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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동

다른 표기 언어 好童
요약 테이블
출생 미상
사망 32(대무신왕 15)
국적 고구려, 한국

요약 고구려 대무신왕의 아들. 서기 32년, 낙랑공주에게 낙랑국의 보물인 자명고와 나팔을 찢게 하여 고구려가 낙랑을 병합하는 데 공을 세웠다. 어머니는 갈사왕의 손녀로 대무신왕의 둘째 부인이었다. 낙랑국 왕 최리가 딸 낙랑공주를 아내로 삼을 것을 권해 혼인했으며, 이를 이용하여 낙랑국을 정복하는 공을 세웠다. 그러나 호동이 태자가 될 것을 두려워한 첫째 왕비의 무고에 대응하여, 부왕에 대한 효도를 위해 자결함으로써 비극적인 운명을 맞았다.

정의

고구려 대무신왕의 아들. 어머니는 갈사왕(曷思王)의 손녀로 대무신왕의 둘째 부인이었다. 낙랑공주에게 자명고를 찢게 하여 고구려가 낙랑을 병합하는 데 공을 세웠다.

출생

호동왕자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전해지고 있다. 호동왕자의 어머니는 갈사왕(曷思王)의 손녀로 대무신왕의 둘째 부인이었다. 갈사국은 서기 22년 부여왕 대소의 아우가 지금의 압록강 근처로 추정되는 지역에 세운 나라였다. 호동왕자는 용모가 미려하여 왕이 매우 총애했으므로 호동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낙랑공주와의 인연

호동왕자는 32년 4월, 지금의 함경남도 함흥 일대와 두만강 하류에 있었던 옥저(沃沮)에 놀러갔다가 낙랑왕(樂浪王) 최리(崔理)를 만났다. 최리는 호동왕자가 북쪽의 신흥강국인 고구려의 왕자임을 알아보고, 그의 딸 낙랑공주와의 혼인을 권했다. 최리는 고구려가 낙랑 정복의 욕심을 갖고 있음을 알고 있었으므로, 사돈 관계를 맺어 낙랑의 안위를 도모하려던 뜻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낙랑 정복

호동은 혼인의 약속을 하고 본국으로 돌아와, 최리의 딸인 낙랑공주에게 사람을 보내 자명고와 나팔을 파괴하도록 했다. 예로부터 낙랑에는 적병이 오면 저절로 소리를 내는 자명고와 나팔이 있어 고구려가 낙랑을 정복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호동은 낙랑공주에게 무기고에 있는 자명고와 나팔을 부수면 예로 맞을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혼인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낙랑공주는 호동의 말에 따라 북의 가죽을 찢고 나팔의 주둥이를 쪼갠 후 호동에게 알렸다.

호동은 부왕인 대무신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낙랑을 습격하도록 했다. 낙랑왕 최리는 고구려 군사들이 성 밑까지 이른 뒤에야 자명고와 나팔이 파괴된 것을 알았고, 그것이 딸인 낙랑공주의 소행임을 깨달은 뒤, 낙랑공주를 죽이고 항복했다. 이로써 낙랑국은 멸망하고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일설에는 고구려의 대무신왕이 낙랑을 정복하기 위해 혼인을 청하여 낙랑왕의 딸을 며느리로 삼았으며, 후일 며느리를 낙랑으로 돌려보내 북과 나팔을 파괴하게 했다고도 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편

대무신왕 첫째 왕비의 무고에 의한, 왕자 호동의 비극적인 죽음이 기록되어 있다.

ⓒ 국사편찬위원회 | CC BY-NC-ND

왕비의 무고와 죽음

호동은 낙랑국을 정복하는 데 큰 공을 세워 부왕인 대무신왕의 총애를 받음에 따라, 대무신왕의 첫째 왕비는 자신의 자식이 아닌 호동이 왕위를 이을 태자가 될 것을 두려워했다. 첫째 왕비는 대무신왕에게 호동이 자신에게 예를 다하지 않고 음란한 마음을 품는 것 같다고 무고했다. 대무신왕이 왕비의 무고를 반신반의하는 가운데, 호동은 자신이 결백하다고 해명할 경우, 첫째 왕비의 죄악을 드러냄이 되므로 이는 왕의 근심이 되어 효도라 할 수 없다면서 칼 위에 엎어져 자결했다. 서기 32년 11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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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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