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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얼굴의 아테네 민주주의
역사적 근거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민주주의’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으로 보통 아테네의 정치가 페리클레스(Pericles, 기원전 495?~429)를 꼽는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의 펠로폰네소스 전쟁 발발 1년 뒤인 기원전 431년에, 조국을 위해 싸우다 목숨을 잃은 아테네 군인들을 추도하는 자리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연설을 하게 된다. 그는 이 추도사에서 아테네의 정치 체제가 아테네 고유의 창조물임을 강조한 뒤, 그것의 특징은 ‘소수의 특권층 대신 다수의 사람들에게 더 혜택을 주는 것’이라고 단정한다. 그리고 이런 특징을 지닌 체제가 곧 ‘민주주의(dēmokratia)’라고 규정한다(Thucydides 1960, 267~269쪽).각주1)
아테네 사람들은 이런 의미의 민주주의를 유감없이 실천에 옮겼다. 인터넷은 고사하고 문자도 제대로 확립돼 있지 않았던 그 시대에 어떻게 그런 형태의 정치를 꿈꾸었는지 신기할 정도이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아테네 시대에 대해 향수를 품는다. 아테네 민주주의가 민주주의의 원형이며 이상(理想)인데 이를 우리의 현실에서 되살리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 이처럼 칭송받는 아테네 민주주의는 정작 그 당시 아테네에서는 ‘자연의 섭리’에 어긋날 뿐 아니라 나라를 ‘망치는’ 해괴망측한 제도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크세노폰(Xenophon)이 대표적인 비판자였다. 그는 민주주의를 ‘좋은 사람보다 나쁜 사람들이 더 잘 살게 되어 있는 제도’라고 평가 절하하면서, ‘사회에 쓸모 있는 사람보다 비속한 자, 빈자, 평범한 사람들에게 더 많은 것이 돌아간다’고 비판의 날을 세웠다(크세노폰 2003, 33~34쪽).각주2)
이 글은 아테네에서 민주주의가 태동하게 된 경위에 관심이 많다. 그리고 아테네 특유의 ‘참여민주주의’의 작동 과정과 정신을 밝히고자 한다. 흔히 아테네에서 이런 놀라운 정치 체제가 등장하게 된 이유로서 솔론이나 페리클레스 같은 위대한 정치가들의 역할을 주목한다. 그러나 이 글은 아테네에서 가난한 하위 계층 시민들의 힘이 커지면서 일부 정치가들이 그러한 시류에 편승한 측면도 작용했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특히 시민 계급의 경제 사회학적 상황과 군사적 역할이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정치적 지각 변동이 함께 일어났다는 사실을 역설할 것이다.
아테네 민주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식자들은 가난하고 무지한 대중에 의한 ‘중우(衆愚) 정치’의 위험성을 지적하곤 한다. 그러나 아테네의 정치 지도자들이 대중의 정치 참여를 유도하는 한편, 그들이 범할 수 있는 실수와 편견을 방지하기 위해 다양한 각도에서 치밀한 방책을 세웠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글은 이런 사항들을 종합하면서 아테네 민주주의의 현대적 의미를 따져보고자 한다.
고대 그리스의 정치사
고대 그리스의 역사에 대해 우리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관련 사료(史料)가 너무 없기 때문이다. 믿을 만한 자료라고 해봤자, 아리스토텔레스나 그의 제자들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아테네 정치 제도사》 정도가 고작이다. 이것도 전설의 시대부터 아리스토텔레스 생존 당시까지의 아테네의 역사와 정치 제도를 간략하게 서술한 것에 불과하다. 이보다 약 반세기 앞서 크세노폰이 《아테네 정치 제도》, 《라케다이몬(스파르타) 정치 제도》라는 글을 남겼지만, 이것들은 너무 내용이 빈약하다. 오늘날 학자들이 수백 개의 그리스 도시 국가 중에서 유독 아테네를 주목하는 것도 아테네가 문헌 자료를 통해 체계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라는 말은 로마인이 지어낸 것으로, 남부 이탈리아에 있던 그리스 식민 도시 국가들을 ‘대(大)그리스’라고 부른 데서 유래했다. 그리스인들은 스스로를 헬레네스(Hellenes), 즉 헬렌의 자손이라고 불렀다(김창성 2006, 25쪽). 고대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2000년 무렵에 그리스 본토에서 미케네 문명을 일구었다.
그러나 ‘암흑기’(기원전 1100~800)에 북방으로부터 도리아인이 침입하면서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 시기가 지나면서 그리스는 다른 고대 문명사회와 뚜렷이 구분되는 정치 질서를 발전시켰으니 그 기초가 바로 도시 국가인 폴리스였다. 이 정치 조직이 언제, 왜 생겨났는지 그 유래는 불분명하다. 폴리스라는 말의 뜻이 ‘성채(城砦)’인 것으로 미뤄, 불안한 시국을 맞아 자신들의 재산과 토지를 지키려는 군사적 공동체에서 폴리스가 출발한 것 같고, 이것이 점차 발전해 정치, 종교, 상업의 중심지가 되면서 하나의 도시 국가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김봉철 2003, 16~17쪽).
그리스 일대에 얼마나 많은 폴리스가 존재했는지도 불명확하다. 아테네 주도의 델로스 동맹에 적어도 380개 이상의 폴리스가 참여한 것으로 추정되고, 여기에다 스파르타 중심의 펠로폰네소스 동맹 등을 합치면 폴리스의 수가 500개 이상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각주3) 아테네와 쌍벽을 이뤘던 스파르타에 대해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스파르타의 정식 이름은 라케다이몬이었다. 스파르타는 도리아인의 혈통을 이어받아, 이오니아인 중심의 아테네와 구분되었다. 이곳에서는 계급 구분이 엄격했고, 군주제와 귀족제와 민주제가 혼합된 과두제 정치 조직이 발달했다. 또한 메세니아와의 전쟁 등 위기 요소를 타개하기 위해 군사적 동원 체제를 가동했고, 국가에 대한 절대 복종을 요구했다. 소수의 인구로 10~20배나 더 많은 이민족을 정복, 지배하느라 이런 군국주의적 색채가 불가피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피정복민들의 끈질긴 저항이 계속되면서 스파르타도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흥미 있는 것은 크세노폰과 플라톤 등 아테네 민주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지식인들이 스파르타의 정치 사회 체제에 대해 아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는 사실이다. 크세노폰은 《라케다이몬(스파르타) 정치 제도》라는 글에서 스파르타가 인구는 아주 적은데 그리스에서 가장 강한 이유를 ‘다른 도시를 따라 하지 않고 그 반대로 움직였다’는 점에서 찾았다. 플라톤도 민주주의의 문제점을 극복할 방안으로 스파르타의 습속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우선 우리에게 익숙한 ‘스파르타식 교육’에 대해 살펴보자. 이 나라에서는 내부 반란을 진압하고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전사(戰士)들을 잘 훈련시키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을 엄격하게 훈육해 그들이 버릇없이 자라지 않도록 주의했다. 사내아이들은 만 6세에 기초 교육을 받기 시작해서 13세부터 군사 훈련에 돌입했다. 그리하여 24세에 정식 전사가 되었고, 30세가 넘어야 시민권을 획득하고 병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튼튼한 후손을 낳도록 여자아이 역시 남자아이 못지않게 강하게 키웠다. 또 이 나라에는 노인의 지혜와 경륜을 존중하는 풍토가 있었다. 스파르타에서는 비겁한 자를 가장 경멸했고, 아예 사회적으로 매장해버렸다. 능력 있는 자가 게으름을 피우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런 자는 잘못을 범한 자와 똑같이 처벌했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이상 국가’의 요건으로 ‘혈육과 재산의 공유제’를 꼽았다. 그런데 바로 이 스파르타가 여러 면에서 공산주의 색채를 선보였다. 스파르타 사람들은 남의 자식도 자기 자식처럼 똑같은 애정을 가지고 교육했다. 필요하면 다른 사람의 하인이나 사냥개, 말도 사용할 수 있었다. 돈벌이를 하찮게 여겼고, 금이나 은을 소지하면 처벌을 각오해야 했다. 쇠로 된 무거운 화폐를 사용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재산을 모으기도 어려웠다.각주4)
스파르타 사람들은 공동 식사 제도를 발전시켰다. 원래 도리아인들이 정복 전쟁 중에 이곳저곳 이동하면서 했던 야전 식사를 부활시킨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가 재미있다. 과식이나 폭음 등 절제 없는 생활을 차단하는 것이 공동 식사의 일차적 목적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음식은 가능하면 맛없게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그들은 함께 식사하며 나라 일 등 공동의 관심사를 논의함으로써 공동 식사를 ‘밥상머리 교육’의 기회로 활용하기도 했다(크세노폰 2003, 11~29쪽 ; 윤진 2006, 72~73쪽).
아테네 민주주의의 태동
경제력과 정치적 발언권
아테네는 아티카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제주도의 9분의 8 정도 면적에, 인구는 시민과 외국인(10~15퍼센트), 노예(35~40퍼센트)를 포함해 20~30만 명이나 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부모가 모두 아테네 출신이어야 시민이 될 수 있었고, 이 중에서 20세 이상의 성인 남자만 참정권을 가졌다. 따라서 2~4만 명 정도의 시민이 정치의 주체로서 아테네 민주주의를 꽃피운 셈이다. 남자 시민은 18세가 되면 최소 단위의 행정 구역인 데모스(dēmos)의 구성원으로 등록한 뒤, 2년 동안 각종 교육을 받아야 했다. 이런 훈련을 거쳐야 정식 시민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아리스토텔레스 2003, 91~92쪽).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의 정치사를 설명하면서, “처음에는 왕정이었다. 테세우스가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불러 모았고, 그때 ‘여기로 오시오, 모든 사람이여’라는 말이 생겼다. 처음으로 대중의 편에서 1인정을 폐기했다”라고 서술했다(아리스토텔레스 2003, 51~52쪽). 그러나 실제 역사는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아티카에서 아테네를 중심으로 국가가 형성되기 전에는 지방 공동체의 지배자들이 각기 왕으로 군림했으나 전쟁 등 유사시에는 아테네 왕이 다른 공동체를 지휘하며 구심체 역할을 했다. 그러다가 기원전 9, 8세기부터 국방과 통치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높은 곳에 성채를 쌓고 도시 국가를 형성한 것이 지주 중심의 귀족 계급이 왕을 몰아내는 계기가 되었다. 그동안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귀족들이 폴리스 안에 한데 모이니 단합하기가 쉬워졌던 것이다.각주5)
귀족은 협의회(불레)를 만들고 그동안 왕이 행사했던 제사장의 권한과 군사 통솔권들을 나눠 가졌다. 9명의 아르콘이 최고 권력을 나누어 행사했는데, 이들 중 바실레우스는 일종의 제사 집정관, 폴레마르크스는 군사 집정관, 테스모테타이는 법무 집정관 역할을 했다. 이름이 붙지 않는 일반 아르콘은 행정 권한을 담당했다. 특히 아르콘 바실레우스는 왕의 이름을 지닌 아르콘으로(‘바실레우스’는 왕을 뜻하는 말이다) 왕정에서 귀족정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담아내고 있다. 또 귀족들의 최고 권력 기구로서 사법권과 공무 감독권을 행사하는 아레오파고스 회의가 만들어졌는데, 아르콘을 역임한 사람들이 종신직으로서 이 회의를 구성했다.
이렇게 귀족이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경제적 능력을 바탕으로 국가에 군사적, 재정적 봉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였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이들은 직접 생업에 매달리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국정에 관여할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여기서 당시 그리스 사회에서 경제적 능력과 군사적 기여, 나아가 정치적 발언권이 상호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에 전투는 기병(騎兵) 위주 전술로 치러졌기 때문에 말을 기르며 값비싼 전투 장비를 스스로 갖출 수 있는 귀족층이 국가 방어를 전담하다시피 했다. 이에 반해 경제적 여력이 없는 보통 사람들은 전쟁에서 일정한 역할을 수행할 처지가 못 되었다. 결국 경제적 능력→군사적 기여→정치적 발언권의 순환 고리가 만들어지면서 귀족이 자연스럽게 국가 권력을 독점하게 된 것이다(김봉철 2003, 18~20쪽 ; 하멜 2008, 288쪽).
따라서 경제 상황이 바뀌면 정치적·군사적 입지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8세기 이후 식민지 건설이 추진되고 해상 교역도 활발해지면서 포도와 올리브를 생산하는 농민의 경제 형편이 나아졌다. 그리고 이러한 생산물을 담는 도자기의 생산자 등 수공업자들도 번성하기 시작했다.
경제적 변화와 맞물려 군사적 측면에서도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7세기가 지나면서 그리스에서는 소수의 기병 중심 전투가 아니라 다수의 장갑보병(裝甲步兵)을 중심으로 한 사각 밀집 대형 팔랑크스가 기본 전술이 되었다. 장갑보병은 투구와 큰 방패 등으로 중무장했지만, 기병에 비해 경제적 부담이 훨씬 가벼웠기 때문에 중농(中農) 이상의 농민과 상인, 수공업자 등으로 충원될 수 있었다. 이제 이들의 군사적 역할이 증대되면서 이들의 정치적 영향력 또한 그에 따라 커져야 마땅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오히려 귀족정의 폐해가 더 깊어졌다(김봉철 2003, 23~24쪽).
솔론의 개혁
기원전 7세기가 끝나갈 무렵 아테네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갈등 때문에 폭풍 전야와 같은 위기 국면으로 치닫게 된다. 솔론(기원전 640~558)은 부자와 가난한 자 양쪽의 입장을 절충할 수 있는 법을 만들어 이러한 위기를 돌파하고자 했다. 어느 한쪽도 솔론의 정책에 썩 만족스러워하지는 않았다. 민중은 모든 것을 재분배하기를 원한 반면, 부자들은 과거의 질서로 되돌아가든가 아니면 기존 법을 조금만 변경하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그러나 파국을 면하기 위해서는 양쪽 다 그의 제안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솔론은 기원전 594년에 아르콘이 되자, 민회(시민 총회)의 예비 모임인 400인 협의회를 신설했다. 그리고 혈통이 아니라 재산을 기준으로 참정권을 차등 부여했다. 즉, 제1, 2계층이 고위 관직을 독점하고, 중간 자영 농민인 제3계층은 하급 관직을 차지하게 했다. 제4계층인 테테스(육체노동 계층)는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다만 민회와 법정에 참여할 권리만을 얻었다. 그 대신에 병역과 직접세를 면제받았다(김창성 2006, 32쪽). 이런 계층 분류는 군사 복무 형태와도 연계되었다. 제1, 2계층은 기병, 제3계층은 장갑보병, 제4계층은 경무장병이나 수병(水兵), 특히 노 젓는 군인으로 복무했다. 재산 규모와 군사적 기여, 그리고 참정권 수준이 서로 밀접하게 연계된 것이다(김봉철 2003, 25~26쪽).
개혁을 한다고는 했지만, 솔론은 여전히 부유층 중심의 과두 체제를 온존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산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모든 자유민에게 법이 평등하게 적용되도록 규정했다는 점에서 솔론 개혁각주6) 의 역사적인 의미는 남달랐다(Durant 1966, 112~118쪽).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솔론을 ‘처음으로 민중의 지도자가 된 사람’, ‘민주주의의 기초를 닦은 사람’으로 규정했다. 그에 의하면, 솔론은 부자들의 탐욕과 오만 때문에 나라가 분열한다고 생각했다. 솔론은 민중을 자유롭게 했고, 몸을 담보로 돈을 빌리지 못하게 했다. 사채(私債)와 공채(公債)를 삭감하는 법을 만들어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사안에서 중용과 공익을 중시했다. 양쪽 모두의 미움을 사면서까지 자신의 욕심보다는 다수의 이익과 도시의 안전을 위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아리스토텔레스 2003, 53~59쪽·90쪽).
그러나 솔론이 물러난 후 귀족들의 착취가 심해지면서 농민과 상공인들의 불만이 높아져갔다. 이런 상황에서 참주(僭主)들이 개혁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새로운 실력자로 등장하게 된다. 그들은 하층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무력을 비롯한 비합법적인 수단으로 귀족 체제에 대항했다. 아테네에서는 페이시스트라토스가 계략과 무력을 동원해 세 차례나 참주의 지위에 올랐다.
참주들은 일체의 계급 차별을 철폐하고 축제를 베풀었다. 예술과 학문을 적극 장려해 아테네에서 철학이 융성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이들은 훗날 폭군으로 불리면서 부정적 인물의 대명사로 낙인찍힌다. 이들은 민주적인 지도자가 아니었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시민들의 정치 참여를 위축시켰다. 결국 기원전 510년 참주정이 붕괴했고, 참주 등장을 방지하기 위해 도편추방제가 도입되었다(박종현 1982, 10~12쪽 ; 김봉철 2003, 26~27쪽).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
많은 사람들이 1992/1993년을 아테네 민주주의 2,500주년으로 기념하면서 그 뜻을 기렸다. 그 기점이 바로 개혁 정치가인 클레이스테네스가 헌법을 공포한 기원전 508/507년 무렵이었다. 이때부터 기원전 322년 아테네가 마케도니아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180여 년 동안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민주주의 시대가 화려하게 꽃을 피웠던 것이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클레이스테네스를 일컬어 ‘민주정을 확립한 사람’이라고 분명히 못 박았다. 그러나 이를 제외하면 클레이스테네스에 관한 사료가 너무 부족하다. ‘확립’이라는 그리스 말의 뜻도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어 또 다른 논란이 일기도 한다. 그래서 혹자는 그가 민주정을 최초로 확립했다기보다 참주정으로 훼손된 기존의 민주정을 복구한 것으로 이해한다. 아울러 솔론 등 다른 정치가들에 비해 아테네 시민들 사이에서 그가 거의 잊힌 존재라는 사실도 헤로도토스의 평가를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게 한다(류연승 2006, 133~134쪽·154쪽).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죽은 후 17년이 되는 해에 참주제가 무너진다. 그러자 이 참주와 가까운 사이였던 이사고라스와 클레이스테네스가 권력을 두고 서로 대립했다. 처음에는 스파르타의 지원을 등에 업은 이사고라스 측이 유리했으나 민중이 힘을 모아 이 세력을 물리쳤다. 클레이스테네스는 민중을 내세워 정부를 대중의 손에 넘겼다. 민중이 주도권을 장악하자 클레이스테네스는 앞장서 민중의 지도자가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그는 본래 민주정을 지원하던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민주 정치에 대한 신념에서라기보다는 자기 세력 기반을 확충하기 위해서 민중과 연합한 것이었다. 이사고라스와의 정쟁에서 패배하자, 민중에게 참정권을 주겠다고 약속함으로써 그들의 지지를 얻어냈다는 것이다. 어쨌든 클레이스테네스는 민회에 개혁안을 제출한 뒤 이를 관철시킴으로써 민주제의 토대를 구축했다.각주7)
대중의 지지를 업고 권력을 획득한 클레이스테네스는 대중의 정치 참여를 합법화해주었다. 그때까지 신분과 재산을 중심으로 구조화되었던 불평등을 근본적으로 개혁하게 된 것이다. 우선 그는 귀족들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기존 부족제를 해체하고 데모스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부족제를 창출함으로써 귀족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이제 4부족 체제가 10부족 체제로 변경되어 더 많은 사람이 참정권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각 부족별로 한 명씩 장군(스트라테고스)을 선출할 수 있게 되었다. 클레이스테네스는 시민 총회를 신설하는 한편, 400인 의회를 500인 의회로 확대했다. 이 밖에 장군제, 시민 재판소, 도편추방제각주8) 등 아테네 민주제의 골격이 되는 일련의 제도들을 창안해냈다. 이런 점을 종합하면 클레이스테네스야말로 아테네 민주주의의 초석을 다진 인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시대에 대해 ‘솔론 때보다 더 민주적’이라고 평가했다(아리스토텔레스 2003, 71~73쪽·90쪽).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에서 실질적 혜택을 입은 사람은 중간층인 장갑보병들이었다. 테테스 계층은 국가 운영에 참여할 만한 경제적 여력과 여가를 갖추지 못했고 국가 방어에 대한 공헌도 미약했기 때문에 아직 정치적 세력화를 도모할 단계가 아니었던 것이다(김봉철 2003, 28쪽). 따라서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이 평등 체제를 낳기는 했으나 ‘다수 대중이 주인이 되는’ 정치 체제로서의 민주주의를 구축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페르시아 전쟁이라는 또 다른 계기가 필요했던 것이다(Murray 1995, 36쪽).
기원전 6세기에 들어와 지중해 동쪽을 중심으로 무역업이 활발하게 일어났는데 이 과정에서 농민과 수공업자들의 영향력도 함께 높아졌다. 또 페르시아의 침공(기원전 490, 480)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해군력의 비중이 갑자기 커졌는데, 이는 전함에서 노를 젓는 평민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결정적으로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노가 많이 달린 3단노선(갤리선)의 노 젓는 이들이 테테스 계층에 의해 주로 충원되었기 때문이다.
페리클레스의 개혁
대중 또는 인민(데모스)이 정치의 주체가 되는 민주주의를 아테네에서 최초로 꽃피운 인물은 역시 페리클레스였다.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아테네의 민주 정치를 비판한 플라톤이 민주적 정치인의 전형적 인물로 그를 지목한 것만으로도 그의 비중은 입증된다고 하겠다.
페리클레스는 기원전 443년 장군으로 선출된 이후 기원전 429년 유행성 괴질로 사망할 때까지 15년을 연임하는 기록을 남겼다. 정치가로서의 그의 탁월성은 투키디데스가 기록한 아테네의 역사, 특히 외적의 침입에 맞서 국민들을 설득·동원하여 국난을 이겨내는 대목에서 잘 드러난다. 페리클레스는 감정에 호소하지 않는 지적인 연설에 능했고, 당시의 여느 정치인들과 달리 재물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등 장점이 많은 인물이었다.각주9) 그러나 그는 겉으로는 민주주의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절대 군주와 같은 권한을 행사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자유주의적 개혁이 권위주의적 지도자에 의해 더 잘 이루어질 수 있다는 역설의 시원(始原)으로서 페리클레스가 종종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Durant 1966, 249쪽).
페리클레스는 30대 초반인 기원전 463년에 당대의 실력자 키몬 장군의 회계 보고서를 비난하면서 민중의 지도자로 떠오르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가 키몬을 비난한 사건은 정부가 더 민주화되고, ‘많은 사람들이 대담해져서 정부 전체를 스스로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페리클레스는 가난한 사람들의 국정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재판소 배심원들에게 보수를 주는 제도를 도입했다. 그 발상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추정이 재미있다. 키몬의 선심성 물량 공세에 맞설 재력이 없었기 때문에 국고를 동원했다는 것이다(아리스토텔레스 2003, 77~78쪽).
페리클레스가 배심원들에게 수당을 지급한 뒤, 후대에는 민회와 500인 의회 참석자들에게도 보수가 주어졌다. 나아가 시민들이 극장 보통석을 이용하는데 드는 비용을 국비로 지급하자는 논의도 있었다.각주10) 기록에 의하면 일반 민회 참석자에게는 6오볼, 주요 민회 참석자에게는 9오볼을 주었다. 재판소에서 배심원이 되면 하루에 3오볼을 받을 수 있었다. 평의회 참석자에게는 5오볼을 주었다(아리스토텔레스 2003, 109쪽). 당시 숙련 노동자의 하루 임금이 평균적으로 6~9오볼 정도(하멜 2008, 23쪽)였음을 감안한다면 나라 일을 위해 하루 정도는 생업을 희생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음직도 하다(아리스토텔레스 2003, 80쪽·109쪽).
민회 참석자에게 수당을 주자는 제안은 처음에는 부결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민회에 적극적으로 참석하지 않아, 일정 정족수가 필요한 안건을 위해 대중을 불러 모을 방안을 궁리해야 했다. 결국 민회에 참석하는 사람에게 처음에는 1오볼, 나중에는 2오볼, 3오볼씩 지급하는 유인책을 써야 했다(아리스토텔레스 2003, 90쪽). 그 결과 제사보다는 젯밥에 더 관심을 두는 사람이 늘어나게 되었다. 덕망 높은 사람보다 수당에 욕심 있는 사람들이 배심원으로 몰려들었고, 급기야 배심원을 뇌물로 매수하는 사례까지 생겨났다. 재판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아리스토텔레스 2003, 78쪽). 플라톤은 페리클레스의 가장 큰 ‘원죄’로 수당제의 도입을 지목했다.
페리클레스 사후에 아테네는 급격하게 붕괴하기 시작한다. 아테네는 스파르타와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아테네가 이 싸움에서 진 원인에 대해서는 구구한 해석이 많다. 플라톤은 민주주의의 폐해를 패전의 직접 원인으로 꼽는다. 그러나 실은, 페르시아를 격퇴하는 데 일등 공신이었던 아테네의 해군력이 제국주의적 대외 팽창의 동력으로 이용된 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아테네가 주변 도시 국가들의 반발을 사게 되면서 이러한 상황을 등에 업은 스파르타의 도전이 아테네를 결정적인 위기에 몰아넣은 것이다. 아테네의 내부적 요인도 컸다. 전례 없는 전염병으로 막심한 인명 피해가 발생했고,각주11) 지도자들이 국가의 존망이 걸린 전쟁까지 사리사욕을 챙기는 데 이용하는 등 부패와 내분이 극심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대목을 집중적으로 지적한다. 과거 아테네가 잘나가던 시절에는 경우 바른 사람들이 민중을 선도했지만, 이제는 사리 밝은 사람들로부터 지지받지 못하는 자들,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을 위해 큰소리 치고 다수에게 선심을 베풀려 하는 자들이 지도자의 위치에 올랐다는 것이다(아리스토텔레스 2003, 78~79쪽).
아테네 민주주의와 자유
아리스토텔레스는 평등에서 자유가 나온다고 했다. 아테네 민주주의의 태동 과정을 보더라도 그렇다. 신분과 재산에 따른 차별이 무뎌지면서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자유도 잉태되었던 것이다. 아테네에서는 ‘법 앞의 평등’을 뜻하는 이소노미아(isonomia)와 ‘민회에서 평등하게 발언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하는 이세고리아(isegoria) 같은 개념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정치 집회에서 ‘누구나’ 발언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평등의 정신이 깔려 있었기 때문에 아테네 사람들은 토론을 즐겼다. 비록 토론 때문에 시간이 지체될 수는 있지만, 그들은 토론을 보다 현명한 선택을 위해 불가피한 것으로 여겼다. 시민 총회에서 사회자가 “누구 더 발언할 사람 없소?” 하고 거듭 물었다는 것은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다(Ober 1989, 296쪽).
그러나 페리클레스는 아테네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특성을 자유에서 찾았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기 뜻대로 살 수 있는 자유와 이 연장선상에서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정치적 자유가 바로 그것이었다.각주12)
자유와 평등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이 깊이 관련돼 있다. 따라서 아테네 민주주의를 움직이는 사상적 기둥으로 자유와 평등을 함께 거론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아테네에서는 자유가 보다 일차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자유라는 말이 아테네인들의 삶 속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되었던 데 비해 평등이라는 말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에 의해서도 입증된다.
이를테면 ‘자유’나 ‘자유인’이라는 말은 재판 과정이나 대중 연설에서 빈번히 사용되었다. 나아가 당시 국가 간 전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던 전함의 이름으로 ‘민주주의’와 더불어 ‘자유’가 쓰인 경우도 있었다. 국가가 주도하는 행사에서 ‘자유’를 신성시하는 의식(儀式)이 치러졌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하겠다. 이에 비하면 ‘평등’이라는 말은 의외로 잘 사용되지 않았다. 이런 사례들을 종합해보면 아테네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기본적 개념은 평등이 아니라 자유였다고 추론해도 좋을 것 같다.
웅변가인 리시아스(Lysias, 기원전 450~380)가 어떤 장례식에서 남겼다는 ‘자유 찬가’는 페리클레스의 추도 연설과 더불어 내용은 물론 희소성 때문에 많은 관심을 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당시 우리 조상들은 사상 처음으로 자의적(恣意的)인 권력의 횡포를 몰아내고 민주주의를 확립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자유야말로 사람들의 단결을 이끌어내는 힘의 원천이라 생각하면서 자유인의 기백으로 스스로를 다스리는 민주주의 원리를 실천에 옮겼던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 조상들은 힘으로 남을 억압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며 법에 따른 정의의 실현과 이성에 의한 설득을 도모하고자 했다. 법을 왕으로, 이성을 선생으로 삼았던 사람들이 바로 우리 조상인 것이다.Athenian Democracy각주13)
리시아스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아테네 사람들은 민주주의에 대단한 애착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자유를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로 상정한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아테네 사람들이 애국심을 호소할 때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수사(修辭)를 동원한다는 점이다.각주14)
이러한 주장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에 의해 처음 제기되었다. 아테네가 주변 국가들과의 틈바구니에서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 이래 아테네가 민주주의를 꽃피우면서 시민들이 자유를 향유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자유가 군대의 힘을 배가해주었기 때문이다. 헤로도토스는 이러한 관점에서 아테네와 페르시아의 전쟁을 자유민과 노예의 싸움으로 규정하고, 소국 아테네가 페르시아의 침입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자유의 힘 덕분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Murray 1995, 44쪽 참조). 크고 작은 공직이 모든 시민에게 열려 있는 조국에 대한 아테네 시민들의 남다른 애착심이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나라를 지키는 것이 곧 자신들의 자유를 지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Durant 1966, 298쪽).
아테네에서 향유된 자유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다시 없이 귀중한 것이 페리클레스의 추도 연설이다. 페리클레스는 무엇보다도 아테네 시민들이 ‘각자 하고 싶은 대로’ 일상생활을 해나간다는 점을 강조한다. 누가 무슨 일을 하든 다른 사람이 그에 대해 화를 내거나 질투심에 못 이겨 감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인접 국가들이 그러듯이 남자답게 기른다면서 고통스러운 규율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저 각자가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살 뿐이라는 것이다. 페리클레스는 이것을 아테네 자유의 핵심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그는 아테네 사람들이 자유롭게 산다고 해서 사회가 무법천지가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자랑한다. 시민들이 어려서부터 국가의 법이나 지도자의 명령에 복종하도록 교육받아왔기 때문이다. 페리클레스에 따르면 아테네에서는 자유와 질서가 균형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아테네는 시민에게 그저 강압적인 통제로만 임하는 다른 나라에 비해 다음의 두 가지 강점을 지닌다. 첫째, 평상시에는 시민들에게 고통을 주는 강제가 많지 않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기에 부닥치면 시민들은 더 용감하게 싸운다(Thucydides 1960, 267~269쪽).
아테네에서 사람들이 자유를 폭넓게 향유하고 있었다는 증언을 누구보다도 생생하게 들려주는 사람은, 역설적이지만 아테네의 민주주의에 의해 죽음을 당한 소크라테스였다. 그는 당시 아테네의 정치 공동체에 대한 전면 저항을 도모하다가 사형 선고를 받고 말았다. 그러나 만일 아테네에서 자유가 꽃피고 있지 않았다면 그러한 체제에 대한 도전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점은 소크라테스에 의해서도 확인되고 있다. 주위 사람들이 그에게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지 말고 도망치라고 권할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거절한다.
나는 이곳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한 번도 외국에 가본 적이 없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밖으로 나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않은 것은 내가 아테네의 법질서에 대해 동의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그런 내가 이제 목숨이 위태로워졌다고 해서 도망을 가면 이제까지의 내 삶을 부인하는 결과가 되지 않겠는가. 이 나라에는 외국으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자유만 있는 것이 아니네. 누구든지 공정한 재판을 받고 또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또 법이 마음에 안 들면 그 법을 바꿀 수 있는 자유도 주어져 있지 않은가. 아테네에서는 각자가 자기 삶을 선택할 자유가 있네. 아무도 국가의 종노릇을 강요당하지 않는다네.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자기 자신이 바로 주인 행세를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라네.《에우더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각주15)
소크라테스가 증언했듯이, 아테네 사람들이 누렸던 자유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것은 소위 사상과 표현의 자유였을 것이다. 데모스테네스가 말했듯이, 스파르타에서 아테네의 법률을 찬양하는 언동을 하면 큰 봉변을 당하기 십상이었지만 아테네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치 체제에 대해 마음 놓고 비판할 수 있었다.각주16) 플라톤도 《고르기아스》에서 이 점을 확인해준다(461e). 그를 위시한 일군의 반민주주의자들이 거리낌 없이 체제에 대한 비판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아테네가 언론 자유를 잘 보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Ober 1998, 7쪽).
참여의 확대와 제동 장치
직접민주주의의 구현
이러한 정신 위에서 아테네는 독특한 방법으로 민주주의를 실천해나갔다. 20세 이상의 남자 시민이라면 누구나 다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다. 재산이나 교육 수준에 관계없이 투표권과 공직 피선거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찰에 따르면 시민 6명 중 한 명은 매년 어떤 공직이든지 맡아야 했다. 형식상 최고 의결 기구인 시민 총회에서는 발언과 토론의 자유가 충분히 보장되었다.
500인 의회나 10명의 장군 등이 실질적으로 국정을 책임지고 운영했지만, 그들은 일단 시민들의 투표에 의해 선출되어야 했고 임기도 짧았다. 공직은 단임이 원칙이었으나 500인 의회 의원은 두 번 재임할 수 있었다. 다만 전쟁 관련 업무를 수행하는 관직에는 그런 제한이 없었다(아리스토텔레스 2003, 109쪽).
재판소까지도 30세 이상의 일반 시민들에 의해 운영되었다. 무작위로 선발된 시민 배심원들이 각종 판결을 내린 것이다. 일단 배심원들이 판결을 내리면 불복이 허용되지 않았다. 배심원들은 공적 소송과 사적 소송 둘 다 다뤘는데, 그 성격에 따라 배심원의 수가 달랐다. 공적 소송에서는 최소 501명의 배심원이 선발되었는데, 중요한 소송이면 수가 더 늘어났다.각주17) 사적 소송에서는 다투는 돈의 규모에 따라 201명 또는 401명의 배심원을 뽑았다.
아울러 시민은 누구든지 특정 법률에 대해 심사를 제청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문제의 법률은 판결이 날 때까지 효력이 정지되었다. 아테네는 정치와 법에 대한 민중의 통제를 제도적으로 보장한 것이다. 재판소는 평의회나 시민 총회의 결정을 평가하고 법률의 정당성 여부를 판정하기도 했다. 이 밖에 공직 후보자에 대한 사전 심사, 임기 만료 공직자의 직무 내용에 대한 심사, 공금 지출에 대한 특별 회계 감사도 배심원의 몫이었다.
페리클레스가 가난한 사람들의 배심원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3오볼씩 수당을 준 것은 위에서 이미 설명했다. 그 후 민회 참석 수당 등 다양한 형태의 참여 유인책이 만들어졌다. 하루 벌이 생계에 매달려 사는 서민들에게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현실적인 길을 열어줬다는 점에서 수당제는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어떻게 보면 아테네 민주주의의 상징과도 같았다. 그러나 돈으로 민주주의를 산다는 비판의 제기는 명약관화한 일이었다.각주18) 더구나 그 재원을 감당해야 하는 부유층으로서는 다수파 정치에 밀리는 데 이어 ‘두 번 죽음을 당하는’ 격이었다. 따라서 수당제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아테네에서는 추첨에 의해 공직자를 선출하는 일이 많았다는 것이다. 투표를 하게 되면 아무래도 명망가나 실력자, 부자가 선택될 가능성이 높으므로 일반 평민들의 정치 참여 기회를 실질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추첨제를 도입한 것이다(Jones 1977, 3~20쪽 ; Durant 1966, 254~267쪽). 해마다 1,100여 명의 공직자가 추첨에 의해 선발되었다. 추첨이라고는 하지만, 일정한 자격을 갖춘 사람들 중에서 무작위로 고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문 능력이 필요한 직책, 이를테면 장군은 투표로 뽑았으며 중임 제한도 없었다.
안전장치 마련
아테네 사람들은 민주주의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게 다양한 안전장치를 만들었다. 최고 권력 기관인 민회의 운영 실태를 보자. 민회에서는 실질적인 정책 토의가 불가능했으리라는 분석이 제기되는 것이 사실이다. 많으면 5,000명 정도의 시민이 회의에 참석했을 텐데,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회의를 진행한다 하더라도 발언권을 얻는 사람은 10명 남짓이었을 것이고, 따라서 직접민주주의는 실현 불가능한 신화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나아가 선동가들이 장내를 장악하면 군중 심리가 발동하기 십상이었을 테고, 그 결과 중우 정치를 막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민회는 즉흥적 제안과 즉석연설, 그리고 즉석 표결이 난무하는 곳은 아니었다. 민회의 의제는 500인 의회가 미리 준비했다. 또 민회에서 아무것이나 제안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기존 법률을 위반하는 제안인 경우에는 제안자가 처벌의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아테네 사람들은 배심원이 매수되는 일이 없도록 복잡한 절차를 만들었다. 즉, 공적인 채무가 없고 자격을 상실당하지 않은 30세 이상 남자 시민 중에서 해마다 6,000여 명이 배심원으로 봉사할 것을 맹세하는데, 이들을 대상으로 10개 부족에서 골고루 추첨에 의해 배심원을 선발한 것이다.
아테네에서 주요 공직자를 임명하는 과정이 복잡했고, 자격 심사도 아주 엄격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아리스토텔레스 2003, 102~103쪽). 공직을 지원하는 후보자에 대해서는 도키마시아(dokimasia), 즉 사전 정밀 조사를 시행했다. 후보자의 부모가 모두 아테네 시민인지, 후보자가 군 복무를 마쳤는지 조사를 받아야 했다. 시민 중에서 해당자의 임용을 반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의견을 개진하게 한 뒤, 최종적으로 투표로 임용을 결정했다. 일반 행정관에 대해서는 한 차례만 심사하면 되었지만, 바실레우스를 비롯한 아르콘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검사 위원회가 두 번에 걸쳐 자질 검사를 했다. 이들은 임기가 끝난 뒤 평생 임기가 보장되는 아레오파고스 회의에 들어갈 사람들이기 때문에 더 엄격한 심사가 필요했던 것이다(하멜 2008, 174~175쪽·288쪽).
아테네 민주주의의 공과(功過)
이런저런 이유로 아테네의 전성시대에도 민주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만만치 않았다. 철학자들과 과두 체제 지지자들이 그 선봉에 있었다. 이들은 민주주의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가난하고 무식한 다수 대중’에다 공격의 초점을 맞추었다. 민주주의가 대중이 마음 내키는 대로 정치를 좌우할 수 있는 체제이다 보니 국가 전체의 이익보다는 다수 대중의 ‘당파적 이익’을 좇게 되고 그 결과 부자의 일방적인 희생이 강요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들의 논리였다. 법질서가 어지럽혀지는 것도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비판한 바이지만, 다수가 다수의 이름으로 법을 폐지하거나 새로 만드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에 법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테네 민주주의의 독창적 고안이라는 수당제나 추첨제에 대한 비판도 신랄하게 제기되었다. 알키비아데스 같은 이는 ‘양식 있는 사람’이라면 추첨을 통해 지도자를 뽑고 대중이 국사를 좌지우지하게 되는 민주주의가 한마디로 ‘정신 나간 제도’라는 데 동의할 것이라고 독설을 퍼부었다(Murray 1995, 34쪽).
이 자리에서 아테네 민주주의에 대한 변명을 새삼스럽게 늘어놓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민주주의가 가난한 사람들의 당파적 이익에 휘둘렸다고 하지만, 당파적 이익을 추구하기는 귀족이나 과두 체제도 마찬가지 아닌가. 언필칭 민주주의의 비효율성을 공격하지만, 아테네의 정치적 효율성이 동시대 다른 도시 국가들에 비해 오히려 더 뛰어났던 것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많다. 또 시민 총회의 의결을 통해 법의 존재를 유명무실하게 만드는 등등의 문제점이 있기는 하지만, 반민주주의자들의 비판 중 상당 부분은 과장된 것이며, 또 설령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민주주의의 원리 그 자체의 결함으로 보기는 어렵다(Jones 1977, 61쪽·99쪽).
실제로 대중이 다수의 이름으로, 더구나 선동가의 세 치 혀에 휘둘려 잘못된 결정을 내린 경우가 적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야말로 무지한 대중이 저지른 폭거의 전형이라고 할 것이다. 또 미틸레네 사람들이 전시에 아테네에 대한 저항을 시도했다고 해서 시민 총회가 그곳 남자들을 모두 죽이고 여자와 아이들을 팔아버리도록 결정한 것이라든가 도편추방제를 남용한 것 등은 민주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곧잘 지목하는 사실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난에 대한 반론도 적지 않다.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당한 것도 따지고 보면 소크라테스의 의도적인 ‘도발’ 탓이었으므로 배심원 대중의 잘못만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틸레네 사건의 경우 시민 총회가 바로 다음 날 그 결정을 번복했다는 점은 대중의 능력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불식하는 좋은 예로 인용되고 있다.
대중들이 그리 만만하지는 않았음을 입증하는 또 다른 예로 페리클레스 같은 지도자를 장기간에 걸쳐 선출한 능력을 들 수 있다. 사람마다 평가가 다르긴 하겠지만, 페리클레스는 능력도 탁월하지만 필요할 경우 시민들의 ‘고통 분담’을 강력하게 요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중 영합적인 다른 정치인들과는 구분되는 인물이었다. 이런 사람을 지도자로 뽑았다는 것은 아테네 시민들의 분별력을 짐작하게 해준다.각주19)
아테네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실수할 수 있는 인간’에 대한 제도적 견제 장치를 마련하는 데 소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직자의 임기를 엄격히 제한하고 상당수의 경우 시민이 일평생 한 번씩만 공직에 취임할 수 있게 한다든가, 임기가 끝난 후 재정 문제 등의 주요 업무 추진 상황을 감사받도록 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민주주의는 인간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존재하지만, 그와 동시에 민주 정치는 사람이 아니라 제도에 의해 움직인다는 정신의 원류(源流)도 바로 아테네 민주주의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기대’와 인간의 한계에 대한 ‘의심’을 제도화한 아테네 민주주의의 슬기를 결코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Jones 1977, 61쪽).
아테네 민주주의에 대한 플라톤의 번민
아테네 민주주의는 오랜 세월에 걸쳐 조금씩 틀을 만들어갔다. 솔론이나 클레이스테네스 같은 뛰어난 정치가들의 혜안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로 하여금 민주주의를 받아들이게 한 사회 경제적 변화와 군사적 변화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페리클레스가 규정한 그대로, 민주주의는 ‘다수에게 유리한 정치’를 전개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좋고 선한 것’의 총체로 미화하지만, 민주주의의 뿌리 속에는 계급 분열적 적대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런 현상은 데모스의 권한이 커지고, 또 그들의 국정 참여를 독려하기 위한 물질적 유인책이 강구되면서 더 심화되었다.
한편으로는, 크세노폰이 지적했듯이, 대중이 다수의 힘으로 법 위에 군림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아테네 민주주의는 심각한 위기를 자초하게 된다. “아테네 의회의 절대 다수는 시민들이 무엇을 원하든 간에 그들이 그것을 하지 못하게 막으면 엄청난 재앙이 초래될 것이라고 아우성을 쳤다……그러나 소크라테스만이 반대했다. 그는 그 어떤 경우에도 오직 법에 따라서만 행동할 것이라고 말했다”(하이에크 1997, 17쪽 재인용).
권력을 장악한 데모스가 플라톤이 비판했듯이 ‘욕망의 정치’에 눈이 멀어간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뼈아픈 패배를 당하는데, 무리하게 시칠리아 원정을 도모한 것이 패착(敗着)으로 꼽힌다. 투키디데스의 분석에 의하면, 해외 정복을 통해 공세(貢稅) 수익을 올리려는 욕망이 무모한 원정을 부추겼다. 이런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이 주변 도시 국가들의 집단 반발을 불러일으키면서 아테네는 스파르타에게 주도권을 넘겨주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도 민주주의의 폐해가 그대로 드러났다. “이 계획에 찬성하지 않는 사람도 대다수의 강한 욕망 앞에서 반대 의사를 표하는 것이 비애국적인 것처럼 비칠까 봐 침묵”을 지켜야 했던 것이다(김경희 2006, 15쪽 재인용).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아테네 제국은 붕괴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제국이 보장해주던 경제적 기반이 무너지고 해전을 이끌 함대가 축소되면서 테테스 계층은 정치보다는 생업에 더 치중할 수밖에 없었다. 5세기경에는 배심원이 주로 하층민으로 채워졌지만, 4세기 후반 이후에는 주로 중류층이나 상류층 시민들이 재판정에 앉게 된 것이다(김봉철 2003, 33~35쪽).
그러나 이 모든 한계에도 불구하고 자유와 평등에 대한 아테네 시민들의 착안, 그리고 그 정치 제도를 원활하게 운영하기 위한 장치에 대해서는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지나침이 없을 정도이다. 혈통과 재산에 따른 정치적 차별을 운명처럼 받아들였던 시절에 아테네 시민들이 보여준 발상의 전환은 유쾌하다 못해 신비롭기까지 한 것이다.
이 점은 플라톤도 인정한다. 흔히 ‘전체주의’의 철학적 원조로 지탄받는 플라톤이 아테네 민주주의에 대해 적극적으로 평가한 측면이 있다는 것은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플라톤은 《법률》에서 새로운 국가 ‘마그네시아’를 건설한다. 이 나라에서는 당연히 수당제를 없애버렸다. 그러나 추첨제는 그대로 유지했다. 왜 그랬을까? 플라톤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투표를 통해 선출하는 것이 좋기는 하나) 국가적 분란을 피하기 위해서는 그 두 제도를 혼용할 필요가 있다. 평등과 관용이라는 것은 언제나 엄격한 정의의 덕목인 완전함과 정확함을 해치게 된다. 그러나 다수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평등을 표방하는 추첨제를 시행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럴 경우 그저 추첨의 결과가 정의와 부합되도록 신에게 기도하고 행운이 찾아들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한 국가가 오래 유지되자면 이런 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법률》각주20)
플라톤은 추첨제가 정의, 곧 좋은 정치에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첨 방식의 도입이 불가피하다고 본다. 대중의 환심을 사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신천지’인 마그네시아도 그들이 정치적 평등의 상징인 추첨제에 집착하고 있음을 외면할 수 없었다. 권력의 일정 지분을 요구할 수 있을 만큼 대중의 힘이 커졌고 현실적으로 이를 마냥 묵살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플라톤은 누구보다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각주21)
더 주목해야 할 사실은 플라톤이 아테네 민주주의의 긍정적 측면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그가 자유의 중요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플라톤은 정치 체제의 원형으로 둘을 든다. 왕정과 민주정이 바로 그것이다. 플라톤은 왕정의 전제적(專制的) 통치와 민주정의 자유가 동시에 구현되는 혼합 체제를 권면한다.
정치 체제에는 두 가지 원형이 있다. 이것으로부터 다른 체제들이 파생되어 나온다. 왕정과 민주정이 그 원형이다. 왕정은 페르시아 사람들이 오랜 시간 동안 실천해왔다. 그에 비해 민주정은 우리나라(즉, 아테네)에 의해 대표적으로 운용되어왔다. 다른 모든 정치 체제란 거의 예외 없이 이 두 체제의 변형에 불과하다. 만일 자유 및 현명한 판단 위에서 얻어지는 우애를 확보하고자 한다면 왕정과 민주정을 혼합한 정치 체제를 수립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이 두 요소를 골고루 내포하지 않은 정치 체제는 결코 제대로 작동할 수가 없다.《법률》각주22)
플라톤은 페르시아와 아테네의 영고성쇠를 분석하면서 동일한 변수를 이끌어냈다. 나라는 다르지만 흥하고 망하게 되는 과정이 유사하다는 것이다. 어떤 때 나라가 번성하는가? 자유가 통제와 적절히 조화를 이룰 때이다. 이렇게 되면 지배자와 백성이 하나가 되면서 나라의 힘이 결집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균형이 무너지면 나라에 위기가 엄습해온다. 페르시아의 경우, 잘못된 교육을 받은 키루스의 후손들이 백성들에게 적정한 수준의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는 철리를 무시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자유가 없고 압제만 있으니 국가적 통일이 훼손되고 그에 따라 국가에 큰 위기가 닥치게 된 것이다. 아테네도 과거에는 법에 대한 복종의 바탕 위에서 자유를 향유했다. 그래서 법치와 자유가 조화를 이루면서 페르시아의 침입을 격퇴하는 예상 밖의 기적을 창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의 역사는 법은 사라지고 자유만 횡행하는 시대를 목격하게 된다. 그 결과는 아테네의 몰락으로 나타났다.
결국 플라톤은 한편으로는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주의가 보여주는 순기능을 자신의 정치철학 속에서 확장시키고자 했다. 그의 문제의식은 민주주의의 틀 속에서 생활하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살아 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더 읽을 자료
김진경 외, 《서양고대사강의》(한울, 1996)
서양 고대사를 각 분야의 전문가가 쉽고 간결하게 쓴 책으로 그리스 고대사의 핵심 주제들을 이해하고 서양 고대사 전체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박종현, 《희랍 사상의 이해》(종로서적, 1982)
희랍 사상의 큰 얼개를 설명하고 있어 그리스 민주주의에 관한 밑그림을 그리는 데 적합한 책이다.
아리스토텔레스·크세노폰 외, 《고대 그리스정치사 사료》, 최자영 외 옮김(신서원, 2003)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정치 체제에 대한 거의 유일한 원전 자료로서 가치가 매우 높다. 이 분야를 공부할 때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하멜, 데브라, 《네아이라 재판소동》, 류가미 옮김(북북서, 2008)
아테네 시민들의 일상생활, 특히 재판 제도를 생생하게 전해준다.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허승일 외, 《인물로 보는 서양 고대사》(길, 2006)
솔론, 페리클레스 등 아테네 정치 지도자들에 대해 잘 소개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 로마 공화정, 로마 제정의 대표적인 인물들을 통해 서양 고대사에 접근한다. 서양 고대사를 연구한 국내 전문가들이 쓴 책이라 믿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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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이 글은 필자의 책 《자유의 미학—플라톤과 존 스튜어트 밀》(나남출판, 2000) 중 아테네 민주주의에 관한 부분을 전면 재편집하고 새로운 자료들을 추가해 보완한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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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성, 〈고대 그리스의 궤적〉, 허승일 외, 《인물로 보는 서양 고대사》(길, 2006)
- ・ 김창성, 〈페리클레스〉, 허승일 외, 《인물로 보는 서양 고대사》(길, 2006)
- ・ 류연승, 〈클레이스테네스〉, 허승일 외, 《인물로 보는 서양 고대사》(길, 2006)
- ・ 박종현, 《희랍 사상의 이해》(종로서적, 1982)
- ・ 서병훈, 《자유의 미학—플라톤과 존 스튜어트 밀》(나남출판, 2000)
- ・ 손병석, 〈페리클레스를 통해 본 지도자론〉, 《서양고전학연구》, 35(2009)
- ・ 아리스토텔레스·크세노폰 외, 《고대 그리스정치사 사료》, 최자영 외 옮김(신서원, 2003)
- ・ 양승태, 《앎과 잘남—희랍 지성사와 교육과 정치의 변증법》(책세상,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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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케이건, 도널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허승일·박재욱 옮김(까치, 2006)
- ・ 플라톤, 《에우더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박종현 옮김(서광사, 2003)
- ・ 하멜, 데브라, 《네아이라 재판소동》, 류가미 옮김(북북서,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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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Ober, Josiah, Political Dissents in Democratic Athens(Princeton :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8)
- ・ Ober, Josiah, Mass and Elite in Democratic Athens(Princeton :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9)
- ・ Thucydides, “The Essence of Thucydides”, M. I. Finley (ed.), The Portable Greek Historians(NY : Viking Press, 1960)
글
출처
서양 정치사상은 우리가 정치적 현실의 토대로 삼고 적용 · 발전시켜온, 정치의 원형이기에 우리의 문제를 직시하고 앞으로의 방향을 치밀하게 구상하기 위해 이를 제대로 인..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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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아테네 민주주의 – 서양 고대 중세 정치사상사, 전경옥 외, 책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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