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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동물의 가죽을 이용한 공예기술 또는 그 제품.
동물의 털이나 가죽은 수렵경제시대부터 이용되었으므로 피혁공예의 연원은 매우 오래되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의하면 "부여에서는 가죽신을 신고 담비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라고 하며, "동예는 반어피(斑魚皮)와 문표(紋豹)가 특산품이었다"라고 한다. 〈당서〉에 의하면 "고구려에서 동진에 담비가죽·갈계가죽·곰가죽 등을 수출했다"라고 하므로 우리나라에서 일찍부터 피혁공예가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피혁공예의 재료는 〈규합총서 閨合叢書〉에 기록된 삼수의 담비가죽과 쥐가죽, 온성과 종성의 황모, 안성의 소가죽 채찍, 단양의 수달피 등을 비롯하여 각 군현의 〈읍지〉에 기록되어 있는 여러 종류의 짐승과 그 가죽이다. 사용 용도에 따라서 복식·악기·장신구·수장구 등으로 구분된다. 복식으로는 부드러운 가죽인 담비나 사슴가죽으로 만든 웃저고리[貂鹿裘], 양반과 사대부들의 신발인 태사혜나 부녀자들의 운혜·당혜, 두텁고 탄탄한 소·말·개 가죽으로 만든 진신 등이 있다. 악기로는 나무통을 가죽으로 메워 소리를 내는 북과 장고가 있는데, 특히 북메우기는 가죽의 유화처리가 중요하다. 그 기술은 생가죽을 석회수에 넣고 7, 8일 담가두었다가 표면이 뿌옇게 되면 맑은 물에 헹구고 가죽의 안쪽을 대패로 깎은 후 닭똥가루를 푼 물에 30시간 정도 담가 부드럽게 한 다음 헹구어 응달에 펼쳐서 말리는 것이다. 그밖에도 안경집·담배쌈지·주머니·장도끈·도장집과 같은 남성용 장신구를 비롯하여 문서함·망건통·안롱(鞍籠)·예물함 등의 가구 표면에 가죽을 씌워 만들기도 했다.
〈삼국사기〉에 신라에는 유피공(柔皮工)을 두어 가죽을 정제하던 피전, 북이나 장고용 가죽을 만들던 피타전(皮打典), 말갖춤용 가죽을 만들던 추전(鞦典), 가죽신을 만들던 탑전(鞜典)과 화전(靴典) 등이 있었다고 하므로 가죽을 이용한 관청이 이미 삼국시대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피혁 가공과 이용은 고려에도 계승되어 상복서와 봉거서에 피대장(皮帶匠)·피갑장·피장 등을 두어 각종 신발·병기류·말갖춤 등을 만들었다. 조선시대에도 상의원·제용감·공조·군기시와 외공장에 피장을 두었다.
피장은 숙피장(熟皮匠)·사피장(斜皮匠)·주피장(周皮匠)·생피장·웅피장·표피장으로 세분화되었으며, 제조장인으로는 화장·삽화장(靸靴匠)·안롱장 등이 있어서 피혁의 이용이 광범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 피혁공예는 거의 명맥이 끊어지고 오직 북메우기만 중요무형문화재 제42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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