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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세계사 조선을 둘러싼 청나라와 일본의 패권 다툼
청일 전쟁
발생 | 189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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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 1895년 |
청나라의 근대화를 향한 움직임
두 차례에 걸친 아편 전쟁을 치른 청나라는 자신들이 서구 열강들에 비해 여러 면에서 매우 뒤처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추진하기 시작한 것이 서양의 근대 문물을 받아들여 나라의 경쟁력을 키우려는 양무운동각주1) 이다.
이 개혁은 1861년 함풍제가 죽은 뒤 신유정변(1861년에 동치제의 생모인 서태후와 공친왕 등이 숙순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정치 쿠데타)을 통해 베이징의 실권을 장악한 공친왕(함풍제의 아우)과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운 중국번, 이홍장, 좌종당 등의 한인 관료들이 중심이 되어 추진되었다.1861년 베이징에 총리아문(중국 정부에서 서양과의 업무를 관장하던 기관)을 설치하면서 시작되었다.
양무운동 초기에는 서양식으로 청나라 군대를 무장시키고, 군수 공장을 세워 서양식무기와 군수품을 만드는 등 군사력 증강에 중점을 두고 전개되었다. 그렇지만 1870년대 이후에는 광공업이나 교육 등 다른 부문까지 근대적 개혁을 확산하여 서양 상인에게 빼앗긴 경제적 이권을 되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양무운동은 기존의 정치·사회 제도와 중화사상을 바탕으로 한 전통은 그대로 두었기 때문에 많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총리아 문대신이었던 공친왕이 중앙 권력을 확실히 잡지 못한 상태에서 정치적·사회적 개혁 없이 단순한 기술만 받아들였다. 이렇게 되자 근대화된 군대는 권력자의 개인 병사가 되었고, 기업 역시 일부 관료들이 독점하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청·프 전쟁(1884년 프랑스가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얻으려고 청나라와 벌인 전쟁)의 패배로 군사 개혁을 통해 부유한 나라를 세우려던 꿈이 무너지자, 양무운동을 비판하면서 정치적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결국 권력을 쥔 서태후 세력의 탄핵을 받아 공친왕이 사임하게 되자 양무운동은 쇠퇴하고 말았다.
일본의 근대화, 메이지 유신
한편 일본은 16세기 후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통치하면서부터 대륙 진출의 야망을 가졌다. 그렇지만 임진왜란 때 조선 침략에 실패하면서 더 이상 대륙 진출을 추진하지 않았다. 17세기 초,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천하 통일을 이루고, 지금의 도쿄에 수립한 일본의 무신 정권)를 열고 적극적으로 농업 장려 정책을 추진했다. 그 결과 농업이 안정되자 수공업과 상업이 발달하였고, 상인 계층은 문화와 경제를 담당하는 중간 계급으로 사회를 이끌어가는 주역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에도 막부는 기본적으로 서양에 대해 쇄국 정책(다른 나라와의 통상과 교역을 금지함)을 추진했지만, 네덜란드 상인에게만은 제한적으로 교역을 허용하였다. 또 중국의 성리학과 양명학, 중국에서 번역된 서양 관련 서적들을 들여와 학문을 발달시켰다. 그 덕에 19세기 중엽에는 제련(광석을 용광로에 넣고 녹여서, 함유한 금속을 분리·추출하여 정제하는 일), 조선(배를 설계하여 만듦), 무기 제작 등 새로운 기술에 대한 지식을 갖춘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
1854년 미국의 강한 개방 압력을 받은 일본은 하는 수 없이 쇄국 정책을 포기하고, 시모다(일본 시즈오카 현 이즈 반도 남단에 있는 항구 도시)와 하코다테(일본 홋카이도에 있는 도시)를 개항하였다. 1858년에는 일본 최초의 불평등 조약인 미·일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후 러시아·영국·프랑스와도 불평등 통상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아직 개방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에 외국 상품이 들어오자 물가가 폭등하고, 값싼 외국 공산품 때문에 일본 상품들이 살아남기 어렵게 되었다. 이에 각 번각주2) 들은 서둘러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군비(군사 시설이나 장비)를 증강하였다. 그 결과 생활이 어려워진 농민들이 폭동을 일으켰고, 하급 무사들이 중심이 되어 존왕양이 운동(일본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통상을 원하는 외부 세력을 물리치려는 운동)이 벌어졌다.
사쓰마 번(규슈 남부 지역의 가고시마 현)·조슈 번(야마구치 현)이 동맹을 맺고 막부 타도 운동을 펼쳤다. 천황의 허락도 없이 이이나오스케(에도 막부의 고위관료)가 외국과 수호 통상 조약을 맺은 것을 비난하면서 시작하여 다른 번으로도 확대시켜 나갔다. 결국에도 막부의 쇼군(막부의 수장)이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1866년 10월, 메이지 천황에게 통치권을 반납하게 되었다. 역사에서는 이를 ‘대정봉환’이라고 한다.
메이지 천황은 1867년, 수도를 교토에서 도쿄로 옮기고 부국강병을 위한 근대화 정책인 메이지 유신을 추진하였다. 그는 먼저 봉건 체제를 중앙 집권적인 입헌 군주제(군주가 헌법에서 정한 제한된 권력을 가지고 다스리는 정치 체제)로 바꾸고, 신분 제도를 없애 계급 구분이 없는 평등한 사회를 만들었다. 또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근대적 군대를 조직하고 신식 교육을 실시하였다. 토지·조세 제도를 개혁하고 근대적 공업도 육성하였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동아시아의 제국으로 발전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청나라와 일본이 모두 욕심 낸 조선
조선에서는 1863년에 고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그의 아버지 이하응이 흥선 대원군에 올라 섭정(군주를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림)을 하였다. 흥선 대원군은 세도 정치(왕실의 근친이나 신하가 나랏일을 마음대로 하는 정치)를 하던 안동 김씨를 몰아내고,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 무렵 서구 열강들은 아시아 시장 확보를 위해 조선을 향해서도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전통 체제 안에서 개혁을 원했던 흥선 대원군은 쇄국정책을 강행했다. 그로 인해 통상 수교(무역을 통해 외교 관계를 맺음)를 맺으려고 다가온 프랑스와 미국에 군사적으로 대응하여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치르게 되었다. 일시적으로는 외세의 침략을 막아낸 듯 보였다.
그렇지만 성인이 된 고종이 직접 정치를 하면서, 명성황후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자 상황은 변하기 시작했다. 이미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조선의 개항을 요구하며, 1875년에 군함 운요호를 이끌고 강화 해협에 불법으로 침입하였다. 조선 수군이 운요호와 맞서 싸웠지만 크게 패하고 말았다.
운요호 사건으로 조선의 군사력이 약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일본은 무력을 앞세워 더욱 강력하게 개항을 요구했다. 결국 조선은 1876년 에 일본과 강화도 조약(조일 수호 조약)을 맺게 되었다. 이 조약은 조선 역사상 최초로 외국과 맺은 근대적 조약으로, 부산·인천·원산 3개 항구를 개항하고, 치외 법권·해안 측량권 등을 허용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또 일본 상품에 대한 무관세를 내용으로 한 조일 통상 장정을 맺게 되었다. 뒤이어 조선은 청나라의 알선으로 미국과도 불평등한 수호 통상 조약을 맺게 되었다. 영국·독일·러시아·이탈리아·프랑스 등 서구 여러 나라와도 수교(나라와 나라 사이에 교제를 맺음)를 맺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이제 조선은 청의 양무운동과 일본의 메이지 유신의 영향을 받아 개화(새로운 사상·문물·제도 따위를 가지게 됨)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사절단(나라를 대표하여 일정한 사명을 띠고 외국에 파견되는 사람들의 무리)을 보내 청나라에서는 근대적 무기 제조법과 군사 훈련법을 배우고, 일본에서는 정부 기관과 산업 시설을 두루 살펴보게 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개화 정책은 곧 위정척사 운동각주3) 에 부딪쳐 주춤하게 되었다. 그 사이 임오군란(1882년 신식 군대인 별기군과 구식 군대의 차별 대우를 이유로 구식 군대 소속 군인들이 일으킨 폭동)이 일어나 정권은 다시 흥선 대원군에게 넘어갔다.
흥선 대원군이 다시 정권을 잡자, 청나라와 일본에서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조선으로 군대를 파견했다. 일본은 임오군란 때 공사관이 불타고 몇몇 일본인이 살해당하자, 공사관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이로써 조선에는 청나라와 일본 군대가 모두 주둔하고 있는 상황이 벌어졌다.
조선 조정에서도 친청 세력과 친일 세력이 대립하게 되었다. 결국 명성 황후를 중심으로 한 친청 세력이 더 우세해지자, 1884년에 김옥균과 박영효를 중심으로 한 개화당(19세기 중엽 이후 일본 메이지 유신을 참고로 하여 급진적인 개혁을 시도한 모임)이 갑신정변각주4) 을 일으켰다.
갑신정변으로 조선은 일본과 한성 조약(일본인 피해자에 대한 보상금과 공사관 재건비의 지급 등을 규정한 조약)을 맺게 되었다. 그리고 1885년 청나라와 일본은 톈진 조약을 맺고 조선에서 군대를 철수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조약에는 조선에 변란이나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 청나라나 일본 어느 한쪽이 군대를 보내게 되면, 그 사실을 상대방에게 미리 알리기로 한 조항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이 내용은 나중에 청일 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청일 전쟁의 시작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서는 값싼 노동력을 발판으로 국내 산업이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그렇지만 일본 국내 시장이 워낙 좁은 데다 수입까지 급증하여 심한 무역 불균형이 발생하였다. 그 결과 1890년에 경제 공황이 시작되자, 일본은 해외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조선 침략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섰다.
마침 조선에서는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 동학군이 전주를 점령하자, 정권을 쥐고 있던 명성 황후는 청나라에 지원군을 요청하였다.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 들어오자 일본도 톈진 조약을 근거로 군대를 보냈다. 이에 조선 조정은 두 나라에 동시 철수를 요구했지만, 일본은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한 나라가 국내법의 범위 안에서 다른 나라의 내정이나 외교를 지배하는 특수한 권력. 병자호란의 결과로 생긴 것임)을 부정하고 개혁을 요구하며 철수하지 않았다.
조선은 일본군이 먼저 물러나면 개혁을 추진하겠다며 그들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러자 일본은 1894년 7월 23일, 무력을 앞세워 경복궁을 점령한 뒤 흥선 대원군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김홍집을 중심으로 한 내각을 구성했다. 새 내각은 7월 27일에는 군국기무처(정치 군사에 관한 일체의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를 설치하고 내정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때 조선은 청나라와 맺은 모든 조약을 파기했을 뿐 아니라 일본에게 청나라 군대를 몰아낼 수 있는 권한을 허가하였다. 그러자 일본은 이틀 뒤 아무런 선전 포고도 없이 바로 청나라와의 전쟁에 들어갔다.
조선에서의 전투
1894년 7월 25일, 순양함(빠른 속도로 넓은 해역을 돌아다닐 수 있도록 만들어진 군함. 전함이나 항공모함보다 작음)으로 구성된 일본 해군은 아산만 부근 풍도 앞 바다에서 청나라 군함을 기습 공격했다. 신무기나 군사 훈련 등으로 철저하게 준비되어 있던 일본군에 비해, 여러 면에서 부족한 청나라군은 큰 피해를 입은 채 물러나고 말았다(풍도 해전).
풍도 해전에서의 승전 소식을 전해들은 오오시마 요시마사는 한양 부근에 있던 4천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아산만 근처까지 이동하였다. 그는 7월 28일, 천안 성환에 주둔하고 있던 청나라의 주력 부대를 공격하였다(성환 전투). 이에 맞선 청나라 군대는 소사평에서 싸울 때 잠시 이기는 듯했지만, 월봉산에서 크게 패해 결국 평양으로 후퇴하였다.
8월 1일 청나라가 공식적으로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자, 일본 천황도 청나라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청일 전쟁이 시작되었다. 청나라 군은 8월 4일 평양으로 모두 철수한 뒤, 본국에서 보내온 병력과 합류하여 전투 준비에 들어갔다. 일본도 여러 부대를 평양으로 집결시킨 뒤, 9월 15일 평양성을 총 공격하였다(평양 전투). 이 전투에서까지 패한 청나라는 의주로 후퇴하고 말았다. 그 결과 조선에 대한 일본의 내정 간섭은 더욱 심해졌다.
청나라로 진입한 일본군
1894년 9월 17일, 일본 함대는 압록강 하구에서 청나라 해군을 상대로 또 승리를 거두었다(황해 해전). 이때 일본 함대는 동아시아 최강이라는 청의 베이양 함대(1871년 이홍장이 건립한 현대화된 해군함대)를 크게 격파하여, 황해 일대의 재해권(무력으로 바다를 지배하여 군사, 통상, 항해 따위에 관하여 해상에서 가지는 권력)까지 손에 넣었다. 황해 해전에서 패한 청나라 군은 압록강 근처로 상륙했고, 베이양 함대는 뤼순 항(중국 랴오닝 성에 있는 군항 도시. 만주 남부로 들어가는 중요 항구)으로 물러났다.
병력을 보충하여 압록강을 건넌 일본군은 10월 25일, 단둥(중국 랴오닝 성 남동쪽에 있는 도시. 당나라 시절에는 안동이라 불림) 부근에 주둔해 있던 청나라 군대를 공격했다. 단둥까지 점령한 일본군이 11월 6일에 진저우 성(중국 랴오닝 성 서부에 있는 도시), 11월 7일에는 다롄(랴오닝 성에 있는 도시로, 랴오둥 반도 끝에 자리 잡은 부동항)까지 점령하였다. 일본군이 랴오둥 지역에 이르자, 다급해진 청나라 조정에서는 화의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이홍장은 이토 히로부미에게 화의를 요청했지만, 강화 조건을 유리하게 만들려는 일본은 계속 군대를 진군시켜 뤼순을 점령하였다. 뤼순 시내에 들어온 일본군은 1만 8천여 명의 시민을 학살하고, 시가지를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뤼순 대학살).
뤼순 항을 일본군에게 내어 준 청나라의 베이양 함대는 제2 기지였던 웨이하이(중국 산둥 반도 북쪽 해안에 있는 항구 도시)로 피신했다. 그러나 계속 추격해 오던 일본군과의 교전을 피할 수 없었다. 일본군은 1895년 1월 20일부터 포위를 시작하여 2월 12일 육군과 합세한 뒤 웨이하이까지 함락 시켰다(웨이하이 전투).
3월이 되자 일본군은 베이징 근처까지 밀고 들어가 수도를 위협했다. 또 일부 군대는 타이완 쪽으로 진격해 펑후 제도(중국 푸젠 성과 타이완 섬 사이의 타이완 해협에 있는 제도)에 이어 타이완(중국 대륙의 남동쪽, 푸젠 성과 타이완 해협 사이에 위치한 섬)까지 점령하였다.
시모노세키 조약과 전쟁의 영향
베이징까지 위험한 지경에 이르자, 청나라 조정은 급히 이홍장을 전권 대사로 임명하고 강화 대표단을 시모노세키(일본 혼슈 야마구치 현에 있는 도시)로 파견하였다. 결국 청나라는 일본과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였다. 1895년 4월 17일에 체결된 이 조약으로 일본은 조선에서의 청나라 종주권 파기, 랴오둥 반도·타이완·펑후 섬 할양, 쑤저우 등 4개 도시 개항, 배상금 2억 냥(3억 엔) 지불 등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강화 조약을 맺은 지 얼마 되지 않은 4월 23일, 러시아·독일·프랑스 3국이 랴오둥 반도를 청나라에 반환하라고 일본에 요구 하면서 군대를 산둥 반도 부근으로 집결시켰다. 일본은 영국·미국 등에 협력을 구했지만 거절당했다. 결국 혼자서는 3국과 싸울 힘이 없다고 판단한 일본은 어쩔 수 없이 랴오둥 반도의 반환을 결정하였다. 그 대신 반환 보상금으로 3천만 냥을 얻게 되었다.
3국의 간섭으로 일본의 조선에 대한 야욕은 잠시 중단되었지만, 일본은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것으로 일본은 군사력을 확장할 수 있는 자금으로 삼아, 동아시아의 신흥 제국으로 발전 하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한편 청나라는 3국의 간섭으로 랴오둥 반도를 되찾았지만, 서구 열강들의 정치적·경제적 이권 싸움의 각축장(서로 이기려고 다투는 곳)이 되고 말았다.
한편 조선에서는 3국 간섭으로 일본의 세력이 약화되자, 개혁을 추진하던 친일 세력인 박영효가 실각하고 명성 황후를 중심으로 친러 세력이 자리 잡게 되었다. 이에 일본은 조선에서 러시아 세력을 몰아 내기 위해서는 명성 황후를 제거해야 한다고 결정하고, 1895년 8월 20일에 명성 황후를 시해하였다(을미사변). 1896년 2월 고종은 일본의 압력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고(아관파천), 이를 계기로 조선에서는 친러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 결과 조선을 독점 하려던 일본은 1904년에 러일 전쟁까지 치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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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라는 키워드로 세계사를 풀어놓아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역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전쟁의 칼끝에서 피어난 인류의 문명! 페르시아 전쟁부터 제2차 세계 대전까지..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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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청일 전쟁 – 전쟁으로 읽는 세계사, 정미선,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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