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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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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499 |
국적 | 중국, 북위(北魏) |
요약
한(BC 206~AD 220)의 멸망부터 수(581~618)의 재통일 이전까지 약 360년 동안의 혼란기 가운데 화베이를 통치했다. 부족민의 중국화를 장려해 북위를 중국식 왕조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토지개혁을 단행해 중국 토지제도의 기초를 마련했다.
471년 제위에 올라 원이라는 중국식 성을 사용하고, 수도를 후한(25~220)의 수도였던 뤄양으로 옮겼다. 조정에서 중국어를 사용했고, 귀족들에게 중국식 복장과 성을 사용하도록 하는 등 탁발씨 부족의 중국화에 노력했다. 485년 균전제를 도입하여 농민들이 호족에게 땅을 싸게 팔아버리는 일이 줄어들었다. 이 제도로 한나라 멸망의 원인이 되었던 토지제도상의 모순을 개혁하고 수·당(618~907) 제국 건설의 재정적 기초를 마련했다. 그러나 그의 개혁정책은 곧 일부의 불만을 일으켰고 북족 출신 군인들의 반란을 불렀다.
이름은 탁발굉·원굉(元宏). 묘호는 고조. 한(漢 : BC 206~AD 220)의 멸망부터 수(隋 : 581~618)의 재통일 이전까지 약 360년 동안의 혼란기 가운데 화베이[華北]을 통치했다. 부족민의 중국화를 장려해 북위를 중국식 왕조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토지개혁을 단행해 중국 토지제도의 기초를 마련했다.
471년 제위에 올라 원(元)이라는 중국식 성을 사용하고, 수도를 후한(後漢 : 25~220)의 수도였던 뤄양[洛陽]으로 옮겼다.
조정에서 중국어를 사용했고, 귀족들에게 중국식 복장과 성을 사용하도록 하는 등 탁발씨 부족의 중국화에 노력했다. 485년 균전제를 도입했다. 이 제도에 따라 각 농가는 140무, 즉 7.7㏊의 토지를 지급받았는데 그중 상속이 가능한 상전(桑田)을 제외한 대부분은 본인이 죽거나 70세가 되면 국가에서 환수했다. 이 제도를 시행하기 위해 효문제는 3장제(三長制)라는 상호 감시체제를 동시에 실시했다. 5가(家)를 하나의 린(隣), 5린을 하나의 이, 5리를 하나의 당(黨)으로 하여 각각 린장(隣長)·이장·당장(黨長)을 두었다.
이 제도에 의해 농민들이 호족에게 땅을 싸게 팔아버리는 일이 줄어들었다. 이렇게 하여 한나라 멸망의 원인이 되었던 토지제도상의 모순을 개혁하고 수·당(618~907) 제국 건설의 재정적 기초를 마련했다. 그러나 효문제의 개혁은 곧 일부의 불만을 사게 되었고 북족(北族) 출신의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상서성(尙書省)을 점거하는 일이 발생했다. 북위는 효문제 사후에 36년이나 더 지속되다가 변경에 설치한 6진(鎭)에서 반란이 일어나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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