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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39년, 경북 봉화(奉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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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00년 11월 23일 |
본관 | 안동(安東) |
주요활동 | 1896년 안동의진 초모장, 부장으로 활동 |
포상훈격 | 2011년 건국포장 |
관련 인물/단체 | 안동의진 |
1839년 경상북도 봉화군(奉化郡) 봉화면(奉化面) 유곡리(酉谷里)에서 아버지 권정하(權定夏)와 어머니 한양 조씨漢陽趙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단 1936년 출생했다는 의견이 있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경덕(景德)이며, 호는 소허재(素虛齋)이다. 충정공(忠定公) 충재(冲齋) 권벌(權橃)과 청암(靑巖) 권동보(權東輔)의 후예로 증조부는 권해도(權海度), 조부는 권재구(權載球)이다.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92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正言), 홍문관 교리(校理), 세자시강원 시독관(侍讀官) 등을 역임하였다.
1896년 1월 20일 거의한 안동의진(安東義陣)의 창의장에 추대된 권세연(權世淵)이 1월 21일 안동의진의 지휘부를 편성할 때 초모장(招募將)에 임명되었다. 안동의진의 지휘부를 기록한 『안동의소파록(安東義所爬錄)』에 의하면, 대장 권세연, 부장 곽종석(郭鍾錫), 중군장 유완(柳碗), 선봉장 김옥서(金玉瑞), 우익장 권용현(權用賢), 좌익장 이운호(李運鎬), 좌부장 이선호(李宜鎬) 등을 주축으로 진용을 편성하였다. 이때 안동의진의 초모장으로서 순흥의진(順興義陣) 창의장 홍종선(洪鍾善) 휘하의 부약장(副約長) 겸 초모장 신태운(申泰雲)과 함께 영월에 주둔하던 호좌의진(湖左義陣)의 소모장 서상열(徐相烈)을 방문하여 호좌의진의 영남 진출을 독려하는 활동을 하였다.
1896년 3월 12일 권세연이 전투에서 패한 책임을 지고 의병장을 사퇴한 뒤, 3월 14일 척암(拓庵) 김도화(金道和)가 의병장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3월 29일 태봉전투(胎峰戰鬪) 패배 이후 4월 2일 회진한 안동의진은 안기역(安奇驛)에 주둔하게 되었다.
이때 안동의진을 추격한 대구의 일본군 제3대대 소속 병력 50여 명과 순검들의 방화로 안동부가 불타고 말았다. 각처를 전전하던 안동의진은 4월 25일 봉정사에서 재기하고자 진용을 정비하였다. 패배한 의병부대를 재건하기 위해 1896년 4월 25일 안동의진의 부장(副將)에 임명되었다. 이때 안동의진은 흥해의 최세윤(崔世允)을 좌익장, 영양의병장 김도현(金道鉉)을 부장, 호좌의진의 서상열을 군사, 이긍연(李兢淵)을 종사관으로 임명하였다. 이처럼 안동의진이 일어나 의병진을 해산할 때까지 초모장 ・ 부장 등의 주요 직책을 담당하며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안동의진 해산 이후에는 상경하여 관직 생활을 지속하였다. 1899년 6월 홍문관 시독(侍讀), 1900년 7월 중추원 의관(議官)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1900년 6월 중추원 의장에게 「헌의서(獻議書)」를 올려 난적(亂賊) ・ 난신(亂臣)들을 엄히 다스려야 한다고 건의하는 등 국권 회복을 위한 언론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유고로 『소허유고(素虛遺稿)』가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집필자 : 권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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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安東義所爬錄』
- ・ 金鼎燮, 『日錄』
- ・ 국사편찬위원회, 『關東倡義錄』, 1984
- ・ 국사편찬위원회, 『韓末義兵日記』, 2003
- ・ 권대웅, 『경북독립운동시』Ⅰ(의병편), 경상북도안동문화연구소, 2012
출처
<독립운동가의 업적을 인명사전으로> 3.1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하여 그동안 축적된 연구기반 위에서 독립운동가의 업적을 사전적으로 종합, 정리하기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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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권옥연 –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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