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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양반인 홍경래는 토호인 우군칙(禹君則)·김창시(金昌始)와 대규모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이희저(李禧箸) 등을 농민군 최고지휘부로 삼고, 가산군(嘉山郡) 다복동에 근거를 두면서 농민전쟁을 준비했다. 홍경래는 이들 세 사람과 함께 우선 평안도민의 정치참여배제 등 지역차별정책에 불만이 많은 몰락양반·상인·토호·이속 등을 농민군의 지도부로 포섭했다. 그리고 평안도의 주요도시에 지방조직을 결성했으며, 운산(雲山) 촉대봉(燭臺峰)의 광산노동자와 빈민·유민 등을 고용하여 하층군사로 삼아 훈련시켰다.
또한 농민전쟁에 가담한 사람들 중에는 중앙정치권에 진출하고자 하는 부유층도 있었다. 그밖에도 한성(漢城)의 중인·서얼층 및 압록강 너머 망반인(亡叛人) 등과도 연계를 맺고 거사를 모의하는 등 모든 반정부세력을 규합하고자 했다.
당초에는 거사일을 12월 20일로 잡았는데, 거사계획이 선천부사(宣川府使) 김익순(金益淳)에게 발각되자 18일로 앞당겼다. 거병 당시 다복동에 모인 병력은 1,000명이었으며, 군대는 남·북 두 진영으로 나누어졌다. 남진군은 평서대원수 홍경래가 총지휘하고, 모사에 우군칙이, 선봉장에는 홍총각(洪總角)이 임명되었다.
북진군은 부원수 김사용(金士用)의 인솔하에 의주로 진군했는데, 모사에 김창시, 선봉장에 이제초(李濟初)가 임명되었다. 이희저는 도총(都總)이 되어 남·북진군의 군량과 군수 등을 총체적으로 관할했다. 남·북으로 나누어진 반란군은 12월 18일 투쟁을 전개한 후 10일도 채 되지 않아 가산·곽산·정주·선천·태천·철산·용천·박천 등 청천강 이북지역을 거의 장악했는데, 이는 점령지역마다 향임·무임·이속 등 각 지방세력들이 내응했기 때문이다. 12월 20일 남진군은 박천을 점령한 후 영변과 안주의 공략순서를 놓고 대립하다가 홍경래가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홍경래의 요양과 전열수습을 위해 다복동으로 회군함으로써 4일간 진공을 늦추었다.
이때 관군은 전열을 정비하여 영변에서 반란군의 내응세력을 체포할 수 있었다. 남진군은 영변공략이 어려워짐에 따라 안주를 공격했으나 다시 실패했다. 이어 29일에 박천의 송림전투에서 남진군은 관군에게 대패하고 정주성으로 후퇴했으며, 북진군도 이듬해 1월 10일 곽산 사송야전투에서 관군에서 크게 패배한 것을 계기로 계속 패배하여, 같은 달 17일경에는 정주성을 제외한 반란군의 거점은 한 곳도 남지 않았다.
그후 정주성에서 식량난과 군수품의 부족 등을 견디면서 4개월이나 농성했지만, 4월 19일 관군이 성 밑으로 굴을 파고 폭약을 폭발시켜 성벽을 무너뜨린 후 성을 함락시킴으로써 5개월에 걸친 난은 진압되고 말았다. 이때 사로 잡힌 수는 2,983명이었는데, 23일에 모두 효수되었다. 주모자 우군칙·이희저는 난군에 섞여 도주하고, 홍경래는 총에 맞아 죽고, 홍총각·김이대·운언섭·양시위 등은 사로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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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홍경래의 난의 발생과 경과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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