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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619(광해군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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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659(효종 10) |
국적 | 조선, 한국 |
종교 | 유교(성리학) |
재위 | 1649년∼1659년 |
시호 | 효종흠천달도광의홍렬선문장무신성현인명의정덕대왕(孝宗欽天達道光毅弘烈宣文章武神聖顯仁明義正德大王) |
능묘 | 영릉(寧陵) |
요약 조선 제 17대 왕이자 인조의 둘째 아들이며 이름은 호, 자는 정연, 호는 죽오. 병자호란 패배 후 볼모로 청나라 선양에서 8년을 머물다 형인 소현세자가 죽자 돌아와 세자가 되어 1649년 즉위했다. 청에 대한 원한이 깊어 반청 서인세력을 중용하면서 북벌계획을 추진하면서 군비를 강화했다. 또한 경제기반을 강화하면서 조세제도를 개혁, 대동법을 3남지방으로 확대했고, 농업생산을 장려하는 정책을 폈다. 즉위 10년만에 요절하면서 북벌의 뜻을 실행하지는 못했다.
개요
북벌계획을 강력히 추진하여 군제를 개혁하고 군비를 강화했으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붕괴위기에 처한 경제의 재건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름은 호(淏). 자는 정연(靜淵), 호는 죽오(竹梧).
즉위
인조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인열왕후(仁烈王后)이다.
비(妃)는 우의정 장유(張維)의 딸 인선왕후(仁宣王后)이다. 1626년(인조 4) 봉림대군(鳳林大君)에 봉해졌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의 명으로 아우 인평대군(麟坪大君)을 비롯한 왕족을 거느리고 강화도로 옮겨 장기 항전을 꾀했으나, 남한산성에 고립되었던 인조가 이듬해 청나라에 항복함에 따라 형 소현세자(昭顯世子) 및 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 등 강경 주전론자(主戰論者)들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선양[瀋陽]에 8년 동안 머물렀다.
1645년 2월에 먼저 귀국했던 소현세자가 그해 4월 갑자기 죽자 5월에 청나라로부터 돌아왔다. 당시 대다수의 중신들은 원손의 세자 책봉을 주장했으나 국유장군론(國有長君論)을 내세운 인조의 강한 의지에 따라 윤6월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1649년 5월 인조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북벌계획
청나라에 당한 치욕을 씻고자 북벌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던 효종은 즉위 후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김자점(金自點) 등 친청파(親淸派)를 조정에서 몰아내고 김상헌(金尙憲)·김집(金集)·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 서인계 대청(對淸) 강경파를 중용하여 북벌계획을 추진했다.
이들은 청을 군사적으로 응징하는 것은 군부국(君父國)인 명에 대한 신자국(臣子國)의 당연한 의무라는 복수설치(復讐雪恥)의 논리로 효종의 북벌을 이념적으로 지원했다. 아울러 이러한 북벌론은 양란 이후 체제붕괴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지배층의 내실자강책(內實自强策), 즉 '국가재조'(國家再造)라고 하는 대내적인 지배안정책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궁지에 몰린 김자점 등의 친청세력이 역관(譯官) 이형장(李馨長)을 통해 일련의 북벌계획을 청나라에 알려 청의 간섭을 유도함에 따라 즉위 초기에는 적극적인 군사계획을 펼 수 없었다.
1651년(효종 2) 조선에 대하여 강경책을 펴던 청나라의 섭정왕 도르곤[多爾袞]의 죽음은 북벌계획을 추진시켜나가는 데 좋은 계기가 되었다. 이에 친청파에 대한 사림세력의 대대적인 공세가 시작되고 그해 12월에는 조귀인옥사(趙貴人獄事)를 계기로 김자점 등의 친청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단행되었다.
이후 본격적인 군비강화가 추진되기 시작했는데 효종은 이완(李浣)·유혁연(柳赫然) 등 무신을 특채하여 군사양성의 실제 임무를 맡겼다. 이러한 군인사정책은 이전에 훈신·종척(宗戚) 등을 임명하던 예와는 다른 파격적인 것으로 효종의 북벌 군사강화책 중 가장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1652년 북벌의 선봉부대인 어영청(御營廳)을 대대적으로 개편·강화했으며, 금군(禁軍)의 기병으로의 전환, 모든 금군의 내삼청(內三廳) 통합, 수어청(守御廳)의 재강화 등 제반 군제개혁을 통해 군사강화책을 모색했다.
이와 함께 금군의 군액을 1,000, 어영군을 2만, 훈련도감군을 1만으로 증액시키고자 했다. 어영군은 많은 군사를 확보하고 3명의 보인제(保人制)를 통하여 재정적인 난점을 극복함으로써 군사 증강에 성공했으나, 훈련도감은 재정이 뒷받침되지 못하여 실패했다.
한편 1654년 3월 유명무실했던 영장제(營將制)를 강화, 각 지방에 영장을 파견하여 직접 속오군(束伍軍)을 지휘하게 함으로써 지방 군사력의 약화를 시정하는 한편, 1656년에는 남방지대 속오군에 보인(保人)을 지급하여 훈련에 전념하도록 했다.
1655년에는 능마아청(能兒廳)을 설치하여 무장들에게 군사학을 강의하기도 했으며, 평야전에 유리한 장병검(長柄劍)의 제작, 표류해온 네덜란드인 하멜을 통해 조총 제작 등 무기의 개량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러한 군비강화에도 불구하고 국제정세가 호전되지 않은 데다가 효종도 일찍 죽어 북벌을 실천으로 옮기지는 못했으며 다만 청의 요청에 따른 2차례의 나선(羅禪 : 러시아) 정벌에서 군비강화의 성과가 나타났다.
사회경제정책
효종은 경제재건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조선사회는 여러 차례에 걸친 전란으로 진전(陳田)이 증가하고 농업생산력이 급격히 감소하는 한편, 농민들은 파산하여 유리(流離)하는 등 국가체제를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경제질서·사회질서가 붕괴 위기에 놓여 있었다. 효종은 이러한 위기를 부세제도의 개혁, 농업생산력의 증대, 사회윤리의 강화로 극복하려고 했다. 우선 김육(金堉)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대동법(大同法)의 실시지역을 확대해 1652년에는 충청도, 1653년에는 전라도 산군(山郡) 지역, 1657년에는 전라도 연해안 각 고을에서 대동법을 실시했다.
이와 함께 전세(田稅)도 1결(結)당 4두(斗)로 고정하여 백성의 부담을 크게 경감시켰다. 한편 1655년에는 신속(申洬)이 편찬한 〈농가집성 農家集成〉을 간행·보급하여 농업생산에 이용하도록 했다. 한때 군비확충에 필요한 동철(銅鐵)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동전의 유통에 반대하기도 했으나 김육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유통시키도록 했다.
1656년에는 소혜왕후(昭惠王后)가 편찬한 〈내훈 內訓〉과 김정국(金正國)이 지은 〈경민편 警民編〉을 간행·보급하여 전란으로 흐트러진 사회윤리의 재정립을 시도하기도 했다.
문화면에서는 1653년 역법(曆法)을 개정, 24절기의 시각과 1일간의 시간을 계산하여 제작한 시헌력(時憲曆)을 사용하게 했다. 1654년 〈인조실록〉을, 이듬해 〈국조보감 國朝寶鑑〉을 편찬·간행했으며, 1657년에는 〈선조실록〉을 〈선조수정실록〉으로 개편·간행했다.
죽은 뒤 선문장무신성현인대왕(宣文章武神聖顯仁大王)의 존호(尊號)가 올려지고 묘호(廟號)를 효종이라 했다. 능은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에 있는 영릉(寧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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