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마이크로인문
학2-죽음
지속의...

두렵지 않게 죽음을 넘어서다

우리 앞에 놓인 것은 삶일까, 죽음일까?

Self-portrait, 1872

ⓒ Arnold Böcklin | Public Domain

인용문
죽음은 살아 있는 사람의 문제이다.
죽은 사람에게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노베르트 엘리아스

더위가 극에 달하는 여름에는 납량특집 드라마나 공포영화가 여지없이 등장한다. 이들 속에는 비명횡사 같은 뜻밖의 재앙이나 사고의 위협들이 번뜩거리며 나타난다. 오늘날의 납량극은 「전설의 고향」에나 나올 법한 시골이 아니라 한낮의 강렬한 빛을 받는 대도시 한복판을 배경으로 한다. 깨질 것 같은 금속성의 음향과 긴장감을 높여 주는 ENG카메라의 급회전에 이르기까지, 가능한 모든 공포의 효과가 동원된다. 보이지 않는 죽음의 그림자를 대신하는 카메라의 추격과 피해자의 공포에 사로잡힌 얼굴은 긴 머리카락의 귀신보다 훨씬 더 오싹하다. 뒷덜미에 뭔가 달라붙는 것 같은 기분과 쭈뼛해지는 머리카락, 그리고 땀이 쥐어지는 손, 마침내 숨이 멎을 것만 같은 90분의 긴장이 물러가면 불이 켜지고 관객들은 떠밀리듯 인파에 휩쓸려 극장 밖으로 나온다.

삼십 도가 훨씬 넘는 뜨거운 여름 거리를 태양이 달구고 있다. 더위가 오히려 따뜻하게 느껴지면서 “아, 나는 살아 있다!”라는 중얼거림과 함께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면 평범했던 일상이 흘러가고 가끔씩 기분 좋은 공포가 스멀스멀 올라와 사물들로 스며든다. 집안의 문이란 문은 모두 영화 속의 불길한 소품을 대체하면서 냉장고 문과 옷장 문, 화장실 문 자체가 잠시 흠칫하게 만들기도 한다. 죽음은 누군가를 엄습하는 위협적인 것이지만 재미를 극대화시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의 중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그 이야기들은 누군가를 죽게 하고 누군가를 살게 한다. 영화 속의 죽음도 결국은 삶을 편들면서 누군가를 살려야 한다는 운명에 처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죽음으로부터 구출된 안도의 순간에 또 다른 위협의 그림자가 영화의 말미를 슬쩍 가로지른다. 속편을 예고하는 장치이다. 그렇게 죽음의 공포는 번지점프의 쾌감 중독처럼 영화의 속편을 기다리게 만든다.

이처럼 오늘날의 죽음은 영화 장난감에 담겨 볼거리로 축소되었다. 정작 도시에서 죽음은 흔하게 볼 수 없다. 묘지는 도시 밖으로 쫓겨나면서 조망 좋은 ‘추모공원’이나 죽음을 전시하는 ‘납골당 꾸미기’의 이름으로 상품화된 구경거리가 되었다. 병원은 도시의 미관에 적합하게 호텔처럼 바뀌었고 품위를 갖췄다. 아름다운 조경과 편의시설, 레스토랑과 베이커리, 그리고 플로리스트가 영업하는 꽃집과 은행이 들어섰다. 아름다움은 얼굴과 몸매에만 영향을 준 것이 아니다. 서구화된 미래지향적 도시계획에 따라 도시는 점점 더 깨끗하고 말쑥해져 갔다. 우리의 눈앞에 불쾌하고 거추장스러운 광경은 모두 사라졌다.

금지된 죽음

할머니의 장롱 속 수의와 노네날(Nonenal)이라고 하는 노년의 냄새는 할머니가 요양원에 갈 기일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 준다. 시간은 우리의 생활을 단기적이고 장기적으로 계획하게 해주었다. 할머니의 죽음도 마치 이러한 계획 속에 포함된 것 같다. 이 계획 속에 죽음을 예측해 줄 시각과 후각이 가동된다. 영화스크린의 강렬한 시각적 공포뿐만 아니라 후각에 의해서도 죽음의 그림자는 측정되며 도시의 삶에서 ‘처리’해야 할 위생문제로서 인식된다. 위생과 병원의 체계적인 발달로 질병 및 불결과 불쾌를 관리하는 질병처리본부와의 협력하에 도시가 더욱 깨끗하게 보존될 수 있게 되었다.

강화된 청결의식은 죽음을 공포나 두려움의 감정보다 먼저 불결하고 불쾌한 것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질병과 노화와 죽음의 그림자는 하나의 패키지 상품처럼 묶여 판매되어 통째로 안전시설로 팔려 갔다. 그 뒤로는 포르말린이 뿌려진다. 마치 죽음의 그림자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 같다. 개별적인 무장도 잇따라 등장하였다. 자외선과 바이러스로부터 차단한 전면마스크를 쓴 사람과 아침 등산로나 거리에서 마주치다가 주춤 물러난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이제 관리해야 할 것은 건강과 보험이다. 죽음은 피할 수 없지만, 몸은 변화 가능하다. 도시는 그런 마음을 알아주는 듯 의욕적으로 운동과 스포츠를 개발하고 홍보한다. 건강보험과 종신보험의 광고는 케이블 채널의 고정 프로그램이 되었다. 더 건강한 몸을 위해 더 많은 운동을 해야 하며 더 나은 보험 수혜를 위해 더 오래 노동을 해야 한다. 새벽에도 밤에도 사람들은 걷고 자전거를 타며 피트니스 클럽을 채운다. 그렇게 하면 사후세계의 강, 레테로 끌려가는 대신 죽음이 먼저 레테를 건너가고 말 것 같다. 다시는 죽음이 위협해 오지 못할 것만 같다. 그러니 “죽음이 멀리에서 그림자처럼 비치지 않는다면 결코 극단적인 희열을 맛볼 수 없었을 것”이라는 조르주 바타유의 말쯤은 두 눈 꾹 감고 잊어도 좋다.

그러나 두 눈 꾹 감고 잊는다 해도 인간은 죽는다. 그렇게 죽을 운명이지만 수의를 준비해 둔 할머니를 요양원에 보내면 죽음을 감출 수 있을 것만 같다. 요양원에 갈 날짜를 받아 놓은 할머니만 사망 진단을 받은 것처럼 죽음을 앞당긴 기분에 사로 잡힌다. 죽음이 찾아오기 전에 할머니는 사회적으로 죽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평생 같이 살던 자식들과 떨어져서 처음 보는 낯선 사람들에게 맡겨지는 순간, 할머니의 일상은 정상에서 비정상적인 삶으로 전환하게 된다.

요양시설의 대중화는 병중에 따른 요양원으로의 자연스러운 이동을 의미화한다. 그러나 요양원으로 이동함으로써 할머니에게 더 이상 정상적인 일상은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정상과 비정상이 섞여 비정상이 비정상으로 인식되지 않았던 옛날과 같은 일은 더 이상 없다. 점점 수족을 쓰기 어려워지는 할머니를 24시간 돌볼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24시간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갓난아이도 혼자 견뎌야 하는 시간이 있다. 이처럼 병원과 요양원, 상조회사는 살아 있는 사람 위주의 발명품이라는 것을 먼저 기억할 필요가 있다.

죽음의 업무가 금전적인 것이 됨에 따라 살아 있는 사람의 문법 속에 죽어 가는 사람이 복속된다. 장례회사를 불러 장례절차를 밟아 주는 병원과 요양시설은 비용을 지불할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해 구비된 것들이다. 그러나 정작 죽어 가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은 축소되어 버렸다. 죽어 가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 무엇이며, 죽어 가는 사람 또한 삶이 있다는 것이 간과되는 것이다. 결국 죽어 가는 사람이 이해 받지 못하고 홀로 고립된다는 점에서 현대가 죽음을 대처하는 방식은 상당히 실패하였다. 앞으로는 비용 처리되는 요양시설이 점점 다양해질 것이고,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한 더 많은 조건과 편리를 보장하면서 높은 비용이 요구될 것이다.

죽음마저 현대 소비사회의 주요 상품이 되면서 더 많은 시간의 노동이 살아 있는 사람에게 요구된다. 살아 있는 사람이 중요해진 것은 바로 지불능력 때문이다. 지불능력이 없는 죽어가는 사람은 자신이 집에 머물 것인지, 병원에 머물 것인지, 요양원으로 갈 것인지 선택권이 없다. 이렇게 죽음은 삶의 뒤편으로 내몰리게 되고, 막상 도시 뒤편에서 내가 그 죽음을 홀로 맞이해야 할 때가 되어서야 죽음은 무겁고 힘든 것이 된다. 누구의 죽음이 아닌, 바로 나의 죽음일 때 죽음은 나를 고뇌에 차게 만드는 것이다.

핵가족 위주의 생활과 젊은 사람들의 도시이동은 노인과 친인척과의 분리를 가속화시켜 죽음을 경험할 기회를 빼앗아 갔다. 또한 수명이 연장되어 삶이 길어진 만큼 죽음 또한 연기된 이유도 있다. 질병 예방과 치료의 의학기술은 수명 연장과 동시에 죽음을 배후로 밀어내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안락사와 의료윤리문제와 같은 죽음의 윤리문제 또한 한때 크게 공론화되기도 했으나, 불편한 주제라는 거부감을 일으키면서 대학과 병원의 학술회의장으로 옮겨 갔다.

삶의 법칙

오랜 세월 동안 모든 학문분야에서 매달려 왔지만 죽음이 무엇인지, 알아내지도, 막을 수도 없었다. 죽음 관련 서적은 수적으로 꾸준히 증가하였지만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점점 더 줄어들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문제에 대해 각 분야의 서적들이 최적의 방향을 제시하려고 했지만 사람들은 정작 죽음보다 죽음을 연기해 줄 의학기술과 미용술, 의약품에 더 많은 관심과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평균 40세였던 수명이 이제는 100세를 바라보는 시대가 된 것이다. 수명을 늘리는 기술뿐만 아니라 최대한 젊고 아름답게 유지하는 것이 미덕인 사회가 되었다. 그것이 삶의 의미이며, 다이어트와 스포츠 서적, 그리고 댄스 DVD가 그러한 삶을 밝게 비춰 주는 것만 같다. 긴 역사 동안 인간은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싶어 모든 것을 발명해 내면서 동물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잊으려 했다. 인간이 국가와 도시, 그리고 자연을 발명한 것은 분명 위대한 업적이지만, 내 개인에 대한 영향은 간접적일 수밖에 없다. 죽음을 ‘무’(無)가 아니라고 여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현재를 영원한 젊음과 건강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젊고 아름다움만 출렁거리는 도시의 대형전광판에는 역설적으로 전쟁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 기아로 죽어 가는 사람들이 정치·도덕적 홍보물로 등장한다. 그러나 세계 곳곳이 전쟁과 기아로 죽음을 공포 속에 맞고 있다는 사진들의 효과란 기껏해야 바르트(Roland Barthes)의 표현처럼 “길들이기에 가까운 평균 감정” 정도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비슷한 표정과 눈빛의 얼굴들은 보는 사람을 길들여 놓았기 때문에 인간적 흥미 외에 흥분되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그 얼굴들은 전쟁을 통해 발생된 ‘불가피한’ 상황의 산물이자 멀리 동떨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불가피한’의 죽음이란 그들끼리 싸우면서 발생된 것이다. 자기 것을 놓고 타인과의 경계를 나누면서 발생시킨 위선적인 이중성이 타인의 죽음을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그렇게 분리된 타인의 얼굴은 거리에서 스치는 평범한 ‘에브리맨’(everyman)의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개별적인 정서관계의 격렬함을 일으키지 못한다. 나와 타인 사이에는,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해도 육체라는 개별성에 의해 가로놓인 심연이 있다. 정서적 관계를 맺고 있다 하더라도 나는 그렇게 단자(單子)로 구성이 되어 있기 때문에 독립된 자아로 여겨지고 삶의 의미조차 독립된 개체로서 파악된다.

그런데 독립된 개체로서 파악할 수 있는 삶이란 것은 없다. 타인과 분명하게 나눠진 육체의 개별성과 달리, 외부 세계는 나에게 들러붙어 있어서 타인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나 자체로서의 순수한 의미를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단일하다는 의미의 단수성(單數性)을 보유하지만 내가, 나의 사고와 나의 머리스타일이, 옷차림이 순수한 나의 취향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나는 이미 존재하는 외부 세계 속에 타인이 의미화한 것을 내 안에 내재화시켰기 때문에 나에게 의미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 생성된다.

가치라는 것도 내게서 순수하게 주조된 것이 아니며, 나의 창작도 외부에 존재하는 세계와의 긴밀한 접촉 속에 내가 주워 올린 것들이다. 이러한 긴밀한 관계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일만은 홀로 감당해야 하는 사적이고 독립적인 것이 되었다. 과거처럼 임종 시에 가족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는 것이 아니라 신속한 의사의 진단에 따라 환자나 노인 본인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병원이나 요양시설에 가서 먼저 죽음을 기다려야 한다. 그 기다림은 홀로 이루어진다. 비용 처리를 담당할 살아 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모든 일이 행해져야 하는 것이 삶의 법칙이 되어 버린 것이다.

죽음을 넘어서

오늘날에는 죽음이 개인적인 사건이 되어 버렸지만, 한때는 죽음을 마음대로 다루고 싶었던 것 같다. 정치적 권력을 위해 사용되기도 하였고 사회적 이데올로기로 도구화되기도 하였다. 예술과 문학에서는 죽음이 미화되거나 신비화되었다. 죽음의 의미는 그렇게 살아 있는 사람에 의해 변화해 왔고 현재에도 변화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죽음이 무의미해지면 삶 또한 무자비하고 황폐하게 바뀔 것이라는 사실이다. 사전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죽음은 삶의 대립이 아니다. 죽음은 삶에 대한 사유를 가능하게 한다. 인간이 동물과 달리 수치심을 느낄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은 죽음의 그림자를 미리 쫓아 버리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죽음을 삶의 대척점으로 놓으면서 삶을 가장 강렬한 것으로 바꿔 놓는 것에 있다. 생명을 보존하고 본능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에만 삶의 목적을 둘 것인지, 죽음을 의식하고 죽음의 한계상황을 뛰어넘는 내적 삶에 몰두하여 실존적인 자기 의식을 충실화할 것인지는 인간이 선택해야 할 존재양식이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 모두가 죽는다는 사실 때문에 가장 보편적인 사건이지만 개인에게는 절대적이고 유일한 사건이다. 유일한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죽음은 직접 경험해서 느낄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러나 자신이 언젠가는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불확실하기는 하지만 언젠가는 자기에게 일어날 죽음을 예감한다. 그리고 먼저 죽어 가는 타인을 통해,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를 통한 경험에서 죽음을 예측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보다 먼저 죽기도 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보다 먼저 죽기도 한다. 보편적으로는 조부모님, 부모님의 순으로 돌아가실 것이고, 내가 자식보다 먼저 죽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궁극적으로는 모두 각자의 죽음과 마주해야 할 테지만, 태어난 순서에 따라 보편적으로 죽음이 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동생이, 자식이 나보다 먼저 죽을 수도 있다. 따라서 죽음은 예감을 비켜서는 급작스러운 사건이다.

그러나 보통은 이러한 사실을 잊고 도피하는 방식으로 살아간다. 언젠가는 죽을 것이지만 존재하는 한 죽음이 함께하지 않기 때문에 세속적인 일들에만 몰두하며 살아간다. 죽음은 생명의 종말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다. 그러나 불행으로 죽음을 의식하여 허무주의적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면서 실존적 삶의 차원으로 죽음을 경험할 것인지에 따라 삶과 죽음의 의미는 달라진다. 죽음은 단지 “실존의 자기의식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한계상황으로서의 죽음 앞에 자신의 의식이 충실화되는 것”이라는 야스퍼스(Karl Jaspers)의 말처럼, 죽음의 인식 방식에 따라 삶이 질적으로 바뀔 수 있다. 또한 죽어 가는 타인에게 죽음뿐만 아니라 삶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 가능하게 만든다. 이러한 태도가 죽음과 관련된 모든 업무를 지불능력이 있는 건강한 사람 위주로만 만들지 않을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죽음에 대한 사유를 이끌어내게 만든다. 이처럼 죽음은 살아 있는 사람의 문제이지 이미 죽은 사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최은주 집필자 소개

건국대에서 영미문학비평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몸문화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하면서 건국대와 백석대에 출강하고 있다. 어린 시절 많이 아팠던 경험 때문에 질병과 죽음에 대한 의학적·사회문화..펼쳐보기

출처

마이크로인문학2-죽음 지속의 사라짐
마이크로인문학2-죽음 지속의 사라짐 | 저자최은주 도서 소개

인간은 모두 죽는다. 죽음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지만, 개인에게는 단 한 번 찾아오는 유일한 경험이다. 『죽음, 지속의 사라짐』은 죽음이 영화나 게임 속 스펙터클과 ..펼쳐보기

전체목차
은행나무
TOP으로 이동
태그 더 보기


[Daum백과] 두렵지 않게 죽음을 넘어서다마이크로인문학2-죽음 지속의 사라짐, 최은주, 은행나무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