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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규와 조약 무엇이 다른가?
‘강화도조약’(1876)은 (한)국사를 배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역사용어이다. 그런데 이의 정식명칭이 ‘수호조규(修好條規)’라는 사실, 수호라는 말은 그렇다 치더라도 조약(條約)이 아니라 ‘조규(條規)’라는 사실에 대부분의 사람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하다. 아마도 조규나 조약이나 그게 그것이 아니냐 하는 무관심 탓일 것이다. 그런데 ‘조규’와 ‘조약’은 진정 동의어일까? 만의 하나 그 둘의 의미가 전혀 다른 것이었다면? 그렇다면 우리가 이제껏 ‘강화도조약’으로 불러오고 또 당연히 조약이려니 하고 이해해온 것 역시 잘못 아니겠는가.
주지하는 바와 같이, 동아시아에서 국제법(=만국공법)을 기초로 한 조약체제가 처음 소개된 것은 아편전쟁 후 청이 서방국가들과 체결한 조약들에서 비롯된다. 일본 역시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 말기 미국의 페리 제독에 의한 이른바 ‘포함외교(砲艦外交)’에 굴복한 후 서방국가들과 차례로 조약을 맺어 국제질서를 규정하는 원리로서 조약체제를 받아들였다. 조선은 1882년 미국과 ‘조미조약(朝美條約)’을 체결함으로써 동아시아 3국 중 제일 마지막으로 조약체제를 수용했다.
조약체제가 소개 · 수용되던 당시, 동아시아 3국에서도 이 새로운 체제의 도래로 말미암아 기존의 질서, 즉 조공(책봉)체제를 어떤 식으로든 재편할 필요성에 직면했다. 그래서 맺어진 것이 청과 일본 간의 ‘수호조규’(1871)이고, 조선과 일본 간의 ‘수호조규’(1876)이며, 또 조선과 청 사이의 ‘상민수륙무역장정(商民水陸貿易章程)’(1882)이다. 그런데, 이들 3국 사이에 체결된 것들의 명칭을 보면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 바로 ‘조약’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3국이 모두 ‘조규’나 ‘장정’ 체결의 준비 과정에서 ‘조약’이라는 용어를 빈번히 사용했음에도 정작 명명하는 단계에서는 이를 외면한 데서 의문은 한층 더 증폭된다. 왜 조약이 아니고 ‘조규’ 혹은 ‘장정’이었을까? ‘조규’나 ‘장정’은 조약과 어떻게 다른 것일까?
청일 ‘수호조규’의 실질적 감독자였던 이홍장(李鴻章)이 조약이라는 용어를 회피한 까닭은, 조약이라는 자구(字句)를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일본이 서양과 같지 않다는 것을 말하려 했기 때문이다. 조선과의 ‘무역장정’ 역시 그러한 의도에서 나왔다. 청국은 적어도 동아시아권 내의 국가인 일본이나 조선은 과거 또는 현재의 조공국으로, 결코 자국과 대등할 수 없는 나라이기 때문에 이미 조약을 맺어 대등한 관계에 있는 서구 열강들과 달리 취급하려 했다. 이런 사실은 조약과 조규, 그리고 장정에 대해 명확히 규정하고 있는 다음의 청국 측 사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금 정하려는 것은 장정인바 조정이 특별히 허락하는 것이다. 조약은 피차가 대등하게 맺는 약장(約章)이지만, 장정이란 상하가 정하는 조규인 것이다. 그 명칭이 다르니 그 실(實) 역시 같지 않다.각주1)
이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장정이란 조정이 특별히 윤허하는 조규로 상하관계의 나라들이 맺는 것이며, 대등한 관계의 나라들이 맺는 조약과는 그 명칭이 다르기 때문에 그 성질 또한 다르다. 즉, 장정과 조규는 같은 말이나, 조규와 조약은 명실이 상이한 다른 용어이다.
조약체제의 침입을 맞이한 청은 그에 굴복하기보다는 일본 및 조선과 조규(장정)를 체결함으로써 대항하려 했다. 아니, 대항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조규라는 ‘트릭(trick)’을 사용해 조약체제를 오히려 기존의 조공체제 내로 흡수하려 획책했다. 청이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은, 일본과 조선은 과거의 조공국 혹은 현재의 조공국으로 자국과 상하관계에 있다고 하는 점이다. 즉, 자국의 하위에 있는 두 나라가 서구의 제국과 조약을 맺어 대등한 관계에 놓였기 때문에 그 서구 여러 나라는 자연히 청의 밑에 놓이게 된다는 점을 노렸다. 결과적으로 조약체제는 기존의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 체제 내로 편입 · 흡수될 수밖에 없는 모양을 띠게 되었다.
청이 조규를 통해 획책한, 조공체제도 아니고 조약체제도 아닌 ‘과도기적’ 체제를 필자는 그간 몇 편의 논문을 통해 ‘조규체제’라 규정한 바 있다.각주2) 근대 동아시아 국제질서 변동기의 상황에 대한 기존의 연구를 보면 ‘조규체제’에 대한 인식 내지 방법론의 부재로 말미암아 조공체제와 조약체제라는 이분법적 방법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당시의 역사상(歷史像) 역시 애매모호하게 서술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규체제’에 입각한 시각이 그 약점을 보완해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한편 당시 그러한 중국 측의 숨은 의도를 일본과 조선이 처음부터 알아채고 심각하게 고민했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단지 다음의 사료가 말해주듯이, 1882년 조선과 청 사이에 ‘무역장정’이 체결된 후 일본이 뒤늦게나마 청의 속셈을 간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나(支那)인의 지론은 조선에게 각국과 평등한 조약을 맺게 하고 또 내치외교를 공히 자주에 맡기면서 모두 지나의 속방(屬邦)이라는 것이다. 즉, 지나는 모든 나라 위에 위치하는 형세가 되는 것이다.각주3)
청은 조선에게 미국 등 서방국가들과 조약을 맺을 것을 줄기차게 권했고, 조선 역시 미국과의 조약 체결을 통해 ‘자주국’으로서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1882년 조미조약을 맺는다. 몇 달 뒤 청은 조선에게 ‘무역장정’을 맺을 것을 강요하고는 조선이 청의 ‘속방’임을 명시했다. 이로써, 앞서 말한 것처럼 자국의 ‘속방’인 조선과 대등한 조약을 맺은 해당국들은 자연스레 청의 밑에 위치하게 되었다. 이 대목에서 서방국과의 조약 체결을 끈질기게 권도한 청의 계략을 읽을 수 있다.
‘무역장정’은 내용과 형식 면에서 조공체제로도 또 새로운 조약체제로도 설명하기 어렵다. 그도 그럴 것이 ‘종주국’인 청도 분명히 밝히고 있듯이, 조공체제 내에서 조선은 내치 · 외교의 ‘자주국’이었다. 그런데 ‘무역장정’ 체결 이후, 즉 ‘조규체제’의 완성 이후 청은 조선을 철저히 간섭했으며, 조선의 ‘자주’는 완전히 배제되고 무시되었다. 즉, 양국의 관계가 기존의 조공체제로는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그러나 조선의 국제질서관은 청의 그것과 사뭇 달랐다. 즉, 조선이 비록 청의 조공국이긴 하지만 이제 미국을 비롯해서 서구 여러 나라와 대등한 조약관계를 맺고 있는 이상, 그들과 대등한 조약관계에 있는 청 역시 조선과 대등해져야 한다고 보았다. 청으로부터의 ‘자주독립’을 꾀하고자 하는 인식이 태동한 것이다. 그런 ‘탈화(脫華)’ 인식의 급진적 표출이 바로 갑신정변(1884)이었다. 정변 실패 후에도 그런 인식이 지속되었다는 점은 유길준의 다음과 같은 글에서 확인된다.
증공국(贈貢國)의 군주는 수공국(受貢國)의 국민이 섬기는 군주의 친구 대우를 받는 동등 조약국의 군주로부터 역시 친구로 대우받는 동시에 동등 조약국의 군주인 것이다. 그러므로 증공국의 군주는 곧 수공국의 군주가 경의로써 대우하는 친구의 역시 경외하는 친구인 것이다. 친구의 친구는 곧 자기의 친구와 같은 것이니, 누구를 친구로 삼는다면 그 사람의 친구도 또한 친구인 것이다.각주4)
여기에서 유길준은 친구(=서구 열강)의 친구(=청)는 곧 자기(=조선)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당시 조선의 애매모호한 국제적 위치를 조약체제도 아니고 조공체제도 아닌, 그 두 체제로부터 단절된 ‘양절체제(兩截體制)’라 비판했다. 유길준의 비판은 청이 획책해 행하고 있는 조규체제에 대한 비판에 다름 아니었다.
‘조규체제’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겠다. ‘조규체제’는 청이 자국보다 ‘하국(下國)’인 일본과 조선이 구미제국과 조약관계를 성립한 것을 전제로 안출(案出)한 것이다. 즉, 일본과 조선이 구미제국과 대등한 조약 체결에 의해 대등한 관계를 맺었음을 명확히 한 뒤에 이번에는 자국이 상하관계에 있는 일본 및 조선과 ‘조규’를 맺음으로써, 구미제국 역시 자국의 아래로 위치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고안된 것이다. 특히 속방인 조선이 구미 열강과 대등한 관계를 맺음에 따라 종주국인 중국이 자연스레 그들 열강 위에 위치할 수 있게 된다.
흔히 조공체제를 조약체제 내로 무조건 편입 · 수용된 것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실상은 그 반대로 조약체제가 광의의 조공체제 안으로 편입 · 수용되었다. ‘조규체제’는 형식상 또는 이론상으로 볼 때 조약체제가 조공체제 안으로 포함 · 편입된 일종의 ‘변질된 조공체제’였다. ‘조규체제’는 청일전쟁에서 청의 패배로 해체되었으며, 그에 따라 조공관계 및 조공체제 역시 붕괴되고, 이후 동아시아 3국 사이에도 비로소 조약체제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조규체제’의 창출 및 운용, 그리고 그 해체 과정이 이홍장 등 양무파(洋務派) 관료가 주축이 되었던 양무운동의 전개와 몰락의 과정과 궤를 같이한다는 사실이다. 익히 알려진 바대로, 양무운동의 기본사상인 ‘중체서용(中體西用)’의 본질은 구미의 여러 제도와 사상의 전면적 수용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고, 중국의 현상(現狀) 유지를 우선으로 서양의 장기(長技)를 받아들여 그들을 제압하는 것에 있었다. ‘조공체제를 전제’(=중체)로, ‘조약체제를 수용’(=서용)한 ‘조규체제’는 이른바 중국판 ‘근대성’의 모색이라 일컬을 수 있는 양무운동 실천의 일환이기도 했다.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배하자 양무운동은 빛을 잃는데, 이는 ‘조규체제’가 해체되는 시기와 일치한다.
이처럼 ‘조규체제’는 조선과 동아시아가 자체의 ‘근대성’(비록 그것이 단일개념이 아니라 할지라도)을 한창 모색하던 시기에, 청이 ‘유사(類似) 제국주의’를 조선에 실천하고 일본이 청과의 패권주의 쟁탈전에서 탈아주의를 표방하며 구미류의 제국주의를 흉내냄으로써, 그것이 철저하게 왜곡 · 좌절되어버리고 말았던 바로 그 중심에 있었다.
하나만 더 덧붙이자. 1882년 체결된 ‘조미조약’의 제12관은 “이 조약이 조선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조약”이라 규정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최초의 근대조약이라 알고 있는 ‘강화도조약’은 ‘최초’도 아니었고 또 ‘조약’도 아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혹자는, 1876년의 조일 ‘수호조규’를 ‘조규’로 표기함으로써 오히려 일본과의 상하관계를 규정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고민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1876년 ‘수호조규’가 체결될 당시 조선과 일본 양국이 청이 인식하고 있는 그런 유(類)의 ‘조규’에 대해 충분한 이해와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짐작되는 사료는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수호조규’는 양국 간의 상하관계가 인정되는 가운데 규정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한국사가 적어도 우리나라가 주체가 되어 서술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응당 우리가 규정하고 서술한 대로 조약이 아닌 ‘조규’로 쓰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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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조규와 조약 무엇이 다른가? – 역사용어 바로쓰기, 강정숙 외, 역사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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