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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토지소유권 분쟁, 정명공주 이야기 하의삼도 주민들의 300여 년에 걸친 항거정명공주에 대한 섬 주민들의 불편한 심기가 그렇게 표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명공주는 어린 시절 광해군의 폭정으로 인해 어머니 인목왕후와 함께 서궁(西宮)에 유폐된 폐서인이었다. 혼인은 고사하고 목숨까지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또 인목왕후는 의인왕후(懿仁王后)의 뒤를 이어 선조의 계비(繼妃)로 간택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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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간 (1561년)사사로운 보복행위, 와서 별제 당시 창고의 무명 73동 40필을 잃어버린 일로 물의를 빚기도 했다. 1618년 대북당의 주도로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비 및 서궁(西宮, 덕수궁)에 유폐하는 폐비 논의가 나오자 그는 판관(判官)으로 논의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그가 이서와 함께 인목대비 폐비를 반대했다는 밀고를 받고 관직...도서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