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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지명/자연지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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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지리/자연지리 |
요약 영산포는 전라남도 나주시 영강동 · 영산동 · 가야동 · 이창동 · 부덕동 지역의 영산강 남안에 있었던 하항(河港)이다. 과거 가항하천의 종점이었던 영산포는 현재 영산동과 영강동, 이창동으로 크게 분구되어 변경되었고, 항동(港洞)으로 명칭이 바뀌면서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조선시대와 일제 강점기 때는 포구로서의 역할과 산물의 집산지로 번성했으나 이제는 흔적만 남아있다. 지금은 과거의 모습을 간직한 채 도시재생뉴딜공모사업으로 새로운 도약을 시도하고 있다.
#명칭 유래
자연환경
영산포의 행정구역은 위치상 영산강을 중심으로 영산포 선창(船艙)이 있던 강남과 호남선(湖南線)의 구 영산포역이 있던 강북으로 나뉜다. 강북은 나주와 육로상으로 접속되어 있고, 선창은 강으로 나주와 영산교, 영산대교를 통해 접속된다. 영산강 가항 하천(可航 河川)의 종점인 영산포구는 주로 영산강 남안(南岸)에서 집중해 있다. 나루 기능과 함께 고깃배와 조운의 큰 배들이 접안(接岸)할 수 있는 선창은 깊은 수심을 유지할 수 있는 공격사면이 유리하다. 영산포 선창 주변은 그리 높지 않고, 접근이 가능한 20~30m 구릉(초문뫼)이 침식되지 않고 남아 있어 접안에 유리하다.
포구 서쪽에는 풍화에 강한 화산암(火山岩) 계열의 별봉산(167.9m), 가야산(190.5m), 복목산(93.96m)의 산줄기가 상대적으로 높게 뻗쳐 있다. 하지만 동쪽은 불국사 화강암의 풍화층(風化層)이 구릉과 범람원(氾濫原)으로 남아 있어 육상과 해상 길목에 유리하다. 또한 영산포구는 영산강 본류와 접안하고 동쪽으로 지류인 봉황천과 서쪽으로 만봉천이 합류하고 있다. 더구나 밀썰물 구간의 끝자락에 위치해 수심과 하운에는 유리한 수심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상류와 지류의 물이 홍수로 물이 차고 밀물이 밀고 오는 때에는 홍수가 일어나기 쉬워 영산포구의 배후 구릉지(丘陵地)엔 피수대가 남아 있을 정도이다.
변천과 현황
영산포(榮山浦)라고 하면 영산강, 홍어, 포구를 떠올린다. 그렇지만 현재 영산포라는 행정지명은 없고, 도로명이나 구 철도역명, 교회명 등으로 유물화된 명칭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영산포라고 지금도 부르고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영산포의 연혁을 보면, 고려시대에 영산현, 후에 영산군에 속하였으나 조선시대에는 나주목(羅州牧)에 속한 포구 취락이었다. 1904년에는 양지면(良知面)이 되었다가 인구가 밀집하면서 1927년, 영산포읍으로 승격되었다. 1981년에는 나주군 나주읍과 병합하여 금성시가 되었고 1986년, 나주시로 변경되면서 지금은 영산동, 영강동으로 분구되고 개명되었다. 과거 선창을 중심으로 한 영산포는 사라지고 기억 속에서 남아 있다. 구 영산포읍은 영강동, 영산동과 이창동 등으로 쪼개져 그를 대신하고 있다.
현재 영산포에 해당하는 3개 동의 면적은 36.23㎢이며, 가구 수는 5,463호이며, 총인구 9,008명(남자 4,635명, 여자 4,373명)이다, 영산포는 내륙의 정주성과 해양의 역동성, 산지와 평야, 본류와 지류, 경관의 과거와 현재성을 점이적으로 갖고 있는 공간이다. 이러한 생태 지리적 점이성은 매우 다양한 자연환경과 공간적 특성을 중첩한 길목과 같다.
영산포는 역동적 해양문화와 물산이 밀썰물 구간을 따라 올라오는 해양의 통로이면서, 정주적 내륙 문화와 물산이 다시 밀썰물 구간을 따라 전해지는 통로이기도 하다. 과거 세곡(稅穀)은 주로 내륙과 연안 수로를 통한 조운으로 운반되었다. 조선 반도의 최대 내륙 평야를 끼고 있는 나주벌의 세곡은 이곳에 모여 영산강을 따라 서해를 돌아 한양으로 흘러갔다. 그러다 중종 때 험난한 수로의 파선을 피해 영산포의 조운이 법성포(法聖浦)로 옮겨가면서 조운의 기능은 상실되었다. 그러나 주변 지역 산물을 집산시키고 거래하는 중심지로서의 포구 기능은 지속되었다. 흑산도의 홍어가 영산포의 홍어로 유명해진 것은 바로 이 포구의 기능 때문이다. 이러한 영산포의 포구 기능은 다시 근대화의 물결과 함께 일제강점기의 지리적 공간성을 통해서 내륙과 해양을 잇는 포구와 함께 호남선 역 개통으로 수로와 육로를 잇는 중요한 포구로 변신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목포가 개항되고 일본인 미곡상(米穀商)들이 들어오면서, 특히 1904년에 동력선의 출항으로 목포와 영산포 간의 운항 시간이 단축되었고 그 결과 영산포가 크게 번영하였다.
영산포의 배후 시가지는 1910년 이전에 시장통을 중심으로 형성된 최초의 거리인 모토마치[元町]이다. 1914년에는 한국인은 2140명, 일본인은 857명이 거주하는 밀집 지역이 되었다. 1914년, 영산포 선창과 호남선이 통과하는 영산포역을 연결하는 중요한 목교인 영산교가 준공되면서 해상과 육상 교통의 결절점으로 더욱 번창하였다. 또한 영산포의 물목부를 넓혀 물길의 소통을 원활케 하여 홍수를 줄이려는 하천 개수 공사도 시행되었다. 하지만 1960년대까지 포구의 역할을 수행한 영산포는 점차 철도와 도로에 의한 육상 교통이 발달하고, 포구에 토사가 퇴적되며 수심이 얕아지면서 하항과 포구로서의 기능이 소멸하게 되었다.
현재 영산포는 국도 13호선이 지나는 영산대교로 육상 교통이 이어졌다. 이제 흔적으로 남은 내륙 등대는 2004년 12월, 등록문화재(현, 등록 유산)로 지정되었다. 등대 옆은 영산강을 유람하는 황포 돛배 선착장이 새로 개설되어 있다. 옛 영산포 선창에서 정미소 거리까지 약 750m에 일제강점기에서 1950년대까지의 정미소, 창고, 일본식 가옥, 상가 등 약 100채가 당시의 시가지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아울러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 건물과 당시 지주 일본인 쿠로즈미 가옥, 식산 은행, 헌벙대 건물 등이 남아 있다.
또한 영산포 선창 배후 구릉지에는 전통시장이 있고, 교회, 성당, 불당, 무당 등 다양한 종교와 무속 신앙을 볼 수 있다. 거리에는 여인숙과 같은 숙박 시설, 홍수 시 피난처인 피수대, 언덕을 오르는 계단에 설치된 자전거 통로 등 지금은 잊히고 사라진 시설과 골목길 풍경들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선창 강 건너편의 구 영산포역은 폐역으로 현재 역사와 철도 박물관과 철도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영산포의 구 선창 주변은 홍어로 유명한 홍어거리로 변했고 전국에 삭힌 홍어를 제공하는 맛집들이 들어서 있다. 영산포의 홍어는 흑산도 일대에서 잡힌 홍어가 뱃길로 영산포에 이를 때쯤 삭혀지면서 톡 쏘는 홍어 맛이 제일이라 옛날부터 명성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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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대동지지(大東地志)』
-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 『지방항정구역요람(地方行政區域要覽)』 (내무부, 1983)
- ・ 『한국지명요람(韓國地名要覽)』 (건설부국립지리원, 1983)
- ・ 김경수, 「영산강 유역의 경관변화 연구: 영산포 시가지 형성과 간석지 개간을 중심으로」 (전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1)
- ・ 김홍기, 「나주시 옛 영산포 시가지의 경관변용과 주민의식에 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논문집 23-10, 대한건축학회, 2007)
- ・ 대한민국 정책포털(http://www.korea.kr)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한국학 관련 최고의 지식 창고로서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과 업적을 학술적으로,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한국학 지식 백과사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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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영산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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