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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양천·하양·태인·함창 등 30개의 본이 있다. 우리나라 허씨는 가락국 김수로왕이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과 혼인하여 얻은 10명의 아들 중에서, 둘째 아들로 하여금 모성을 잇게 함으로써 비롯되었다고 한다. 김수로왕의 10세손인 구형이 신라에 귀부함으로써 가락국이 망하자 자손들이 여러 곳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는데 그들이 정착한 터를 관향으로 삼아 오늘날의 여러 본관이 생겼다고 한다.
김해허씨는 고려시대에 삼중대광을 지내고 가락군에 봉해진 허염을 시조로 하는 성씨이다. 양천허씨의 시조는 허선문으로 전한다. 하양허씨는 고려 때 호장 또는 호부낭장을 지낸 허강안을 시조로 삼고 있다. 태인허씨의 시조 허사문은 보주태후의 30세손이다. 함창허씨는 허안지의 아들로 조선시대에 등과하여 목사를 지낸 허종항을 시조로 삼고 있다.
양천·하양·태인·함창 등 30개의 본이 있다. 우리나라 허씨는 가락국 김수로왕(金首露王)이 배를 타고 김해에 들어온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許黃玉)과 혼인하여 얻은 10명의 아들 중에서, 둘째 아들로 하여금 모성을 잇게 함으로써 비롯되었다고 한다.
김수로왕의 10세손인 구형이 신라에 귀부함으로써 가락국이 망하자 자손들이 여러 곳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는데 그들 각각이 정착한 터를 관향으로 삼아 오늘날의 여러 본관이 생겼다고 한다. 따라서 비록 본관은 다르나 허씨는 같은 뿌리를 지닌 혈족이라는 것이 통념이다(→ 김해김씨).
김해허씨는 고려시대에 삼중대광을 지내고 가락군에 봉해진 허염(許琰)을 시조로 하는 성씨이다. 김수로왕 왕비 보주태후의 35세손으로 전하는 허염은 보주태후의 여러 자손들이 각지로 흩어질 때 그대로 김해에 남아 일족을 이루었다고 한다.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김해를 관향으로 삼아 크게 가락군파·호은공파·중승공파·전직공파·증성군파·판서공파·상서공파 등으로 분파하며 세계를 이어왔다.
양천허씨의 시조는 허선문(許宣文)으로 전한다. 보주태후의 30세손인 허선문은 공암현에서 대대로 농사에 힘써 부를 이루었는데, 고려 태조가 견훤을 치던 중 군량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군량을 조달하여 후백제군을 격파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태조가 허선문을 공암촌주에 봉했는데, 후손들이 이를 연유로 그를 시조로, 양천을 관향으로 삼았다. 한때 관향 양천의 다른 이름인 공암을 본관으로 일컫기도 했다.
하양허씨는 고려 때 호장 또는 호부낭장을 지낸 허강안(許康安)을 시조로 삼고 있다. 보주태후의 33세손인 허강안이 하주에 터를 누림으로써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주를 관향으로 삼았는데 뒤에 하주가 하양으로 바뀌어 불리면서 본관도 하양으로 칭하게 되었다.
태인허씨의 시조 허사문(許士文:또는 師文)은 보주태후의 30세손이다. 허사문이 고려시대에 시산군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태인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문헌에는 조선시대에 문과에 급제한 13세손 사문을 시조로 전하는데 사문 역시 시산군에 봉해졌던 까닭이다. 관향 태인의 옛 이름인 시산을 그대로 본관으로 쓰는 후손들도 있으나 역시 허사문을 시조로 하는 일족이다.
함창허씨는 허안지(許安止)의 아들로 조선시대에 등과하여 목사를 지낸 허종항(許從恒)을 시조로 삼고 있다.
그밖에 시조는 알 수 없으나 양평·양주·경주·서산·진주·밀양·양구·영천·한양·전주·광산 등의 본관이 있다. 성씨는 다르나 인천이씨도 허씨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신라시대에 허기(許奇)가 당(唐)나라에 갔다가 안록산의 난으로 피난길에 오른 현종을 호종하여 그 공으로 이씨 성을 하사받고 소성백에 봉해졌으며 고려시대에 들어 후손 허겸(許謙)이 또한 소성백에 봉해져 그 후손들이 소성을 관향으로 허씨에서 갈라져나와 인천이씨를 이루게 되었다.
2000년 인구주택총조사의 성씨 및 본관 집계결과에 따르면, 가구수 9만 3,490호와 인구수 30만 448명으로 성씨 중에서 인구순위 29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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