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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9년 5월 12일, 황해도 장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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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76년 5월 17일 |
수상 | 건국훈장 독립장 1977년 |
선생은 1889년 5월 12일 황해도 장연군(長淵郡)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광산이다. 선생의 집안은 서울의 양반명문가였지만 낙향하여 만석꾼의 대지주가 되어 김 참판댁으로 불렸다. 이곳에 서양선교사와 연을 맺은 서상륜형제가 피신해 온 뒤로 서상륜형제들이 지역에 기독교를 전도하였다.
특히 큰오빠 김윤방(金允邦)은 개신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전 집안을 개신교로 개종시켰고, 나아가 마을에 소래교회와 학교를 설립하여 지역 근대화에 앞장섰다. 집안의 아들, 딸 막론하고 신식 교육을 받게 하였던 바, 선생도 역시 이러한 분위기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선생은 고향의 소래학교에서 교육은 후 상경한 오빠 김필순(金弼順)을 따라 1901년 어머니와 동생들과 서울로 이주하였다. 이 시기 김필순은 세브란스의학교를 다니며 안창호와 의형제를 맺고 애국지사와 친분관계를 맺고 자기 집을 구국운동을 위한 장소로 제공하였다. 오빠들의 우국 충정한 사회활동은 선생으로 하여금 민족과 나라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선구적인 오빠들의 활동으로 민족운동과 교육운동에 헌신한 애국지사 다수를 배출한 집안이란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일제시기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이끌었던 김마리아는 큰오빠의 딸이며, 둘째오빠 김윤오(金允五)는 구국계몽운동단체 서우학회 발기인이었고, 셋째오빠 김필순(金弼淳)은 신민회원으로 한국최초의 의사가 되어 만주 통화와 내몽고 치치하얼에서 독립운동자금과 토지를 제공했던 애국지사다.
한국 YWCA의 창설자이며 민족교육자였던 여동생 김필례, 등이 그의 가족이었다. 그 외에 선생의 남편 김규식, 언니 김구례(金求禮)의 남편 서병호(徐丙浩)는 신한청년당과 상해임시정부에서 선생과 함께 활동한 독립운동가였다.
정신여학교에서의 실력 양성
선생은 상경한 후에 정신여학교에 입학하였다. 선교학교였지만 민족 교육에도 중점을 두어 한국여성교육의 배움터가 되었다. 특히 한국역사를 배우면서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는 민족의식을 키울 수 있었고, 한국여성을 깨우칠 자기의 책임도 깨달았다.
정신여학교는 전원이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학비는 무료였다. 선생 외 동생 김필례, 조카 김함라, 김마리아 등 한집안 여성들이 모두 이 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김필순은 자기 집안 여인들이 무료교육의 혜택을 받게 되면 외국의 동정을 받는 것이니, 민족의 긍지에 허물이 된다고 판단하고 모두의 학비를 지불하였다. 오빠의 남다른 생각은 김순애는 물론 집안 여인들의 민족의식과 시대관을 확립하는데 영향을 끼쳤다.
선생은 1909년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부산 초량소학교(草梁小學校) 교사로 부임하였다. 소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도 하숙집에서 학생들에게 비밀리에 한국역사와 지리를 가르치며 민족의식고취에 노력하였다. 그런데 그의 구국교육활동이 발각되자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중국으로의 망명을 결정하였다.
세브란스의사였던 김필순은 신민회(新民會)의 일원으로 활동한 탓에 일제총독부가 날조한 ‘105인사건’으로 검거당할 위기에 처하자 1911년 중국 서간도 퉁화 현(通化縣)으로 피신하였고, 선생은 오빠의 권유로 1912년 6월 어머니와 오빠네 가족들을 데리고 통화로 망명하였다.
망명지 남경에서 독립운동가 김규식과 결혼
이후 선생은 1915년 9월 만주 통화현에서 남경(南京)으로 옮겨 명덕여자학원(明德女子學院)에 입학하여 수학하던 중, 1919년 1월 김규식과 부부의 연을 맺었다. 김규식은 선생의 오빠인 김필순과 막역한 친구 사이였고, 또 같은 새문안교회의 교인이었다.
선생은 남경에서 간단한 혼인서약과 사진 한 장으로 조촐히 결혼식을 치른 후 남편 김규식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긴 신한청년당의 부름에 응하여 급히 상해로 이주한 것이다. 상해로 이주한 선생은 남편과 함께 1918년 여운형(呂運亨), 서병호(徐丙浩), 김철(金澈), 조소앙(趙素昻), 조동호(趙東祜) 등이 조직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에 가입하고 이사(理事)로 활동하였다.
신한청년당은 1919년 1월 18일부터 개최되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를 파견하여 일제 식민지 통치의 실상을 폭로 선전하면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또한 만주 ・ 노령과 국내에는 강화회의에 한국대표 파견사실을 전하고, 동조를 위해 각 지역 시위투쟁을 전개하도록 촉구할 대표를 파견하기로 하였다.
그것은 국내와 만주에서 일시에 거족적인 민족봉기를 일으켜 우리 민족 전체가 진정으로 일제의 식민통치를 거부하며 민족독립을 염원한다는 사실을 세계만방에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럼으로써 파리강화회의에 참가한 각국 대표들의 한국 문제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고, 나아가 한국대표의 독립 외교활동을 지원함으로써 민족대립을 달성하려는 구상의 실현이었다.
그리하여 신한청년당에서는 미국의 로녹대학(Roanoke College)을 졸업하여 영어에 능통한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의 한국대표로 선정한 것이다. 신한청년당 당원이 된 김규식은 1919년 파리로 출발하였다. 곧바로 신한청년당은 파리 한국대표파견을 위한 지원과 그 후원을 위한 독립운동 촉구계획을 실천에 옮겼다.
이에 따라 선생은 선우혁 ・ 김철 ・ 서병호와 국내로, 여운형을 만주와 노령 연해주로, 조소앙 ・ 장덕수(張德秀)를 일본 동경으로 각각 파견되어, 국내는 물론 해외 한인동포들의 독립운동 봉기를 촉구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국내로 밀파된 선생은 1919년 2월 선편으로 부산에 도착한 후 부산에서 백신영(白信永), 대구에서 김마리아, 서울에서 함태영(咸台永)을 만나 한국대표의 파리강화회의 파견 소식을 전달하고, 국내의 독립운동 봉기를 촉구하였다. 그런데 당시 선생은 3 ・ 1운동을 추진하는데 깊숙히 관여하고 있던 함태영으로부터 이미 국내에서 천도교 ・ 기독교 ・ 불교 등 종교계를 중심으로 거족적인 독립선언대회가 추진되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선생은 국내의 3 ・ 1운동에 동참하려 하였으나, 함태영이 “그러다 잘못되면 파리에 가 있는 김규식의 사기에 영향을 미칠 것이고, 그러면 민족의 대업 완수에 지장이 있을 것이다”라는 주장에 밀려 3 ・ 1만세운동에 동참하지 못하고 2월 28일에 국내를 떠났다.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 전개
1919년 2월 28일 중국 여자로 변장하고 평양(平壤)을 거쳐 압록강을 건너 선생은 흑룡강성(黑龍江省)에서 병원을 개설하고 땅을 매입하여 조선인을 위한 이상촌 건설활동 중이던 김필순을 찾아 갔다. 여기서도 선생은 한인동포들을 규합하여 국내의 3 ・ 1운동과 같은 독립만세시위운동을 계획 추진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어 일본영사관에 감금되기도 하였지만, 중국 관원의 도움으로 상해로 탈출하였다.
상해로 다시 귀환한 선생은 1919년 7월 이화숙(李華淑), 이선실(李善實), 강천복(姜千福), 박인선(朴仁善), 오의순(吳義順) 등과 함께 ‘여성의 독립운동 참여와 지원’을 목적으로 대한애국부인회(大韓愛國婦人會)를 조직하였다. 선생이 회장으로 주도한 대한애국부인회는 김마리아 등 정신여학교 출신 인사들이 비밀리에 서울에서 결성한 대한민국애국부인회(大韓民國愛國婦人會), 평양(平壤)에서 김경희(金敬喜) 등이 조직한 대한애국부인회(大韓愛國婦人會) 등 국내외의 애국부인회와 긴밀하게 연계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선생은 이들 단체들과 연락 ・ 협력하면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에 전달하고, 독립운동자들과 그 가족들을 뒷바라지하고, 해외 각지에 한국지도와 태극기 등을 제작하여 보급하면서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전파하였다.
독립전쟁을 대비하여 간호원 양성
이와 함께 7월 13일 이희경(李喜儆), 안창호(安昌浩), 안정근(安定根) 등의 발의로 8월 임시정부 내무부의 인가를 얻어 ‘독립전쟁으로 인한 전상병(戰傷兵)의 구호’를 목적으로 하는 대한적십자회(大韓赤十字會)가 상해에서 재건되자 선생은 여기에도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대한적십자회의 사검(査檢) ・ 이사(理事) 등으로 활동하였고, 이듬해 1월에는 그 부설기관으로 간호원양성소를 설립하여 다수의 간호원을 양성 배출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독립전쟁에 대비하기도 하였다.
대한적십자회는 비밀리에 국내에 지부를 설치하여 상호 연락하면서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제의 소위 ‘간도출병(間島出兵)’ 이후 일본군이 저지른 재만 한인동포에 대한 학살 만행을 세계 각국의 적십자회에 알려 규탄하는 선전활동을 폄으로써 한국 독립운동의 외연을 넓혀 갔다.
이밖에도 대한적십자회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개최된 국제적십자총회에 이관용(李灌鎔)을 대표로 파견하여 창립 보고와 함께 참가신청을 하였다. 그리고 이를 저지하는 일본 정부와 일본적십자회에 항의서를 제출하고, 그 내용을 국제적십자총회의 기관지에 게재하는 등 대한적십자회의 독립적 지위와 권리를 보장받기 위한 외교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같은 대한적십자회의 활동 뒤에는 항상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선생의 노력이 배어 있었다.
민족교육기금 조성운동 전개
“교육은 우리 민족의 생명이다. 교육이 있으면 살고 교육이 없으면 죽는다”라고 하는 취지 아래 1920년 상해의 대한인거류민단(大韓人居留民團)을 중심으로 해외 한인교육의 기초를 확립하기 위한 민족교육기금 조성운동이 전개되자, 선생은 이에 솔선수범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당시 여운홍(呂運弘)이 교장으로 있던 상해 한인동포 자제의 민족교육기관인 인성학교(仁成學校)의 유지비를 지원하고, 교사 신축비를 모금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달 30일 열린 상해 대한인거류민단 총회에서 선생이 18인 의원 가운데 한 분으로 뽑힌 것도, 거류민 아동의 민족교육에 대한 깊은 관심과 그 기초를 확립한 공적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선생은 임시정부의 지지·후원활동과 함께 교민 보호와 아동교육의 일까지 맡게 되었다.
이후 파리강화회의 ・ 국제연맹회의 ・ 태평양회의 등 잇따른 국제회의에서의 외교 독립운동의 실패로 침체된 독립운동계에 활력을 불어넣고, 이념과 방략상의 갈등으로 핵심 요인들이 탈퇴하여 축소된 임시정부를 독립운동의 최고 영도기관으로 확대 개편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가 1923년 1월부터 5월까지 상해에서 열리게 되었다.
선생 또한 대한애국부인회 대표로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여 이념과 정파를 초월한 독립운동세력의 통합과 그 최고 통할 지도기관을 창출하기 위한 노력에 동참하였다. 하지만 기존의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독립운동의 최고 영도기관을 재창출하자는 창조파(創造派)와 현재의 임시정부를 확대 개편하자는 개조파(改造派)로 나뉘어 치열한 논쟁을 거듭하더니, 결국 국민대표회의는 독립운동세력의 화합과 통합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서로 상처만 남긴 채 끝나고 말았다. 그리하여 임시정부와 그 독립운동은 더욱 위축되어 갔다.
한인여자청년동맹 결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이후 상해에서 독립운동자들의 옷세탁은 물론, 삯바느질도 하고, 하숙도 치고, 와이셔츠 공장도 경영하면서 남편의 독립운동은 물론 임시정부의 명맥을 지키고 유지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염출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경주하였다. 특히 이 시기 임시정부가 자금난으로 곤경을 겪게 되자 선생은 1926년 7월 안창호, 송병조(宋秉祚), 김보연(金甫淵), 조상섭(趙尙燮), 박창세(朴昌世), 엄항섭(嚴恒燮) 등이 조직한 임시정부경제후원회(臨時政府經濟後援會)에 참여하여 지속적으로 임시정부의 재정 지원 활동을 벌여 갔다.
1930년 8월 선생은 상해에서 김윤경(金允經), 박영봉(朴英峰), 연충효(延忠孝)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산하의 여성 독립운동단체로 한인여자청년동맹(韓人女子靑年同盟)을 결성하였다. 이 동맹의 집행위원으로 선임된 선생은 한국독립당과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측면 지원하면서 3 ・ 1운동 기념일에는 항일 격문과 전단을 제작 배부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이후 임시정부와 그 요인들은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투탄 의거로 일제의 추적이 심화되자, 상해를 떠나 항주(杭州, 1932) ・ 진강(鎭江, 1935) ・ 장사(長沙, 1937) ・ 광동(廣東, 1938) ・ 유주(柳州, 1938) ・ 기강(1939) 등지로 이동하면서 명맥을 이어갔다. 1940년 9월 중국 국민당의 후원으로 중경(重慶)에 안착하면서 민족의 모든 역량을 대일 항전에 결집하기 위해 민족통일전선의 형성에 나서자 독립운동단체들도 주의와 정파를 초월하여 본격적으로 통합운동을 추진하였다.
이같은 분위기는 여성운동계를 재결집하여 민족통일전선에 나서게 하였다. 1943년 2월 23일 선생은 충칭의 각계 각파 부인 50여명과 한국애국부인회 재건대회를 개최하고, 조직을 재출범시켰으며 주석으로 추대되어 한국애국부인회재건선언과 7개항의 강령을 발표하였다.
강령에서 구국을 위해 여성들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였는데, 그 핵심은 “국내외의 부녀는 총단결하여 전민족해방운동을 추진하되 남녀간에 평등한 권리와 지위를 향유하는 민주주의 공화국 건설에 적극 참여하고 국제적 부녀단결을 공고히 하여 전세계 여성과 전인류의 영원한 화평 행복을 위한 공동 분투를 하자.”였다.
이어 재건 한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선생은 주석으로 추대되었고, 박순희는 부주석, 그밖에 최소정 ・ 김운택 ・ 연미당 ・ 강영파 ・ 권기옥 ・ 정정화 등이 각부 주임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각종 매체를 통해 국내외 동포 여성들에게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며 독립운동 참여를 호소하고, 의연금품을 모아 무력항쟁을 준비하는 광복군을 위문하는 등 독립운동 지원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여 갔다. 아울러 연합군측으로부터 인계받은 동포여성들을 교육하여 독립운동에 참여케 하고, 해외 각지의 한인여성단체들과 긴밀한 연계를 가지면서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도왔다.
재중자유한인대회 선언문 발표
1942년 여름부터 2차 대전 후 미국의 대외정책 중 한국을 ‘국제공동관리’한다는 구상으로 결정된 후, 1943년 3월 워싱톤에서 영국 외상 이든과 미국대통령 루스벨트가 만나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한국을 국제신탁통치 아래 둘 것을 합의하였다는 소식이 중경의 신문을 통해 전해졌다. 이에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단체들이 즉각적으로 반대입장을 표명하였다.
1943년 5월 10일 한국애국부인회를 비롯한 한국독립당·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 ・ 조선민족해방동맹(朝鮮民族解放同盟) ・ 무정부주의연맹(無政府主義聯盟) ・ 한국청년회(韓國靑年會) 등은 공동으로 재중자유한인대회(在中自由韓人大會)를 개최한 것이다. 이때 선생은 한국애국부인회 대표로 한국독립당의 홍진(洪震) ・ 조선민족혁명당의 김충광(金忠光) ・ 조선민족해방동맹의 김규광(金奎光) ・ 무정부주의연맹의 유월파(柳月波) ・ 한국청년회의 한지성(韓志成)과 함께 주석단의 일원으로 추대되어 이 대회를 주도하였다.
여기에서 선생을 비롯한 이들 단체의 대표들은 어떤 외세의 압박과 간섭도 반대할 것을 결의하고, “한국은 마땅히 독립국이 되어야 하고, 한민족은 마땅히 자유민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 「자유한인대회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1. 우리는 우리 민족의 영구한 생존발전과 전인류의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찾기 위하여 우리 국가의 완전독립을 주장한다.
2. 전후 한국을 국제 감시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요구에 위배되며, 또 동맹국의 대(對)일본 작전방침에 해로우며, 또 루즈벨트 ・ 처칠 선언의 기본정신에도 배치되는 것이므로 이것을 절대로 반대하는 바이다.
3. 우리는 동맹국의 승리와 일구(日寇)의 멸망을 확실히 믿음으로 단결하고 노력하여 일본을 반대하는 대혁명을 일으키려 한다.
4. 동맹 각국들은 우리 민족의 역량을 인정하여 적극적으로 물자를 원조하고 우선 임시정부의 국제적 합법적 지위를 승인해 주기 바란다.
라고 하는 「각 동맹국 영수들에게 보내는 전문」을 성안 발송하여 한국 민족의 완전 독립을 요구하면서 우선적으로 임시정부의 승인을 촉구하였다.
아울러 이들은, “친애하는 동지 동포 여러분! 우리들은 실로 각 동맹국의 원조를 필요로 한다. 이 위에 가장 필요한 것은 우리 민족의 공고한 단결과 자력갱생이다. 이러한 역량을 가져야만 완전 독립과 철저한 해방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일어서라! 우리 임시정부의 깃발 아래로 어느 한 사람이나 한 단체라도 모두 모이라! 그리하여 승리적인 전도(前途)를 향하여 용감히 전진하자!”라고 하는 「각 지방 동지와 동포들에게 보내는 공개장」을 채택 발표하여, 임시정부의 깃발 아래 일치단결하여 우리 민족의 완전 독립과 철저한 해방을 획득하자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선생을 비롯한 이들 단체의 대표들은 우리 민족의 완전 독립과 임시정부 중심의 독립운동을 여러 차례 절규하였는데, 이는 광복 이후의 외세 개입과 정치적 혼돈을 우려한 매우 시의적절(時宜適切)한 지적이고 주장이었다.
8 ・ 15 광복 이후 선생은 1945년 11월 임정요인 1차 환국 때 김구, 김규식, 이시영(李始榮), 김상덕(金尙德), 엄항섭, 유동열(柳東說) 등과 같이 그리던 고국 땅을 밟았다. 이후 1946년부터 1962년까지 모교인 정신여자중 ・ 고등학교 재단 이사장과 이사 등으로 활약하면서 여성교육에 공헌하였다. 선생은 1976년 5월 17일 87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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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김순애 – 국가보훈부 독립운동가, 국가보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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