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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벤트(event)에는 입장권이 필요 없다. 물질이 블랙홀에서 탈출하지 못하는 경계를 무엇이라 부르는가?”
삑~!
“왓슨!”
“사건(event)의 지평선입니다.”
“정답입니다.”
·
·
·
“문학 작품 속 인물. 악의 근원. 바랏두르의 탑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됨. 거대한 눈처럼 생겨서 못 보고 지나치기 힘들다.”
삑~!
“왓슨.”
“사우론입니다.”
“사우론, 정답입니다.”
2011년 2월 14~16일 미국의 유명한 퀴즈쇼 ‘제퍼디’에 얼굴 없는 참가자가 나타났다. 목소리만으로 대결에 임한 이 색다른 참가자의 이름은 왓슨이었다. 왓슨의 상대는 역대 제퍼디 출연자 중 상금을 가장 많이 획득한 브랫 러터와 가장 오랫동안 연속으로 우승한 켄 제닝스. 왓슨은 이 막강한 퀴즈의 대가들을 상대로 전혀 주눅이 들지 않은 채 대결을 펼쳤다. 최종 결과는 왓슨 7만 7147달러, 켄 제닝스 2만 4000달러, 브랫 러터 2만 1600달러였다. 왓슨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이 대결이 눈길을 끈 건 왓슨이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왓슨의 정체는 IBM이 만든 인공지능이었다. 왓슨은 슈퍼컴퓨터 ‘블루진’을 이용한다. 3.5GHz로 작동하는 CPU 2880개, 메모리 16TB(테라바이트, 1000GB)가 장착된 강력한 컴퓨터다. 여기에는 인터넷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 전체를 비롯해 모두 2억 쪽 가량의 자료가 들어 있다. 왓슨은 초당 500GB의 자료를 처리하며 문제에 대한 답을 찾는다. 단순히 많은 자료를 빨리 처리할 수 있다고 이길 수 있는 건 아니다. 때로는 비유적인 표현까지 쓰는 문제를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정답을 틀리면 그에 해당하는 금액을 잃기 때문에 다음 문제를 고르는 전략도 필요하다.
문제를 이해하는 능력에서 왓슨은 사람에게 밀린다. 특히 문제가 짧을수록 어렵다. 하지만 정보를 기억하는 양이나 처리하는 속도는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다. 엄청난 처리 속도로 단점을 극복하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이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이던 분야에서 컴퓨터에 따라잡히는 경우는 이전에도 있었다. 1997년 IBM이 만든 체스컴퓨터 ‘딥블루’는 당시 세계 챔피언이었던 게리 카스파로프와 대결해서 이겼다.
그러나 왓슨이나 딥블루를 진정한 인공지능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딥블루는 사람이 설계한 방법에 따라 체스를 둘 뿐이며, 왓슨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정해진 대로 작동해 빠른 속도로 결과를 내놓지만, 자기가 뭘 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리 사람보다 뛰어나 보여도 결국은 계산만 엄청나게 빠른 기계일 뿐 진정으로 생각한다고 할 수는 없다. SF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사람처럼 생각하는 기계를 만들자는 생각은 컴퓨터가 처음 태어나던 시절부터 있었지만, 아직 그 바람은 요원한 상태다.
사람처럼 대답하면 인공지능일까?
1930~1940년대 컴퓨터의 발판을 닦은 과학자들은 사람의 뇌에 관심을 뒀다. 컴퓨터과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영국의 수학자 앨런 튜링은 1950년에 ‘계산하는 기계와 지성’이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기계가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보자고 제안했다. 오늘날 책상 위의 데스크톱부터 슈퍼컴퓨터까지 모든 컴퓨터의 기반이 된 구조를 만든 수학자 존 폰 노이만도 마찬가지였다. 노이만은 당시의 이론을 바탕으로 뇌와 컴퓨터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탐구했다. 만약 이 시기에 컴퓨터를 뇌와 비슷하게 만들기 시작했다면, 컴퓨터는 지금과 다르게 발달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1943년 신경생리학자 워렌 매컬럭과 월터 피츠는 ‘신경 활동에 내재한 논리 계산법에 대한 아이디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들은 뉴런이 컴퓨터의 기본 단위인 논리 게이트와 마찬가지로 논리 계산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컴퓨터는 논리 게이트 수백만 개 이상의 집합이고, 뇌는 뉴런의 집합이니 뇌 또한 컴퓨터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었다. 당시에는 뇌를 생물학적으로 분석해 나온 증거가 없었음에도 그들은 그렇게 주장했다.
그러자 굳이 뇌와 똑같이 작동하는 기계를 만들 필요가 없어졌다. 둘 다 하는 일이 논리 계산이라면 현재 가지고 있는 컴퓨터로 뇌를 시뮬레이션하면 그만이었다. 사람은 정해진 문법 규칙을 이용해 단어를 조합하고 문장을 만들어 말을 한다. 체스를 둘 때도 규칙에 따라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따져 보고 말을 어떻게 움직일지 결정한다. 규칙을 컴퓨터 알고리즘으로 만들면 이런 기능을 흉내 낼 수 있다. 미래에 컴퓨터가 더욱 발달하고 정교해지면 사람처럼 의식을 지닐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도 당연했다.
영국의 수학자이자 컴퓨터과학의 선구자 튜링은 1950년, 사람처럼 의식을 가진 컴퓨터를 구별해 내는 방법으로 ‘튜링 테스트’를 제안하기도 했다. 튜링 테스트는 사람이 상대가 컴퓨터인지 사람인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대화를 나누는 방식이다. 그 결과 컴퓨터가 사람과 구분할 수 없는 수준의 반응을 보인다면 그 컴퓨터는 사람처럼 생각할 수 있다고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튜링 테스트에 따르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 사람 같으면 된다.
1950~1970년대에는 인공지능 연구가 활발했다. 언젠가는 튜링 테스트를 통과할 수 있다는 기대도 컸다. 상대적으로 뇌의 신경망을 모방해 인공 뇌를 만드는 연구에는 소홀했다. 그런데 성과는 별로 좋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튜링 테스트를 통과하는 데 성공한 인공지능은 전혀 없다. 때때로 사람을 속여 넘기는 경우는 있었지만, 아무도 그게 제대로 된 인공지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인공지능 연구에 대한 기대가 시들해지자 초기 컴퓨터과학자들이 관심을 뒀던 인공신경망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인공신경망은 뇌의 구조와 기능을 단순화된 형태로 구현한 모델이다. 그런데 그동안 발달한 생물학 지식은 뉴런이 인공신경망의 소자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줬다. 시냅스는 단순히 전기가 통하는지 안 통하는지가 중요한 회로 접합부와 다르며, 뉴런에서 나오는 신경전달물질과 반응의 양상도 놀라울 정도로 다양했다. 1940년대 뉴런도 논리 계산을 할 뿐이라고 주장했던 이들이 틀렸던 것이다.
“인공신경망은 뇌의 신경회로를 단순화해 공학적으로 구현한 모델로 실제 뇌와는 기능이 다릅니다. 너무 단순하고 인공적이라 실제와는 거리가 멀죠. 다만, 알고리듬 측면에서 활용할 여지는 많아서 공학에서 최적화 문제를 해결하는 데 많이 씁니다.”
포스텍 물리학과 김승환 교수는 인공신경망을 실제 뇌에 비교할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인공신경망도 이런 한계 때문에 주식 시장 예측이나 얼굴을 확인하는 등의 한정된 영역에 머물렀다. KAIST 전기 및 전자공학과 김대식 교수는 “결국은 인공지능과 인공신경망 두 접근 방식이 다 실패한 셈”이라며 “현재는 지금까지의 연구를 다 정리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분위기”라고 밝혔다.
답은 뇌밖에 없다
지금까지의 실패를 딛고 다시 시작하기 위해 택한 방법이 인공뇌다. 진짜 뇌의 회로망을 분석해 똑같이 만들겠다는 것이다. 사실 뇌는 불완전한 존재다. 속도도 느리고 기억력도 뛰어나지 않다. 툭하면 기억을 왜곡하기도 한다. 컴퓨터는 빠르고 정확해 그럴 걱정이 없다. 그럼에도 뇌를 똑같이 흉내 내야 하는 건 사람의 지능이 뇌와 뗄 수 없는 관계기 때문이다.
“초창기에 인공지능을 연구하던 과학자들은 사람이 어려워하는 문제를 컴퓨터가 풀게 했습니다. 수학과 체스죠. 그런데 쉽게 생각했던 언어 처리에서 막혀버렸습니다. 아직도 풀지 못하고 있어요. 뭐가 쉽고 뭐가 어려운 문제인지를 처음에 잘못 생각했던 겁니다.”
김대식 교수는 걷는 동작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사람은 의식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쉽게 걷는다. 그래서 걷는 게 쉽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수억 년의 진화 과정을 통해서 이미 해결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컴퓨터는 잘 못하고 뇌는 잘하는 패턴 인식도 마찬가지다. 어린아이에게 강아지 사진, 강아지 동영상, 강아지 그림을 보여주면 금방 모두 강아지라고 알아본다. 그러나 컴퓨터는 이게 어렵다. 강아지 사진과 강아지 그림을 픽셀 정보로 보면 공통점이 없기 때문이다. 규칙과 기호를 가지고 가르쳐줄 수는 있다. 그래도 겨우 강아지만 구분할 뿐 다른 동물은 여전히 구분하지 못한다.
그래서 최근에는 쉬운 문제와 어려운 문제를 다시 분류하고 있다. 사람이 느끼는 정도가 아니라 정보이론을 바탕으로 판단한다. 새로운 기준에 따르면 수학과 체스는 입력신호의 조합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쉬운 문제다. 규칙과 기호를 통해 문제를 규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컴퓨터가 잘하는 분야다. 반면에 사람이 잘하는 패턴 인식은 입력 신호가 너무 복잡해서 어려운 문제다. 규칙과 기호로 표현이 안 돼 컴퓨터로 처리하기 어렵다.
뇌는 오랜 세월에 걸쳐 어려운 문제에 맞게 진화한 하드웨어다. 따라서 우리는 쉽다고 느끼지만 사실은 어려운 문제를 풀려면 뇌와 같은 하드웨어, 즉 인공뇌를 만들어야 한다.
인공뇌를 만드는 세 가지 방법
인공뇌를 만들려면 먼저 우리 뇌에서 일어나는 일을 최대한 정확히 알아야 한다. 두개골 속, 2L가 채 안 되는 공간에 자리 잡은 뇌에는 뉴런(신경세포)이 1000억 개 정도 있다. 뉴런은 크게 세포체와 수상돌기, 축색돌기로 나뉜다. 세포체는 핵이 있는 중심 부분이다. 수상돌기는 세포체를 둘러싼 나뭇가지 모양의 구조로 신호를 받아들이는 부분이다. 축색돌기는 길게 뻗어 나온 부분으로 신호를 보낸다. 축색돌기의 끝 부분은 다른 뉴런의 수상돌기와 인접해 있다. 전기 신호가 여기에 도착하면 신경전달물질이 나오면서 화학 신호로 바뀌고 수상돌기에서 이를 받아들인다. 이 구조가 시냅스다.
뉴런 하나가 만드는 시냅스는 수천에서 1만 개에 달한다. 뉴런 하나가 신호를 보내면 최대 1만 개의 다른 뉴런이 받는다. 신호를 받은 뉴런은 또 제각기 1만 개의 다른 뉴런에 신호를 보낸다. 이 과정이 몇 번 계속되면 신호는 너무 복잡해서 분석하기 어려운 패턴이 된다. 뉴런 하나하나의 처리 속도가 컴퓨터보다 훨씬 느려도 뛰어난 성능을 발휘할 수 있는 이유다.
게다가 뉴런과 시냅스는 살아 있는 동안 끊임없이 변한다. 뉴런이 신호를 전달하는 반응 역시 놀라울 정도로 다양하다. 뉴런이 만드는 신호는 컴퓨터에서처럼 단순히 0과 1로 해석할 수 없다. 그래서 인공뇌를 만드는 건 물론 뇌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뇌를 흉내 내려 한다. 먼저 뇌세포를 배양해 뇌의 원리를 파헤치면서 뇌를 만들어보는 방법이 있다. 과학자들은 뉴런을 떼어 내 시험관에서 배양하는 방법을 쓴다. 알츠하이머나 파킨슨병과 같은 뇌질환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기술이다.
2011년 10월 일본 도쿄 대학교와 과학기술진흥기구 연구팀은 ‘극소형 화학 · 생명과학 분석시스템 국제학술회의’에서 작은 판에 뉴런 하나를 붙인 뒤 뉴런의 축색돌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자라도록 제어하는 기술을 개발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이 뉴런은 신경망을 이루는 한 단위로, 이를 조립해 원하는 구조의 신경망을 만들 수 있다. 앞으로 이 기술이 확장되면 뇌와 비슷한 구조를 만들 수도 있다.
뉴런을 배양해 뇌와 같은 기능을 하는 인공 뇌를 만드는 실험도 있다. 2011년 5월 헨리 주랑 교수가 이끄는 미국 피츠버그 대학교 연구팀은 쥐의 뇌세포를 배양해 12초 동안 기억하는 인공 뇌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쥐의 해마에서 뇌세포를 떼어 만든 것이다. 해마는 새로운 기억을 형성하거나 시간과 장소를 기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뇌의 부위다. 연구팀이 만든 고리 모양의 인공 뇌는 전기 신호를 전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꾸준히 활동하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뇌가 기억하는 현상과 비슷하다.
이들은 먼저 두께 60~70μm(마이크로미터, 100만 분의 1m)인 실리콘 웨이퍼로 고리를 만들었다. 여기에 접착용 단백질을 붙이고 배양한 뇌세포를 붙였다. 시간이 지나 뇌세포가 자라면서 스스로 신경망이 생겼다. 연구팀이 여기에 전기 자극을 주자 뉴런이 활성화됐고, 12초 동안 신경망이 활동했다. 뇌가 기억하는 현상과 비슷하다. 기존 연구에 비해 크게 향상된 수치다.
주랑 교수는 “이 인공 뇌가 작동하는 원리를 밝히면 기억이 분자나 세포 수준에서 어떻게 형성되는지 밝힐 수 있다”며 “우리는 한 뉴런이 억제되면 다른 뉴런들이 더 크게 활성화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고 밝혔다. 뉴런 한두 개만 들여다봐서는 제대로 뇌를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다. 뉴런 하나가 자극에 어떻게 반응할지 알아도 이들이 이루는 신경망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다르게 반응할 수 있다.
뉴런이 1000억 개나 들어 있는 사람 뇌와 비교하면 뉴런 40~60개로 만든 이 인공 뇌는 벌레 수준에도 못 미친다. 하지만 앞으로 사람 뇌에 필적하는 인공뇌를 만들 수 있다면 우리는 아주 효율적인 컴퓨터를 얻을 수 있다. 슈퍼컴퓨터를 능가하는 능력을 지녔으면서도 밥 한 끼만 먹이면 온종일 일하고도 남는 컴퓨터. 자연이 만든 이 컴퓨터를 이해하고 따라잡기 위해 과학자들은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슈퍼컴퓨터 안의 뇌
어떤 과학자들은 뇌를 실제로 만들기보다는 슈퍼컴퓨터의 막강한 계산 능력을 이용해 뇌를 시뮬레이션하려고 한다. 슈퍼컴퓨터 안에 가상의 뇌를 만드는 것이다. 미국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이 추진하는 ‘시냅스(SyNAPSE)’ 계획은 지능을 갖춘 컴퓨터를 만드는 게 목적이다. 이를 위해, IBM의 다멘드라 모다 박사가 이끄는 연구팀은 1단계에서 뇌의 원리를 모방한 칩을 개발했다. 그 과정에서 슈퍼컴퓨터로 뇌를 시뮬레이션했다.
이들이 이용한 슈퍼컴퓨터는 IBM의 ‘블루진’으로, 14만 개 이상의 CPU와 144TB의 메모리를 갖췄다. 2009년 IBM은 뇌를 시뮬레이션한 모델 두 가지를 발표했다. 하나는 뉴런 16억 개와 시냅스 8조 8000억 개 규모이며, 다른 하나는 뉴런 9억 개와 시냅스 9조 개 규모다. 고양이의 대뇌 피질과 맞먹는다.
그러나 이 결과를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 인공뇌를 연구하는 또 다른 과학자인 스위스 로잔공대 뇌정신연구소 헨리 마크람 소장이다. 마크람 박사는 IBM의 발표 직후 공개서한을 통해 “모다 박사의 발표는 사기”라고 주장했다. 그는 “모다 박사가 시뮬레이션한 뉴런은 이온채널과 같은 세부 사항이 빠져 있는 가장 단순한 모형이며 슈퍼컴퓨터만 있다면 전혀 어렵지 않은 작업”이라고 썼다. 또한, 모다 박사가 언급한 뇌 역공학(뇌의 구조를 분석해 원리를 발견하는 과정)의 증거가 전혀 없다며 뇌 분석 자료를 어디서 얻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고도 지적했다.
이에 대해 IBM은 “모다 박사의 연구가 뇌의 인지 능력을 모델로 삼아 오늘날의 슈퍼컴퓨터보다 훨씬 효율적인 컴퓨터를 만들 가능성을 제시했으며 과학계에서도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 냈다”고 반박했다.
이 논란은 라이벌 과학자가 경쟁 연구에 대해 가한 비판이라는 점에서 더욱 흥미롭다. 마크람 박사는 슈퍼컴퓨터로 사람의 뇌를 만드는 게 목적인 ‘블루 브레인 프로젝트’의 책임자다. 재미있게도 블루 브레인도 IBM의 블루진 슈퍼컴퓨터를 이용한다. 마크람 박사는 사람의 뇌를 세포 하나씩 만들어나가는 방법으로 슈퍼컴퓨터 안에 인공뇌를 가상으로 구현할 계획이다.
연구를 시작한 2005년에는 가장 기본이 되는 뉴런 하나를 만들었다. 수상돌기에서 신호를 받아 전달하는 기능을 하는 뉴런 하나는 비교적 프로그램으로 구현하기 쉽다. 그러나 뉴런의 개수가 늘어나면 급격히 복잡해진다. 연구팀은 같은 해 뉴런을 하나 더 추가한 뒤 뉴런 2개가 신호를 주고받는 과정까지 마쳤다.
2008년에는 뉴런 1만 개로 이뤄진 쥐의 대뇌 신피질 한 부분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실제 뇌에서 사고 활동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다. 2011년에는 이런 부분 100개에 해당하는 뉴런 100만 개로 이뤄진 회로를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 2014년에는 뉴런을 1억 개까지 늘려 쥐의 뇌 전체를 시뮬레이션할 계획이다.
연구팀은 2011년부터 본격적으로 사람의 뇌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사람의 뇌는 뉴런이 1000억 개로 쥐의 1000배 수준이다. 2023년까지 사람 뇌를 시뮬레이션하는 게 최종 목표다. 마크람 교수는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휴먼 브레인 프로젝트’를 만들었다. 완전한 뇌를 만들어 신경과학, 의학, 인지과학, 뇌 인터페이스 같은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겠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세계 최고의 슈퍼컴퓨터인 일본 이화학연구소의 K컴퓨터의 주요 용도 중 하나도 뇌 시뮬레이션이다. 가장 빠른 속도를 이용해 현재 알고 있는 뇌에 대한 지식을 총동원하겠다는 것이다. 일본 이화학연구소 연구팀은 2011년 기존의 해부학과 전자생리학 연구 자료를 바탕으로 시각피질 회로를 본떠 만든 연구 결과를 논문으로 발표했다.
슈퍼컴퓨터 안에 가상의 뇌, 즉 인공 뇌를 만들면 여러 가지 응용이 가능해진다. 마크람 박사는 “새로운 신경전달 물질이나 의약품이 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동물을 희생시키지 않고도 연구할 수 있고, 뛰어난 인공지능도 개발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금속으로 만든 뇌
미국의 SF작가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시리즈를 보면 ‘양전자 뇌’가 등장한다. 설정에 따르면 양전자 뇌는 백금과 이리듐, 양전자(전자의 반물질)로 만든 인공뇌다. 소설 속의 양전자 뇌처럼 아예 새로운 하드웨어로 인공뇌를 만드는 계획을 추진하는 과학자도 있다. 강력한 슈퍼컴퓨터로 뇌를 시뮬레이션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에너지 효율은 아주 떨어지기 때문이다. 고작 20W로 충분히 돌아가는 뇌를 만드는 데 엄청난 전력을 먹는 슈퍼컴퓨터를 쓴다면 낭비가 아닌가.
그 중 하나가 영국 맨체스터 대학교 컴퓨터공학과 스티브 퍼버 교수가 이끄는 ‘스핀네이커(SpiNNaker)’ 계획이다. 사람 뇌의 1% 정도인 10억 개의 뉴런을 시뮬레이션할 수 있는 하드웨어를 만드는 게 목표다. 퍼버 교수는 영국 ARM사가 만든 CPU인 ARM9을 이용한다. 휴대전화에 널리 쓰이던 200MHz짜리 CPU로 크기가 작고, 전력 소모가 적다.
ARM9칩 18개가 모여 스핀네이커 칩 하나를 이루며, 이 칩을 대량으로 병렬 연결해 인공 뇌를 만든다. 각 칩은 뉴런 약 2만 개를 시뮬레이션한다. 그 사이를 오가는 ‘패킷(디지털 정보)’은 뉴런이 보내는 신호를 나타내는데, 여기에는 어느 뉴런에서 나왔는지를 알려주는 정보가 들어 있다. 슈퍼컴퓨터보다 느리지만, 에너지 소모가 적고 병렬로 연결해 효율적이다.
스핀네이커가 뇌의 구조를 그대로 따라 하는 건 아니다. 실제 뉴런의 구조는 3차원인데, 스핀네이커 칩은 2차원 구조다. 원래대로라면 2차원 구조가 3차원 구조보다 느리지만, 반도체는 뉴런보다 전달 속도가 빨라 3차원 구조처럼 작동할 수 있다. 퍼버 교수는 “우리는 아직 뇌가 어떻게 정보를 처리하는지 확실히 알지 못한다”며 “스핀네이커가 이를 이해하는 데 큰 진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스핀네이커는 뇌를 그대로 흉내 냈다기보다는 뇌의 작동을 효율적으로 시뮬레이션하기 위해 특별히 고안한 하드웨어다. 반면, 앞서 소개한 ‘시냅스’ 계획은 뇌와 같은 원리로 작동하고 학습할 수 있는 컴퓨터 칩을 개발하는 게 목적이다. IBM 연구팀은 슈퍼컴퓨터로 뇌의 피질을 시뮬레이션한 뒤 비슷한 원리로 작동하는 칩 두 개를 개발해 2011년 8월에 발표했다.
이 칩에는 뉴런과 시냅스 역할을 하는 회로가 들어 있다. 재료는 컴퓨터에 들어가는 칩과 같지만, 뇌와 같은 방식으로 정보를 처리할 수 있도록 배열한 것이다. 이들이 만든 칩은 두 가지로 뉴런이 256개지만, 시냅스의 종류는 다르다. 하나는 프로그램 가능한 시냅스가 26만 2144개 있고, 다른 하나는 학습용 시냅스가 6만 5536개 있다. 학습용 시냅스는 말 그대로 학습을 가능하게 한다.
인공뇌를 만드는 데 중요한 요소는 뇌가 경험을 통해 배우는 방법을 흉내 내는 일이다. 실제 뉴런은 살아 있는 동안 연결 상태가 변한다. 자주 활성화되는 시냅스는 연결이 강해지고, 안 쓰다 보면 연결이 약해지기도 한다. 우리 뇌가 학습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금속이나 반도체로 인공뇌를 만들면 회로를 마음대로 바꿀 수 없어서 이런 기능을 흉내 낼 수 없다.
IBM은 어떤 방법으로 이를 구현했는지 공개하지 않았다. 하지만 IBM의 발표 직후 영국 BBC는 런던 대학교 인지과학과 리차드 쿠퍼 교수의 말을 인용해 정보의 중요성에 따라 주의를 기울이는 정도를 다르게 하는 방식을 썼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연결을 강하게 만들거나 약하게 만드는 대신 신호가 오갈 때마다 중요성을 기억해 두는 방법이다. 그러면 중요한 신호는 강조하고 그렇지 않은 신호는 무시해 학습할 수 있다.
유럽에도 비슷한 계획이 있다. 10개국의 15개 기관이 참여하는 ‘브레인스케일스’ 계획이다. 먼저 생체 실험으로 뇌를 연구하고, 슈퍼컴퓨터로 시뮬레이션한 뒤, 뇌와 같은 원리로 작동하는 하드웨어를 만드는 3단계로 진행된다. 이 과정에서 블루 브레인 프로젝트와도 긴밀하게 협력할 계획이다. 브레인스케일스의 하드웨어는 지름이 20cm인 실리콘 웨이퍼로 만든다. 각 웨이퍼에는 뉴런 512개에 해당하는 칩이 384개씩 들어간다. 웨이퍼 하나에 2만 개 정도의 뉴런이 들어 있는 셈이다. 브레인스케일스는 2012년 1월 처음으로 완성된 웨이퍼에서 신경 신호를 관찰하는 데 성공했다.
인공뇌 속에서 누리는 영원한 삶
뇌처럼 작동, 혹은 생각(?)하는 인공뇌는 현대 사회에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데이터를 처리하는 데 쓸 수 있다. 현재 쓰는 컴퓨터는 단순 계산에는 능하지만 방대한 데이터를 처리하기에는 비효율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공뇌가 컴퓨터를 완전히 대체하지는 않을 전망이다. 사람이 컴퓨터보다 산수를 못하듯이 인공뇌도 산수에는 젬병일 것이다. 빠른 계산이 필요한 분야에는 컴퓨터가, 패턴 인식처럼 사람이 잘하는 분야에서는 인공뇌가 활약하는 식으로 서로 보완할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인공뇌가 완성된다면 그 능력은 사람의 뇌보다 뛰어날지도 모른다. 반도체 소자는 뉴런보다 처리 속도가 100만 배 이상 빠르다. 반도체로 생각할 수 있는 인공뇌를 만든다면 뇌보다 100만 배 이상 빠른 속도로 생각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만큼 지식을 쌓는 속도도 빠르다. 사람이 평생 걸려도 다 못 배우는 양을 순식간에 해치울 수 있다.
기억력도 그렇다. 인공뇌의 기억 용량을 크게 설계하면 사람보다 더 많은 정보를 기억하고 더 빨리 처리할 수 있다. 학습과 훈련이 다 끝난 상태의 인공뇌를 복제할 수 있다면 뛰어난 지적 능력을 지닌 존재를 짧은 시간 안에 무수히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소리다. 그런 수준에 이른다면 사람은 인공뇌를 어떻게 활용할까. 사람의 육체노동을 대신하는 로봇과 다르게 정신노동을 대신하게 할지도 모른다. 물론 인공뇌가 순순히 말을 듣는다는 가정 아래서지만.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은 저서 『특이점이 온다』에서 앞으로 사람의 뇌를 스캔해 기계에 업로드하는 세상이 온다고 예측했다. 뇌 속에 나노로봇을 넣어 뉴런의 상태와 활동을 낱낱이 기록한 뒤 슈퍼컴퓨터에 전송해 시뮬레이션한다는 생각이다. 인공뇌가 완성된다면 한 사람의 뇌 정보를 인공뇌에 고스란히 전송할 수도 있을 것이다. 소프트웨어 상태로 영원불멸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어떤 미래가 올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하지만 사람의 지능과 뇌의 비밀이 모두 풀리고 인공뇌가 완성된다면, 인류 문명의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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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의 성과와 중요성을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는 우리나라 대표 과학매체의 편집장들과 과학전문기자, 과학칼럼니스트, 연구자들이 모여 집필하였다. 진화론 논쟁부터 애니..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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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인공뇌 – 꼭 알아야 할 과학이슈 2, 강석기 외, 과학동아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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