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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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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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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57년, 함북 온성(穩城)
사망 1944년 3월 20일
관련 사건 간도참변, 자유시참변
주요활동 1912년 간민교육회 참여, 1913년 간민회 창립, 1919년 조선독립기성회 회장, 대한국민회 회장으로 활동, 1920년 대한북로독군부 조직, 간북남부총판부 총판, 1921년 독립군총합부, 1925년 적기단 고문
포상훈격 1996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관련 인물/단체 간민교육회, 간민회, 조선독립기성회, 대한국민회, 간북총판부, 총합부

1857년 함경북도 온성군(穩城郡) 미포면(美浦面) 풍인동(豊仁洞)에서 태어났다. 호는 북은(北隱)이다. 고향에서 한학을 공부하였고 1886년에는 하급 군졸로서 온성군 영달진(永達鎭)에서 근무하였다. 이후 서울로 올라가 궁궐수비대 병정이 된 후 남대문 수문장으로까지 승진하였다.

구춘선

ⓒ 독립기념관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청일전쟁과 을미사변 직후인 1895년 향리로 돌아왔다. 1897년 북간도로 이주하여 온성 대안(對岸)인 북간도의 양수천자(凉水泉子)에 보호소와 병영을 설치하고 한인 농민들을 보호하였다. 1907년 캐나다장로회 선교사 그리어슨(Robert Grierson)을 만나 기독교에 입교하였고, 룽징(龍井)에 중앙교회(中央敎會)를 세웠다.

간민교육회 제2회 교원강습호 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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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에서 한인 자제들의 교육 진작을 위해 1912년 간민교육회(墾民敎育會)에 참여하였다. 특히 간민교육회 회원들이 1911년 3월 이종호의 재정적 지원으로 설립하여 3년여 동안 경영해온 왕칭현(汪靑縣) 소영자(小營子)의 길동기독학당(吉洞基督學堂)의 간사로 참여하였다. 길동기독학당의 교장은 간민교육회 회장 이동춘(李同春)이었다. 당시 교사로 참여한 계봉우(桂奉瑀)는 자신의 회고록 『꿈속의 꿈』에서 “간사 구춘선은 씩씩하고 화기스러운 맛이 있었으며” 라고 회상하였다.

왕칭현 백초구 하마탕교회 직원 야유회 기념

뒷줄 오른쪽 5번째 구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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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민교육회가 고루한 유학자와 보수적인 농민의 반대, 그리고 이를 이용한 일제의 중국 당국에 대한 외교적 압력으로 그 활동이 유명무실해지자, 간민교육회 회장 이동춘을 비롯해, 정재관 ・ 유기연 ・ 김립 등 이전 간민교육회 회원 24명과 간민회(墾民會)를 발기하고 1913년 2월 26일 창립대회를 열었다. 중국과 일본의 간섭이 한층 심해지자, 이를 피해서 왕칭현 춘양향(春陽鄕) 하마탕(哈蟆塘)으로 이주하여 한인 마을을 개척하였다. 1913년에 하마탕 교회와 학교를 설립하고 기독교를 매개로 한 민족 교육과 동포들의 생활 안정을 도모하면서 1920년 가을까지 하마탕을 활동 근거지로 삼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되자 국내외에서 3・1운동의 분위기가 고조었다. 북간도 지역의 경우 처음에는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의 독립 선언 ・ 만세 시위 운동과 보조를 같이하여 진행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국내에서 독립선언서가 발표되고 3・1운동이 개시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북간도 인사들은 의사부(議事部)를 조직하고(대회장 金永學, 부대회장 裵亨湜) 3월 13일 룽징 서전(瑞甸)벌에서 ‘조선독립축하회’를 개최하였다.

간도 국민회의 본부가 있던 마을 원경

왕칭현 하마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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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독립축하회’에서의 독립 선언과 뒤이은 만세 시위운동에는 약 3만 명 이상의 동포가 참여하였지만, 일제의 사주와 압력을 받은 중국 군경의 발포로 17명의 순국자와 30여 명의 부상자를 낳았다. 이때 이 지역의 지도자들과 함께 시위대 해산 후 국자가(局子街)에 머물면서 일본 영사관의 압력과 지시에 따라 많은 살상자를 낸 연길도윤공서(延吉道允公署)에 강력한 항의를 제기하였다. 이어 3월 28일 둥닝현(東寧縣) 나자구 삼도하자(三道河子)에서의 독립선언축하회에 김영학 등과 함께 참석하여 감동적인 연설을 하였다.

3월 13일 당일 북간도 한인 지도자들은 의사부를 조선독립기성회(朝鮮獨立期成會)로 개편하였는데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임시헌법’을 반포하자 국호의 상충을 피하기 위해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로 개칭한 이후 회장으로 활약하였다. 대한국민회는 하마탕에 소재한 총부(總部) 밑에 민정 기관으로 지방회 8개를 두었고, 지방회 밑에 130여 개 지회를 설립하였다. 오랫동안 국민회 총부의 회장으로서 국민회의 전체 조직을 총괄하였다.

국민회는 이동휘가 국무총리로 이끌던 임시정부의 독립전쟁론을 실현하기 위한 군자금 모집, 무관학교 설립, 무기 구입 등에 필요한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였다. 또한, 1919년 11월 발표된 「국민회장고유문(國民會長告諭文)」에 나타난 대로 북간도 한인 사회의 통일적 중심기관이었던 국민회는 임시정부가 효과적인 독립 전쟁을 실현하고자 추진한 북간도 무장 단체 통합 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1920년 3월 이후 7월까지 임시정부가 파견한 안정근(安定根), 왕삼덕(王三德), 이용(李鏞)의 적극적인 권유와 활동으로 북간도 모든 단체의 통합 운동이 추진되었지만, 북로군정서(대한군정서)의 불참으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1920년 3월 8~10일, 사흘에 걸쳐 하마탕에서 개최된 독립군 단체 대표 회의에 국민회를 대표하여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는 대한독립군의용대장 홍범도(洪範圖), 광복단 단장 이범윤(李範允), 김광국(金光國), 홍림(洪林), 서성권(徐成權), 황병길(黃炳吉), 전의근(全義根) 등 40여 명이 참석하였다.

북간도 제단체의 통일운동은 완전한 성공에 이르지 못하였지만, 5월 말 국민회,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간의 3단 연합에 성공하여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를 조직하였다. 3단 연합을 축으로 북로군정서를 제외한 북간도의 6개 단체가 통합에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6월 초 북간도의 독립군들이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하고 승리할 수 있었다.

1920년 7월 초 북간도 제단체의 통일을 위한 제3차 회의가 개최되어 행정기관과 군사기관의 2부제를 채택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행정기관으로 대한민단(大韓民團), 군사기관으로 동도군정서(東道軍政署)와 동도독립군서(東道獨立軍署)를 설립하는 방안이 제시되었다. 대한민단 단장에 선임되었고, 부단장은 서상용(徐相庸), 고문은 이용 등이 맡았다. 그리고 북로군정서는 동도군정서로, 대한북로독군부는 동도독립군서로 재편하기로 한 바, 동도군정서장에는 서일, 사령관에는 김좌진, 동도독립군서장 및 사령관에는 홍범도가 내정되었다. 그러나 이 결정은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북로사령부 2개 단체가 찬동하지 않아 실현되지 않았다.

「국민회장고유」(『독립신문』 192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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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전투를 승전으로 이끌었던 3단 연합은 8월에 이르러 붕괴하고 말았다. 국민회는 1919년 말 이래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을 후원하고 산하에는 군무위원회(軍務委員會)만을 두었으나, 3단 연합이 붕괴한 1920년 8월 이후에는 독립적으로 대한국민군(사령관 안무(安武))을 창설하였다. 대한국민군의 일부는 홍범도부대 등 여러 무장 단체와 연합하여 청산리대첩에 참전하였다. 북간도 독립군 단체들이 통일되지 못한 상태에서 일제의 간도 침공을 맞아서 청산리대첩을 치렀다.

청산리대첩 직전, 임시정부는 북간도 지역의 국민회,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의민단(義民團), 신민단(新民團), 광복단(光復團) 등 단체들을 통합하여 군정 ・ 민정 ・ 재정을 통일적으로 담당할 기관으로 재편을 시도하였다.

즉, 북로사령부(北路司令部, 군정), 총판부(總辦府, 민정), 재무관서(財務官署, 재정)를 조직하고 책임자(총판, 사령관, 재무관)와 직원들을 임명하였지만, 일본의 간도 침공과 청산리대첩으로 인하여 실현되지 못하였다.

북간도 지역의 총판부는 간북남부(間北南部) 총판부와 간북북부(間北北部) 총판부로 나뉘었는데, 남부 총판부는 옌지(延吉) ・ 화룽(和龍) ・ 둔화(敦化) ・ 어무(額穆) 등 지역을, 북부 총판부는 왕칭(汪淸) ・ 훈춘(琿春) ・ 둥닝(東寧) ・ 닝안(永安) ・ 무링(穆陵) 등 지역을 각각 담당하였다.

간북남부 총판부의 총판(總辦)에 임명되었고, 간북북부 총판부 총판에는 서일(徐一)이 임명되었다. 북로사령부 사령관은 임시정부가 임명할 예정이었고, 참모장으로 조성환(曺成煥)이 임명되었다. (간북)남부재무관서에는 재무관에 강구우(姜九禹), 부재무관에 김창순(金昌順)이, 북부재무관으로는 계화(桂和), 부재무관에 정남윤(鄭南允)이 각각 임명되었다. 군정 ・ 민정 ・ 재정 등 각 분야에 북간도 여러 단체의 인사가 망라되어 북간도 지역 제단체를 통일하고자 하는 임시정부의 의지가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의 간도 침공과 뒤이은 일제의 북간도 한인 사회에 대한 대학살 만행인 간도참변을 피하여 러시아 연해주로 일시 도피하였다. 안무가 이끄는 국민군 주력 부대는 일본군의 간도 침공을 피하여 청산리대첩 이전에 밀산(密山)을 거쳐 중 ・ 러 국경을 넘어 러시아 이만으로, 다시 자유시로 이동하였으나 1921년 6월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 사건을 맞게 되었다.

자유시참변 3개월 후인 1921년 9월 국민회 등 북간도 10개 단체 대표자 공동명의로 대한국민의회 당국자들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인사들의 자유시참변에 관련한 책임을 규탄하는 성토문이 발표되었다. 2명씩 대표 명의를 올린 단체는 국민회 ・ 군비단(軍備團) ・ 광복단 ・ 신민단 ・ 노농회(勞農會) ・ 공의단(公義團) ・ 농무회(農務會) ・ 의민단 ・ 청년독립단 ・ 야단(野團) 등이다. 이 성토문에 대하여 고려혁명군정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가 1921년 9월 30일 자로 반박 선포문을 발표함으로써 자유시참변의 책임 소재를 둘러싸고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당시 북간도 10개 단체의 성토문에 이봉우(李鳳雨)와 함께 국민회 대표자로 명시되어 있는 바를 지적하고 성토문에 국민회가 동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국민회장 명의의 성명서에서 “허위(虛僞)의 선전이 세상에 번번히 전파되어 우리의 통합에도 무익하고 도리어 중심(衆心)을 현(眩)하여 사업상 지장이 불소”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북간도에 잔류하였던 일부 그리고 자유시참변 후 러시아에서 귀환한 일부 국민군 병사를 규합하였다. 간민국(墾民局)이 둔화현(敦化縣)에 주둔하고 있던 일부 북로군정서 군대(지도자-李鴻來, 羅仲昭)와 국민회(지도자-許東奎)가 연합하여 조직된 후 이를 확대 개편하여 독립군 총합부(總合部)를 창설하였다.(1921년 12월 15일) 독립군 총합부는 김성극(金星極)을 총지휘관으로 삼아 국내 진입 유격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안투현(安圖縣) 잉두산(仍頭山) 사관학교를 설립하여 장교를 양성하였다.

이동휘를 비롯하여 북간도 출신과의 오랜 친분으로 북만 지역에서의 상해파 계열의 고려공산당 활동에 관여하였다. 러시아 시베리아 내전에 참전하였던 상해파 인사들이 주도하여 조직한 적기단(赤旗團)의 간부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25년 3월경 적기단의 고문(顧問)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적기단은 1922년 말 종결된 원동해방전쟁에 참전하였다고 해산된 빨치산부대에서 제대한 장교와 군인들이 중심이 되어 1923년 1월 10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백산학교(白山學校)에서 창립한 조직이다. 적기단 단원의 대부분은 과거 북간도 지역의 민족운동 전선에서 활약한 바 있는 상해파 고려공산당 계열의 청년들이었다. 적기단은 당면 과업으로 만주와 조선에서의 공산주의 사상을 선전하고 중국 공산당과 연락을 취하며 둔전식(屯田式) 빨치산부대를 조직할 것을 결정하였다.

행동 강령으로는 남만주 ・ 북만주 ・ 동만주 3개 지대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러시아혁명 승리의 경험을 활용하여 일제와 투쟁하되 필요한 경우 파괴와 암살을 감행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1924년 6월 1일 요양차 왕칭현 대황구(大荒溝)의 둘째아들 구자익의 집에서 머물고 있었는데, 이를 알아챈 일본 영사관에서 ‘영원한 국민회 회장’을 체포하려고 보낸 순사들에게 체포되었다. 중국 순경국에서 이 소식에 접하고 즉시 대황구 파견소에 명령하여 20여 명의 순경이 출동하여 구출한 일도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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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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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慶尙北道警察部 編, 『高等警察要史』, 1934
  • ・ 「機密公 제219호, 不逞鮮人團의 통일에 관한 협의의 건」, 1920.8.28, 『不逞團關係雜件 - 朝鮮人의 部 - 在滿洲의 部 21』,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機密 제27호, 不逞鮮人團體 調査에 관한 건」, 1925.3.18, 『不逞團關係雜件 - 朝鮮人의 部 - 在滿洲의 部 41』,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독립신문』 192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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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반병률, 『성재 이동휘 일대기』, 범우사, 1997
  • ・ 김병기 ・ 반병률, 『국외 3・1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 ・ 반병률, 『1920년대 전반 만주 ・ 러시아지역 항일무장투쟁』,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 ・ 반병률, 『여명기 민족운동의 순교자들』, 신서원, 2013.

반병률 집필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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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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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의 업적을 인명사전으로> 3.1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하여 그동안 축적된 연구기반 위에서 독립운동가의 업적을 사전적으로 종합, 정리하기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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