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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8. 2. 2, 영국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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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60. 8. 10,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타모니카 |
요약 영국 스코틀랜드 출신의 미국의 영화 감독.
대부분의 자료에는 로이드가 역사 드라마인 무성영화 〈정염의 미녀〉만을 가지고 1928~29년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것으로 나오지만, 사실은 〈드래그〉·〈지친 강〉을 포함해 3편의 영화로 수상했다.
로이드는 15세에 무대 연기자로 시작하여, 아버지의 뒤를 따라 뮤지컬 코미디 배우가 되었다. 1914년에는 영화 연기로 방향을 틀었으나, 이듬해 자신의 진정한 소명이 감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로이드는 무성영화 시대에 많은 각본을 직접 썼고, 영화를 제작하거나 공동제작했다. 로이드는 영화예술과학 아카데미의 창립회원이며, 영화산업의 열렬한 후원자였다. 유성영화 감독을 맡으면서부터는 스튜디오 시스템에 잘 적응했다. 그는 1933년에 두 번째로 아카데미상 감독상을 받았고, 1935년에도 후보에 올랐다.
로이드는 수십 년의 이야기를 담은 대하 가족 드라마로 두 번째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로이드가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는 사실보다 후보로 올랐던 프랭크 캐프라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벌였던 소동이 더 유명해졌다. 그날 밤 사회를 본 사람은 만담가 윌 로저스였다. 로저스는 감독상 수상을 발표하면서 수상자인 '자신의 친한 친구 프랭크'에 대해 길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로저스는 소개를 마치면서, "와서 가져가게, 프랭크"라고 말했다. 그 말에 캐프라는 얼른 연단으로 달려나갔다. 그러나 로저스가 "수상자는 프랭크 로이드"라고 덧붙이는 바람에 캐프라는 통로에서 발을 멈추고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왔는데, 그는 그것이 "역사상 가장 긴 포복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캐프라는 오래 지나지 않아 시상식 무대에 설 수 있었다. 다음해인 1934년에 감독상을 받은 것이다. 로이드 역시 〈바운티호의 반란 Mutiny on the Bounty〉으로 다시 감독상 후보에 오르는 영광을 차지했다. 로이드는 40년 동안 감독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장르의 영화 100여 편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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