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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고대/삼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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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시기 | 백제건국 초기 |
성격 | 도성 |
유형 | 유적 |
분야 | 역사/고대사 |
요약 백제시대의 도성(都城).
개설
위례라는 명칭은 한성시대 백제의 도성이었던 위례성을 의미한다. 그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한강을 가리키는 아리수(阿利水)·욱리하(郁利河)의 ‘아리’·‘욱리’에서 기원하였다. 여기서 ‘아리’·‘욱리’는 모두 크다〔大〕는 뜻을 지니고 있는 만큼, 대성(大城)의 뜻이다.
그리고 백제에서 왕을 가리키는 ‘어라하(於羅瑕)’의 ‘어라’에서 기원하였다는 설이 있다. 곧 왕성(王城)의 뜻이다. 그 밖에 ‘우리’, 즉 울타리에서 기원하였다는 설이 있다. 그 뜻은 성곽을 의미한다.
위례성을 한강을 기준으로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과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으로 나누기도 하고 별개의 도성이 아닌 하나의 도성(都城)으로 보기도 한다.
역사적 변천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부여계(夫餘系)인 비류(沸流)와 온조(溫祚)의 집단이 남쪽으로 내려와서 건국한 근거지가 위례성이라고 한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하남의 땅은 북쪽은 한수(漢水)가 흐르고, 동쪽은 고악(高岳)을 의지하고 있으며, 남쪽은 기름진 옥토를 바라보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건국한지 13년만에 하남위례성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하므로 처음에 정착한 위례성의 위치는 하북, 즉 한강 북쪽에 있었을 것이다. 그 위치는 서울 북한산 동쪽 산기슭이나, 북한산을 배경으로 한 세검동·평창동계곡 일대 또는 상계동·중랑천 방면을 비정(比定)하고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하북위례성에서 한강 남쪽으로 천도한 곳이 하남위례성이다. 천도 시기는 『삼국사기』에 따르면, 서기전 6년(온조왕 13)이지만, 실제는 그보다 훨씬 후대의 일로 보인다.
내용
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가장 오래된 설은 『삼국유사(三國遺事)』기록에 근거한 ‘직산설(稷山說)’이고, 그 외에 ‘삼각산동록설(三角山東麓說)’, ‘세검동계곡설(洗劍洞溪谷說)’, ‘고양부근설(高陽附近說)’, ‘북한산성설(北漢山城說)’, ‘중랑천유역설(中浪川流域說)’, ‘이성산성설(二聖山城說)’, ‘몽촌토성설(夢村土城說)’, ‘풍납리토성설(風納里土城說)’ 등이 있다. 이처럼 여러 견해가 제기되었지만 백제초기의 도성과 연관된 유적·유물의 조사가 빈약하므로 아직 그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명쾌한 해답을 내놓지는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은 백제 초기 고분밀집지대인 서울시 송파구 석촌동·가락동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몽촌토성을 하남위례성으로 비정하였다.
몽촌토성은 남북 길이 750m, 동서 길이 500m, 전체 둘레 2,285m, 넓이 약 44만㎡에 이르는 토성이다. 성은 본성(本城)과 이보다 작은 외성(外城)으로 되어 있다.
성 외곽 둘레에는 방어용 하천인 해자(垓字)시설과 성의 방비를 위한 목책(木柵) 구조물이 있음이 밝혀졌고, 내부에는 백제 초기의 움집터와 기와 및 토기를 비롯한 각종 생활도구들이 출토되었다.
그 동안 하남위례성의 위치가 지금의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春宮洞)과 남한산성(南漢山城)을 포함하는 일대라고 주장하는 학설이 있었다. 그러나 춘궁동의 지형은 동·서·남 세 방면이 막히고 북쪽만이 트여 있다. 따라서 위에서 인용한 백제 초기 하남위례성의 지형과 다르며, 왕궁터의 기본형이 되는 남향도 아니다.
이곳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369년(근초고왕 24)에 백제왕이 고구려 평양성까지 쳐들어가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살해하고 돌아온 뒤, 고구려의 남침이 두려워 한산(漢山)으로 천도하였다고 하는 내용으로 미뤄볼 때, 한 때 도성이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한편, 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 『삼국유사』에서는 지금의 충청남도 천안시 직산읍으로 비정하였다. 직산이 위례성으로 지목된 근거는 확실하지 않으나, 475년한성함락 후 남쪽으로 피란하던 문주왕이 일시 머물렀던 데서 기인한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또한 웅진천도 후, 한성시대의 지명이 이동한데 기인한 현상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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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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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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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위례성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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