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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992(성종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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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031(현종 22) |
국적 | 고려, 한국 |
종교 | 불교 |
재위 | 1009년~1031년 |
시호 | 대효덕위달사원문대왕(大孝德威達思元文大王) |
능묘 | 선릉(宣陵) |
요약 고려 제 8대 왕이자 태조 왕건의 손자로 이름은 순, 자는 안세. 어려서 대량원군에 봉해졌으나 천추태후가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강제로 숭교사로 보내어 승려가 되었으나 이후 강조의 정변이 일어나 뜻하지 않게 즉위하게 되었다. 재위 기간 중 두 차례 발발한 거란과의 전쟁으로 인해, 경제적 타격을 복구하고 민심을 달래기 위해 조세 정책을 정비했으며, 성종대에 중단되었던 연등회와 팔관회도 이 시기에 다시 부활했다.
고려의 제8대 왕. 재위기간 중 여러 차례 외침을 당했으나 중앙집권체제의 정비와 문물의 진흥으로 덕종·정종대의 안정기를 이룩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이름은 순(詢), 자는 안세(安世)이다. 아버지는 태조의 8번째 아들인 안종(安宗) 욱(郁)이며, 어머니는 경종의 비인 헌정왕후(獻貞王后, 孝肅太后)이다. 비는 성종의 두 딸 원정왕후(元貞王后)·원화왕후(元和王后), 김은부(金殷傅)의 딸 원성왕후(元成王后), 대종(戴宗)의 손녀 원용왕후(元容王后)이다.
12세 때 대량원군(大良院君)에 봉해졌으나 천추태후(千秋太后)가 김치양(金致陽)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고 그를 숭교사(崇敎寺)에 보내 승려로 만들었다. 이후 여러 차례 천추태후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될 뻔했다. 1009년(목종 12) 서북면순검사 강조가 목종을 폐하고 옹립하여 왕위에 올랐다. 다음해 거란이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침입하자 강조에게 30만 군대로 방어하게 했으나 강조가 패하고 개경이 점령당하는 바람에 나주로 피난갔다가 환도했다.
1012년(현종 3) 도절도사(道節度使)를 폐지하고 5도호부 75목 안무사(按撫使)를 두었으며, 1018년에는 안무사를 폐지하고 4도호부 8목 56지주군사(知州郡事) 28진장(鎭將) 20현령(縣令)을 두는 등 국왕을 정점으로 한 중앙집권체제의 정비를 서둘렀다. 같은 해 거란이 현종의 입조(入朝)를 요구하며 다시 쳐들어왔으나 강감찬(姜邯贊)이 귀주에서 거란군을 대파함으로써 민족적 위기를 모면했다.
1022년 향리의 장의 명칭을 군현에서는 호장(戶長), 향·부곡 등에서는 장(長)으로 간소화시키고, 1024년에는 개경을 확장하여 5부 35방 314리로 정했다. 또한 그동안 폐지되었던 연등회·팔관회를 부활시켰으며, 최초로 문묘종사의 선례를 만들었다. 경제정책으로는 농상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감목양마법(監牧養馬法)을 제정했으며 조세의 균등을 기하고 양창수렴법(養倉收斂法)을 실시했다.
능은 경기도 개풍에 있는 선릉(宣陵)이며, 시호는 원문(元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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