이상 아버지와 오빠를 힘들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한 마믈라카트는 막달의 배를 안고 혼자 길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여행길의 기차 안에서 카드노름을 하다 사기 시비에 걸려 곤경에 빠진 알리크를 다시 만나게 된다. 알리크를 살리려고 마믈라카트는 다급한 마음에 ‘애 아빠’라고 거짓말을 하게 되면서, 자신을 ‘좋은 의사선생님’으로 알고 목숨을 구해준 마믈라카트와 협잡꾼 알리크는 사랑에 빠진다. 그 둘은 결혼하기로 약속하고 고향으로 함께 돌아온다. 드디어 ‘애 아빠’를 찾았다며 기뻐하는 아버지는 곧장 혼인식을 준비한다. 마을 사람들도 그동안의 멸시와 천대를 뒤로하고 축하해 주며 만삭의 신부와 신랑의 선상 결혼식이 시작된다.
그러나 아름다운 만삭의 신부 마믈라카트의 결혼식에서 아버지와 알리크가 사진을 찍으려던 순간, 하늘에서 별안간 소가 떨어져 덮쳐서 바다에 빠져 익사하고 만다.
정신병자 오빠와 단둘이 남겨진 마믈라카트는 다시 카페에서 일을 하게 된다. 어느 날 카페에 우연히 몇 번 들렀던 여객수송기 조종사가 ‘얼마 전에 소를 운반하다가 비행기가 균형을 잃어 바다 위에서 소를 떨어뜨려버렸다’는 일화를 동료들에게 웃고 떠들며 얘기하는 것을 듣게 되고 그가 바로 아버지와 신랑을 죽인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데 그 여객수송기 조종사도 그녀를 알아보고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듯이 황급히 그녀의 뒤를 쫓는다.
그가 바로 그 달밤에 셰익스피어의 연극 순회 공연팀 배우들을 싣고 왔던 조종사였고 자신을 배우라고 속이고 소녀를 범했던 인물이었다. 아버지와 신랑의 원수를 갚고자 집으로 돌아와 권총을 찾아 조종사에게 겨누던 마믈라카트에게 자신이 바로 그날 밤의 ‘배우’라고 밝히지만 그녀는 그 사실에 더욱 치를 떨게 되고 그에게 총을 쏘지만 총을 피한 그는 깊은 잠에 빠져들어 버린다.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는 조종사와 정신병자 오빠와 마믈라카트의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고, 마을 사람들은 그 사람이 깊은 잠에 빠졌다 하더라도 애 아빠라면 그와 결혼해야 한다고 마믈라카트를 압박한다. 마을 사람들에게 쫓기던 만삭의 마믈라카트를 오빠는 지붕 위로 올려 보내고 마을 사람들을 저지하는 사이 마믈라카트는 오빠의 바람과 상상대로 지붕을 타고 하늘로 날아가며 진통을 시작한다. 영화는 하늘로 날아가며 바다 위를 빙빙 도는 지붕 위에서 마믈라카트 배 속 태아 하비불라가 “자, 이제 제가 세상에 태어날 차례입니다”라는 멘트로 끝이 난다.
『닥터 지바고』에서 지바고의 아이를 낳은 토냐를, “항구에 입항하여 짐을 다 부리고 나서 항구에서 쉬고 있는 범선”에 비유하며 “한 영혼을 부두에 내려놓고 빈 배로 조용히 정박하고 있다”고 묘사했듯이 마믈라카트도 하비불라를 세상에 내어놓고는 이제는 정히 쉴 수 있기를 바라본다. 마믈라카트가 그렇게도 좋아했던 셰익스피어가 ‘인생은 연극이다’라고 했듯이 때로는 희극으로, 때로는 비극으로 치달았던 길고 긴 ‘흥미로운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순간이다.
영화에 ‘우리의 어머니들에게’란 헌사가 붙은 것도, 여주인공의 이름이 ‘맘’을 연상시키는 ‘마믈라카트’인 것도, 그 모든 나름대로의 ‘흥미로운 상태’를 겪고 기어이 세상에 한 사람을 배출시킨 모든 어머니들에 대한 경의를 표한 것이 아닌가 싶다.
파벨 페도토프
파벨 페도토프(1815∼1852)는 러시아의 풍속화가이다. ‘러시아의 호가스’로 알려질 만큼 19세기 중엽 러시아 민중의 삶을 특유의 해학과 풍자로 그렸다.
1815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은퇴한 장교의 아들로 태어났다. 모스크바 제1군사학교를 졸업하고 19세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근위대에서 장교로 군복무를 했다. 그림에 관심이 있었던 그는 밤에는 미술아카데미에서 드로잉 수업을 청강했다. 1843년 그의 나이 28세 되던 해 10년간 복무하던 부대에서 전역을 신청하고 화가로서의 삶을 선택했다.
파벨 페도토프는 제대 후 미술아카데미에 등록하여 그림공부를 계속했다. 그리고 모스크바에 있는 식구들을 부양하기 위해 가까운 친구들과 친척들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초상화는 복잡하지 않고 단순 명료했다. 특히 인물의 내면을 묘사하는 데 탁월했으며, 삶 속에 녹아 있는 진솔한 모습을 담아내는 것에 열중했다.
페도토프는 1846년부터 유화로 작업을 시작했다. 이전에는 연필과 수채화를 이용했다. 그는 유화를 재료로 하여 러시아 민중의 삶을 담아내는 풍속화를 그려 나갔다. 여기에는 19세기 중반 러시아 부르주아에 대한 풍자와 비평이 짙게 깔려 있다. 당시 진보적인 문필가 및 평론가들과 어울렸던 그는 그림으로 삶의 진실과 모순을 드러내고자 했다. 비록 현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바탕에 두고 있지만 그의 그림은 위트와 유머로 웃음을 짓게 한다. 페도토프는 1852년 37세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정신병원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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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현대 미술의 걸작을 통해 아름다운 예술의 나라 러시아를 소개한다. 러시아의 자연과 풍경, 역사와 문화, 음악, 신앙, 민중 생활상 등으로 작품 하나하나를 설명하..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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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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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어린 과부 – 그림으로 읽는 러시아, 김은희, 이담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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