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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07. 8. 24, 잉글랜드 레스터셔 스톤턴해럴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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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791. 6. 17, 런던 |
국적 | 영국 |
요약
18세기 영국 복음주의 부흥운동의 중심인물.
결혼 전 성(姓)은 Shirley.
칼뱅주의 감리교파인 헌팅던 백작부인파를 설립했다.
패러스 가문의 2대 백작인 워싱턴 셜리의 딸로 태어났으며, 1728년 헌팅던 9대 백작인 테오필러스 헤이스팅스와 결혼한 뒤 시누이의 영향으로 감리교 신앙을 갖게 되었고, 1739년 존 웨슬리(1703~91)가 설립한 감리교 단체에 들어갔다. 1746년 남편이 죽자 복음주의 부흥운동의 '선택받은 여성'이 되었다. 귀족 부인의 권리를 이용하여 복음주의적인 성직자들을 전속 사제로 임명했고, 브라이턴·바스·턴브리지웰스 등 귀족사회 중심지에 부속 예배당을 건축했다.
그녀의 마음에 든 설교자 조지 화이트필드의 인도로 그녀의 응접실에서 예배를 보곤 했다. 북아메리카의 조지아 식민주에 있는 화이트필드의 고아원을 후원했으며, 아메리카에 있는 먼 친척인 조지 워싱턴과 그곳 인디언에 관한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뉴햄프셔 주 해노버에 다트머스대학을 설립하고 프린스턴대학교를 설립하는 일을 도왔다.
독실한 성공회 신자였으나, 성공회에 반대하는 교회들을 위해서도 설교자들을 육성하고자 했다. 1767년 신학생 6명이 '열정'(감리교에 대한 성공회의 동의어)을 가졌다고 의심받아 옥스퍼드에서 제명당하자 자비로 복음주의적인 성직자 양성을 위해 브레크녹셔 탈가스에 트레베카 하우스를 설립했다(1768).
1770년대 감리교 내에서 화이트필드파와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파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 1779년 스파필스의 지방 목사는 헌팅던의 새 예배당이 그의 권리를 침해했다고 항의했다. 교회재판소에 고소당하자 자신의 예배당들을 보존하기 위해 비국교도 집회소로 등록했으며, 이에 따라 그 예배당에서 일하던 모든 성공회 성직자들이 사임했다.
백작부인이 죽은 뒤 그녀가 세운 대학은 1792년 하트퍼드셔 체슨트로 옮겼다가 1904년 케임브리지로 다시 이전했다. 헌팅던 백작부인이 세운 교회들은 1792년 노바스코샤에서 해방된 흑인 노예들에 의해 시에라리온에 설립했다. 백작부인의 예배당들은 대부분 회중교회 형태로 운영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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