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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1년 8월 10일, 서울 용산(龍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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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32년 10월 10일 |
관련 사건 |
일왕 처단 의거 |
본관 | 전주(全州) |
주요활동 | 1931년 12월 한인애국단 가입, 1932년 1월 8일 일본 도쿄 경시청 앞에서 일왕 처단 시도 |
포상훈격 |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
관련 인물/단체 | 한인애국단 |
1901년 8월 10일 서울 원정(元町, 현 용산구 원효로)에서 부친 이진구(李鎭球)와 어머니 손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의거 중에 기노시타 쇼죠(木下昌藏), 아사야마 쇼이치(朝山昌一) 등의 이름을 사용하였다.
8세부터 약 3년간 한문을 배운 뒤 용산에 있는 사립 문창학교(文昌學校)에 입학하여 4년 과정을 마쳤다. 문창학교를 졸업한 후 14살 때 일본인 와다(和田)가 경영하는 와다에이세이도(和田衛生堂) 과자점 점원으로 취직하였다. 2년간 과자점에서 일을하다가 수입이 좋은 서울 한강통(漢江通)의 무라타 시게가스(村田卯一)가 경영하는 약방으로 옮겼다.
이곳 약방에서 먹고 자고 월급으로 10원 외에 판매 배당이 있어 월 13~14원 정도 벌었으나 약품 주문이 서툴러 그만두었다. 얼마 뒤 용산역의 용인(庸人)으로 채용되어 연결수(連結手) 역부(役夫)가 되었다. 이 곳에서 민족적 차별을 받아 몇 년이 지나도 승급을 하지 못하자, 1924년 4월 14일 그만두었다.
용산역을 그만둔 후 일본에 가면 민족적 차별도 없고 돈도 벌 수 있다는 말을듣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1925년 11월 오사카(大阪)에 도착하였으나 사기를 당하는 등 쉽사리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926년 2월 다케다구미(武田組) 오다(小田金三郞)에게 고용되어 오사카가스회사에서 상용 인부로 일을 하게 되었다. 1928년 2월경 스미토모신동소(住友伸銅所) 아마가사키(尼ケ崎)출장소의 상용 인부로 취직했으나 ‘한국인’이기 때문에 민족차별을 받았다.
1928년 11월 10일 일왕 히로히토(裕仁)의 즉위식을 구경하기 위해 친구 2명과 함께 오사카에서 교토(京都)로 갔다가 아무런 이유없이 11일간 유치장에 구금된 일이 있었다. 이때부터 독립운동에 투신할 결심을 하였다. 그리하여 1930년 12월 11일 오사카 지코(築港)에서 가사기마루(笠置丸)를 타고 중국 상하이(上海)로 갔다.
1931년 1월 중순경 상하이 프랑스조계 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김구(金九)를 만나자, “혹시 폭탄이라고 손에 넣으면 이것을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가 신명을 걸고라도 일본 천황 폐하를 죽여 조선의 독립을 촉진하려는 생각을 갖기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 뜻을 털어 놓으며 나의 굳은 결심을 밝혔”다. 김구는 그의 비범(非凡)함을 보고 “의기남자(義氣男子)로 살신성인(殺身成仁)할 큰 결심을 품고 일본에서 상해로 건너와 임시정부를 찾아”왔다고 확신하였다.
이후 그는 상하이 훙커우(虹口)지역에서 일본인으로 행세하면서 일본인들의 의심을 풀고있었고, 김구는 폭탄과 자금을 준비하였다. 폭탄은 중국군으로 복무하며 상해병공창 주임을 맡고 있던 김홍일(金弘壹, 중국명 王雄)을 통해서 폭탄 1개, 그리고 허난성(河南省)의 중국인 류즈(劉峙) 장군에게서 폭탄 1개 등 모두 2개의 수류탄을 마련하였다.
거사자금은 1931년 11월 15일 임성우(林成雨) 등 하와이애국단 간부들이 특무공작에 대한 지원금으로 보낸 1천 달러로 충당하였다. 1931년 12월 13일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하여 제1호 단원이 되었다. 폭탄을 양손에 1개씩 들고 두 손을 가슴 높이 들어 올리고, 선언서를 가슴에 걸고, 태극기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한인애국단은 비밀 결사체로 김구가 특무활동을 준비하고 계획하는 과정에서 결행할 인물을 선정하고, 상호 충분한 협의를 거쳐 태극기 앞에서 입단 선서문을 목에 걸고 사진을 촬영하는 것으로 입단식을 대신하였다. 이봉창을 일본 도쿄(東京)로 파견하기전인 1931년 12월 6일 밤 김구는 임시정부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이봉창이 일왕을 폭살시킬 계획을 보고하였다. 이에 대해 조소앙과 김철은 경비만 들 뿐이고 성공 가망성이 없다고 반대하였으나, 국무위원 전원이 승인하였다.
- 1이봉창 선서장면
- 2이봉창 한인 애국단 선서문
1931년 12월 17일 오후 3시 일본 우편선 고오리가와마루(氷川丸)를 타고 19일 밤 8시경 고베(神戶)항에 도착하였다. 고베 도착후 한신(阪神) 전차를 타고 오사카로 가미나토구(港區) 야쿠모정(八雲町)에 있는 우메노야(梅ノ屋)여관에 숙박하였다. 12월 22일 오사카역에서 열차를 타고 오후 9시 20분경 도쿄에 도착한 뒤 다시 국철전차를 갈아타고 우에노(上野)역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아사쿠사구(淺草區) 마쓰기요정(松淸町)에 있는 오쿠하리야(尾張屋)여관에 숙박하였다.
23일 상하이의 김구에게 100원을 송금해달라고 전보를 쳤다. 전보를 받은 김구는 상하이에 있는 일본 쇼긴은행(正金銀行)으로 가서 백정선(白貞善)이라는 가명으로 도쿄에 있는 기노시타 쇼죠(木下昌藏) 앞으로 100엔을 부치고 바로 돈을 보냈다는 전보를 보냈다.
12월 28일 『도쿄아사히신문(東京朝日新聞)』에서 1932년 1월 8일 요요기(代代木) 연병장에서 일왕이 참석하는 관병식이 거행된다는 신문기사를 본 뒤, 그날 거사를 결행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김구에게 “상품은 1월 8일 꼭 팔릴 터이니 안심하라”는 전보를 보내 거사일을 알렸다.
1월 4일 쇼긴은행에서 100엔을 찾았고, 다음날 김구로부터 회답 전보가 오기를 기다렸다. 1월 6일 아침 8시 반경 여관을 나와 도쿄 우에노역에서 국철전차를 타고 요요기 연방장으로 갔다. 거사를 실행할 현장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요요기 연병장이 너무 넓은 탓에 일왕에게 접근하여 폭탄을 던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일왕이 관병식장으로 갈 때나 돌아올 때 일왕에게 폭탄을 던지기로 결정하였다.
그날 오후 4시 반경 오쿠하리야 여관을 나와 시타가야구(下谷區) 시모쿠루정(下車坂町)에 있는 아사히(朝日)호텔에 아사야마 쇼이치(朝山昌一)라는 이름으로 투숙하였다. 1월 7일 지하철 매점에서 산 엿상자에 폭탄을 1개씩 종이로 싸서 두 상자에 넣어 보자기로 싼 뒤 경찰의 검문을 피하기 위해 도쿄 외곽의 가와자키시(川崎市)의 다마키로(玉木樓) 유곽에 묵었다.
1월 8일 아침 8시 다마키로 유곽을 나와 가와자키역에서 국철전차를 타고 도쿄 시내 시나가와(品川)역에서 내렸다. 8시 50분경 그곳에서 하라주쿠(原宿)로 가는 전철로 갈아탔다. 하라주쿠역에 내린 것은 일왕이 육군시관병식장에 들어가고 나오는 것을 기다리다가 하라주쿠역 부근에서 폭탄을 던지려고 계획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명의 형사가 하라주쿠역 근처에서 경비를 서자, 거사를 일으키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다시 국철을 타고 일왕 행렬이 지나갈 것으로 생각되는 요쓰야미쓰케(四谷見附)로 갔다. 그곳에 도착하여 신문팔이에게 일왕 행렬이 지나가는지 물어 보았더니 이곳을 지나가지 않고 아카사카미쓰케(赤坂見附)로 지나간다고 했다.
이에 공동화장실로 가 보자기를 풀고 종이상자에서 폭탄을 꺼내 양쪽 주머니에 1개씩 폭탄을 넣고 아카사카미츠케로 갔다. 오전 10시경 아카사카미츠케에 도착하여 청소부에게 일왕 행렬에 대해 물었다. 청소부는 일왕이 이미 이곳을 통과하여 요요기 연병장으로 향했다고 대답하였다.
- 1경시청 건물
- 2법정으로 가는 이봉창
이에 그는 일왕이 관병식에서 돌아올때를 기다리기 위해 택시를 타고 미야케사카(三宅坂)를 지나 도쿄 경시청(警視廳) 부근에서 내렸다. 일왕의 행렬 주변에는 경계가 삼엄하여 다시 경시청 후면에서 경관의 심문을 받고는 무사히 경시청 정문 현관 앞의 잔디밭에 다다랐다. 경시청 앞에는 일왕의 행렬을 보기 위해 많은 인파로 겹겹이 쌓여 있었다. 인파를 뚫고 나아가 일왕의 행렬을 기다리고 있었다.
첫번째 마차는 의장대가 선도하고 있었는데 한 사람만이 타고 있어 일왕이 아닌 것으로 판단하였다. 첫 번째 마차는 지나가고 두 번째 마차가 앞을 지나가자, 이 마차에 일왕이 타고 있다고 생각한 뒤 오른쪽 주머니에 있던 폭탄을 던졌다. 폭탄을 던진 정확한 시간은 1932년 1월 8일 오전 11시 44~45분이었다. 폭탄은 두 번째 마차 뒤쪽 마부가 서 있을 수 있는 대(臺)에 떨어지며 엄청난 소리를 냈다. 그러나 두 번째 마차는 일왕의 마차가 아니라 일왕을 수행하던 궁내대신 이치키 기토쿠로(一木喜德郞)의 마차였다.
일본정부는 폭탄 투척장소를 ‘사쿠라다문 밖(櫻田門外)’이라고 발표하였으나 사건의 발생지는 사쿠라다문 부근이 아니고 경시청 청사 정문 현관 앞이었다. 폭탄이 터지자 주위의 참관자들은 모두 흩어졌고 두 번째 마차는 그대로 달려가고 있었다. 폭탄의 파편은 마차 몸통 아래에 1개의 구멍을 내고 약간의 손상을주고, 수행하던 기수(旗下士)와 근위기병(近衛騎兵)이 탄 말 각 1필에 약간의 창상을 입혔을 뿐이었다.
폭탄의 폭발음으로 사방에 있던 사람들이 흩어지고 제복을 입은 순사가 그의 뒤에 있는 작업복 비슷한 무명 옷을 입은 남자를 체포해 경시청으로 데리고 가려고 하였다. 그때 이봉창은 엉뚱한 사람이 잡혀가는 것을 보고 “아니다. 나다”라고 말하며 자신이 범인임을 밝혔고, 이에 따라 그 순사에게 체포되어 경시청으로 연행되었다.
일제는 이 사건을 ‘불경사건(不敬事件)’으로 규정하였고, 형사부장실에서 일절 외부와 연락이 차단된 가운데 도쿄지방재판소의 미야기 나가고로(宮城長五郞) 검사정으로부터 취조를 받았다. 검찰은 사건보고서가 작성되자마자 형법 제73조에 규정된 ‘황실에 대한 범죄자’, 즉 ‘대역죄(大逆罪)’로 대심원(大審院)에 예심을 청구했다.
1923년 일왕에게 위해를 가한 난바 다이스케(難波大助) 사건과 같이 ‘대역죄’로 다루어야만 한다고 결정되었다. ‘대역죄’는 일반 범죄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그래서 일제검찰은 대심원에 예심을 청구하였다. ‘도쿄의거’ 직후 일제는 사건 배후가 김구라는 것을 확신하고 체포에 착수하는 한편, 프랑스조계 당국에도 체포에 협조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무라이 구라마쓰(村井倉松) 상하이 일본총영사는 이봉창 의거 다음 날인 1월 9일 프랑스 총영사와 회견하고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을 체포하여 인도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의거 이후 일본정부는 문관고등징계위원회를 열어 책임자를 징계 처분하였다. 경시통감(警視統監) 죠 엔넨(長延連)이 휴직 처분을 당하였으며, 도쿄부지사(東京府知事) 하세가와 규이치(長谷川久一)를 경시총감에 임명하였다.
경시청 경무부장 다케다 이치로(大竹一郞)는 책임을 지고 사표를 제출하였고, 고지마치(麴町)경찰서 다무라(田村英雄), 경보국장 모리오카 지로(森岡二郞) 등 관련자들이 징계처분을 받았다.
그는 1932년 1월 8일 체포되어 6월 27일까지 9차례에 걸쳐 예심판사의 신문을 받았다. 일왕의 목숨을 빼앗을 심산으로 거사를 거행하였다고 하면서 자신의 거사가 정당함을 당당히 표명하였다. 첫 번째의 공판은 9월 16일 대심원 제2특별형사부 법정에서 개최되었고, 두 번째 공판은 9월 30일 대심원 제2특별형사부에서 일반인들에게 공개로 열렸다.
와니 데이키치(和仁貞吉) 재판장은 미리 준비한 판결문을 읽어 내려 가다가, “피고인 이봉창을 사형에 처한다”고 선고하였다. “피고인의 행위는 형법 제73조 천황에 대해 위해를 가한 죄에 해당함과 함께 폭발물 취체 벌칙 제1조의 죄에 해당하는 것이나, 형법 제54조에 의해 무거운 전자(前者)의 형으로 처단함”이라는 예정된 각본에 의해 사형을 언도하였다.
일제는 이봉창을 이른바 ‘대역죄’라는 명목으로 사형을 선고하고, 1932년 10월 10일 도쿄의 이치가야(市ケ谷) 형무소에서 사형을 집행하였다. 그의 유해는 사이타마현(琦玉縣) 우라와시(浦和市)의 우라와형무소 묘지에 매장되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중국 충칭(重慶)의 임시정부도 환국하게 되었다. 그해 11월 23일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하자, 김구는 이봉창과 윤봉길, 그리고 백정기(白貞基) 세 의사의 유해를 고국으로 봉환해 왔다. 우라와형무소 부속묘지에 묻혀있던 이봉창의 유해는 국내에 봉환되어 1946년 7월 6일 효창원에 봉안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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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의 업적을 인명사전으로> 3.1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하여 그동안 축적된 연구기반 위에서 독립운동가의 업적을 사전적으로 종합, 정리하기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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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이봉창 –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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